왕유

1 중국 당(唐)대의 시인이자 화가

왕유(王維, 701-761)

자는 마힐(摩詰). 중국 산시성[山西省] 출신이다. 시성(詩聖) 두보, 시선(詩仙) 이백과 견주어 시불(詩佛)이라고 불린다.[1] 한국에서는 두보나 이백에 비해 다소 알려져 있지 않은 감이 있다.

일본견당사로 당 조정에서 비서감을 지냈던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麿呂)가 귀국할 때 지어준 '일본으로 돌아가는 비서 조감을 전송하며(送書秘晁監還日本)'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는 오노 후유미의 소설 십이국기 '마성의 아이'에 실려 있다.

주요 작품으로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있다.

2 고려시대의 인물

王儒/王柔

생몰년도 미상

고려 초기의 인물. 자는 문행(文行).

본래 성은 박(朴)씨로 광해주(춘천시) 사람이고 품성이 수수하면서도 정직했고 경서, 사서 등에 통달했는데, 태봉에서 원외랑, 동궁기실을 지냈지만 궁예가 스스로 미륵을 칭하면서 관심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본다고 주장하면서 법봉으로 신하들을 때려죽이는 광기를 일으켜 정치가 어지러워졌다.

이로 인해 벼슬에 물러나 산 속에 숨었다가 왕건이 즉위하자 918년 여름 6월에 그를 알현했는데, 왕건은 부열, 태공망을 얻은 것에 비유하면서 그를 얻은 것을 기뻐했고 관모와 띠 등의 공복을 내려주고 기밀을 관장하는 직위를 맡게 했다. 공을 세운 후에는 왕(王)씨 성을 하사받았고 그로써 해주 왕씨의 시조가 되었다. 벼슬은 대광에 이르렀으며, 그의 딸은 왕건의 18번째 비인 예화부인이 되었다.

왕자지가 그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도 등장했다. 배우김진태.

금강산에 숨어 지내던 학자이며, 마침 아지태의 천도 얘기때문에 민심이 흉흉하던 시기에 허월이 종간에게 그를 추천해준다. 사람 볼줄아는 허월이 추천한 인물인 만큼 박유는 학식이 대단한 인물이었고, 궁예는 그에게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게 한다. 문제는 그 태자들이 어린이도 아니고 겨우 두살정도 밖에 안된 아기들이라는 것. 궁예는 엘리트 교육을 시킨다며 태자들에게 가혹한 생활[2]을 강요했고, 박유도 이건 영 아니다 싶어 궁예에게 이건 너무 가혹하다며 간언했지만, 무시당했다.

강직한 모습도 자주 보이는데, 궁예 앞에서 그의 정책을 대놓고 반대한 적도 있었다. 그때 궁예는 아직 미치지는 않은 관계로 그 대범함을 마음에 들어하며 그냥 넘어가는데, 종간은 혹시라도 박유가 잘못될까봐 되도록이면 그런 정치 얘기는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물론 종간과는 대놓고 같이 궁예의 정책과 아지태를 비판하는 사이인 만큼, 궁예와 달리 종간은 박유의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대놓고 간신배짓을 하는 아지태(동문수학한 사이이다)를 싫어하며 아예 은부에게 아지태를 제거하기 위해선 왕건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간언한다.

후에 종간으로부터 궁예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도인을 데려와달라고 부탁받은 것을 계기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해버리며, 실제 역사와 같이 왕건이 즉위한 후에 찾아와 태자 무의 스승이 된다. 이후 무가 정윤. 즉 왕위 계승자로 책봉되는 과정을 비롯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지만, 궁예 때보다는 비중이 조금 줄어든 편.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1. 마힐이라는 단어 자체가 불교의 유마힐거사의 명칭에서 따온 것이다. 왕유가 불교 신자가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
  2. 스님들처럼 새벽에 일어나 불경을 듣게 하고, 아침을 죽으로 때우게 하는 등 어른에게도 힘든 생활을 강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