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당사

けんとうし
遣唐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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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견당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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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당사선 모형

1 개요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에 걸쳐 일본이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파견한 사신단이다.

2 역사

2.1 견당사의 전신 견수사

6세기 초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여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구축하자 일본은 그런 중국을 보며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일환으로 견수사를 꾸려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당시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백제의 영향을 받아 국가적으로 불교 문화를 장려함과 동시에 일본의 정치, 문화, 종교 등 다방면에서 급속적인 성장을 이루웠는데 그러한 드라이브는 바로 견수사였다. 견수사는 중국의 율령 제도인 3성 6부제, 선거제(과거제의 전신) 그리고 학문과 기술 등을 받아들여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다. 그동안 일본은 중계지인 한반도를 거쳐서 중국 문물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견수사로 더 이상 한반도에 의존하지 않고 중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2.2 견당사의 역사

당나라와 일본이 처음 접촉한 것은 631년으로 일본의 당나라 입조 이후 일본은 당나라에 16차례 이상 사신을 파견했다. 견당사로 파견된 일본인은 당태종의 정관의 치를 보면서 이를 일본 사회에 전파하여 일본이 중앙집권화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겐메이 천황이 수도를 헤이조쿄로 옮기면서 당나라의 장안성을 모방해 축조한 것도 바로 견당사의 영향이었다. 견당사는 단순히 사신만 파견하는 것이 아니라 당학을 익히기 위한 견당유학생이나 승려 등도 함께 당에 입조하였다. 대표적으로 헤이안 시대의 승려 엔닌(えんにん), 천태종 창시자 사이쵸(さいちょう), 진언종의 창시자 구카이(くうかい) 등이 있었다. 그러나 9세기 중엽 당나라 쇠퇴하면서 일본 내에서도 수당의 율령체제가 붕괴되고 있었다. 이에 좌경대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는 견당대사에 부임되었음에도 당의 망국을 근거로 견당사 중지를 건의해 894년 견당사는 중지되었고, 907년 당이 멸망하면서 견당사는 폐지되었다. 이후 일본 내에서는 국풍 문화가 급진하여 한자를 간소화시켜 가나 문자를 만들게 되어 일정 부분 일본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2.3 그밖에

일본은 견당사를 파견한 것을 당나라와의 조공-책봉의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당에 입조를 하였고 이후 여러차례 사신을 보냈기 때문에 형식적으론 조공-책봉의 성격을 띠었다. 하지만 당나라도 일본을 번국이 아니라 먼 듣보잡 섬나라로 취급하였다. 당나라로 가는 해로는 크게는 두가지로 나뉘는데 초기 견당사는 주로 북로(신라로)를 이용하다가 한반도의 정세 변화로 702년에 동중국해로 가로지르는 남로를 개척하여 이후 남로를 이용했다. 그런데 남로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등 잦은 기상 여건의 악화로 배가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기상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남도로라는 추가 해로를 개척해 이용하였다. 그리고 딱 한 차례에 발해로를 이용했는데 동해로 북상하여 동경용원부와 상경용천부를 경유한 뒤 유주로 입경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때는 759년으로 당나라는 안사의 난으로 화북 지방이 전란으로 뒤덮여 있었다. 흠좀무 견당사는 2척에서 4척으로 편성되었고, 한 회에는 500명이 승선하기도 했으나 평상시에는 100명 내지는 130명까지 승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