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오케팔론 전투

Battle of Myriokephalon(Battle of Myriocephalum)[1]

미리오케팔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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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176년 9월 17일
장소
현재 터키의 Beyşehir 호수 근처
이유
복합적, 기본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고토 수복 시도
교전국동로마 제국
룸 술탄국
지휘관마누일 1세클르츠 아르슬란 2세
결과
룸 술탄국의 전략적인 승리
영향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내륙 수복을 위한 마지막 공세 좌절
병력25,000 이상5,000~10,000
피해규모알 수 없음알 수 없음

1 배경

말년에 접어든 마누일 1세는 치세의 절정을 누리고 있었다. 재위 초반 이탈리아를 공략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동방에서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지역을 수복한 이후 서방에 힘을 쏟은 정책은 성공을 거둬서 헝가리, 세르비아를 복속하고 베네치아 공화국마저 격퇴하기에 이르렀다. 서방의 주요국가와 나쁘지 않은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고, 제국 내부의 문제들이 존재했지만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1161년 룸 술탄국이 사실상 제국의 봉신국이 되어 마누일이 서쪽에 관심을 돌린 사이, 동방에서는 힘의 균형이 변화하고 있었다. 장기 왕조의 누레딘 사후 살라딘시리아를 제패한 다음 예루살렘 왕국과 휴전 협상을 맺은 뒤 내정을 위해 본거지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그 틈을 타고 룸 술탄국이 부황과 힘을 겨뤘던 다니슈멘드를 제압하고 영토를 집어먹으며 재차 떠올라 점차 제국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마누일은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1세와 '로마 황제'로서 일종의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경쟁은 상징적인 영토인 이탈리아에 대한 쌍방의 영향력 확대가 실패함에 따라 '성지'인 예루살렘 왕국의 보호로 옮겨가 있었다. 신롬 측은 물리적인 거리가 상당했으므로 십자군을 선포하고자 하였으나 동로마 측은 서방제국의 영향력 확대는 물론 십자군 자체를 경계하여 이를 스스로 대체하고자 하였다.[2] 이에 따라 실시된 1169년의 다미에타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러한 기조를 이어가고자 했던 동로마 측 에게는 과거 제국의 영토를 차지한채로 신성 로마 제국과 연대하려하는,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 이교도 국가인 룸 술탄국이 눈에 걸리게 되었다.

마누일은 룸 술탄국이 다니슈멘드 왕조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집어먹은 영토를 뱉으라고 주장했고, 외교사절이 오가며 투닥댔으나 쌍방은 서로의 영토를 원하고 있었으므로 협상이 성립 될 리가 없었다. 마누일은 '성전'을[3]선포했고 중앙 야전군은 물론 봉신국과 동맹국으로부터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하였다.

2 준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중앙야전군 세력이 한번 붕괴했던 제국이었지만, 근 100여년 동안 복구 된 군대와 강력한 재력 덕에 이번에는 상당한 병력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더불어 제국군과 용병말고도 동맹인 헝가리 왕국, 세르비아, 아르메니아 등으로부터 지원군을 받을 수 있었고 최근에 수복한 안티오키아는 누레딘이라는 위협이 없어져 여력이 생긴 상태였으므로 보탬이 될 병력을 보낼 수 있었다. 최소 2만 5천이라는 대군[4]이 집결하였으며 비록 노령이지만 경험 많은 황제가 총지휘관으로 있었다. 룸 술탄국의 수도인 이코니온를 공략하기 위해 진군을 시작한 제국군의 사기는 높았고, 지휘관들은 다소 무리한 목표설정에도 불구하고 대군에 안주하여 상황을 낙관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룸 술탄국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몰락의 위기를 극복하고 간신히 본래 궤도에 오른 상황이었는데, 졸지에 망국의 위기에 몰렸으니 말이다. 술탄은 황제에게 계속 평화협상을 제안했으나 우위를 확신하고 있던 황제는 여러번의 유리한 제안까지 물리쳐 버렸다. 결국 남은 길은 전투뿐이었고, 술탄은 병력을 긁어모았으나 만여명도 안되는 전력일 뿐... 막장으로 벌어진 전력차를 극복하기 위해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전술로 시간을 끌고, 동시에 화평을 지속적으로 제안한다는 전략이 수립되었다.

3 진행

761px-bury1903xxxviii_jjy0501.jpg 전투 4년후 1180년의 상황을 나타내는 지도. 이코니온까지는 상당히 멀다.

집결지인 로파디온에서 이코니온으로 향하는 길은 멀었다. 더군다나 구릉지와 산악지대가 펼쳐진 늦여름의 더운 고원지대는 대군이 기동하기에는 나쁜 환경이었고, 청야전술에 의한 물과 마초의 부족은 제국군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술탄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주변의 환경에서 자신들의 장기인 매복과 힛 앤 런 전술이 잘 먹힌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이러한 매복에 제대로 걸려든 것은 전위부대인 안드로니코스 바타체스의 별동대였다. 별동대는 본대와는 달리 숫적인 우위를 가지지도 못했고, 그들이 진군해온 길은 수풀이 우거져서 매복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가진 곳이었다. 아마시아를 향해 진군하던 이 불운한 별동대는 괴멸되었고 지휘관인 안드로니코스의 머리는 창끝에 걸리게 되었다. 상황이 나쁘게 굴러가기 시작한데다 다시 한번 술탄이 평화협상을 제안했지만, 마누일은 진군을 강행했다. 더위와 질병, 보급부족은 물론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매복공격에 시달린 행군 끝에 제국군은 미리오케팔론 요새의 폐허가 있는 치브리체 산 부근에 도달했다.

4 전투

누가봐도 '매복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미리오케팔론의 도로는 위험해보였다. 여러 숙장들이 협곡을 통과하지 말고 안전하게 우회하자는 의견을 내었고, 대안으로 백여 마일 못 미치게 떨어진 평야지대로 향해 대군의 우위를 살리자고 주장했다. 실제로 조부인 알렉시오스 1세필로멜리온 전투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전투를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협곡지대를 강행돌파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재위 내내 투르크인들과의 전투로 이골이 난 황제였는데도, 숙장들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미숙한 지휘관같은 결정을 내린 것.

어쨌든 강행돌파하기로한 제국군은 오후가 되자 정찰조차 하지 않은 채 진입을 시작하였다. 선발대와 중앙군으로 이뤄진 주력군이 통과중에 공격을 받았으나 어렵지 않게 격퇴해내었고, 이는 별다른 문제없이 협곡을 지날 것이란 생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좌우익부대와 근위대, 공성대, 보급부대들이 진입하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는 막대한 피해를 내기 시작했다. 투르크군은 궁시 공격은 물론 백병전까지 걸어왔고 이는 좁은 지역의 비전투 물자들 사이에서 전투를 강요당한 제국군에게 혼란을 야기시켰다. 주력부대와 떨어진 상태의 제국군은 지쳐있던데다 매복이었던 까닭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마누일은 넋이 나간 것처럼 이를 바라보았다. 때문에 피해는 점점 커져서 처남인 안티오키아의 보두앵과 지휘관의 일원이었던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등이 전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누일은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하였고 곧 반격이 개시되었다. 반격에 적잖은 피해를 입은 투르크군은 해가 완전히 지고난 저녁이 되어서야 물러났고 그제서야 협곡을 통과한 황제는 진지구축 중 이던 선도부대와 합류 할 수 있었다.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가 지휘하던 후위대는 이미 전투가 거의 마무리 되었기에 별다른 피해 없이 황제와 합류했고, 재정비를 마친 제국군은 밤중에 이어진 투르크군의 공격 또한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5 종결

제국군은 곧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다. 야전을 위한 주력군은 온전했고 전력 또한 여전히 압도적이었으나, 공성전을 위한 장비와 물자를 망실한 것을 알아챈 것이다. 원정의 목적인 이코니온을 공략하기 위해선 이러한 것들이 필요했는데, 그것들이 없어서야…

결국 마누일은 안전한 퇴각을 보장받는 대신 국경지대의 전진 요새들을 파괴하는 것으로 협상안에 동의했다. 공세 실패와 평화 협상은 곧 룸 술탄국이 획득한 아나톨리아 영토를 당분간 인정하는 것이었다.

6 영향

만지케르트 전투와 종종 비교되고 마누일 자신도 로마노스 4세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했지만 큰 피해는 아니었다. 잃은 영토도 없었으며 황제가 포로로 잡힌 것도 아니었다. 제국군도 건재해서 조약의 쌍방 불이행으로 인한 이후의 전투에서 제국군이 승리하는 등 여전히 제국의 우세였다.

그러나 어정쩡한 전투결과와는 별개로 영향은 엄청났다. 일단 황제가 친정하는 '성전'이 실패함에 따라 기독교 국가들에 대한 제국의 권위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전투를 주시하고 있던 교황을 프리드리히 1세신성 로마 제국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이는 서방과의 관계개선과 견제를 통해 외교적인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던 마누일의 구상을 깨트리는 것으로서 동시에 제국의 관심이 좀더 서방으로 이동해야함을, 또한 제국이 동방에 대한 수세를 좀더 취해야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전투이후 제국군은 아나톨리아에서의 여러 전투에서 우세한 모습을 보였고 마누일 역시 직접 친정하는 등 관심을 끊지는 않았으나 이것이 대규모 공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리고 대규모 원정의 실패는 서서히 표면으로 드러난 구조적인 문제들과 함께 제국의 재정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누일은 군사적인 능력이나 외교적인 감각은 탁월했으나, 삐걱이기 시작한 내정에 손댈 시간이 없었다. 지방이 중앙을 향해 공공연히 불만을 표출했고 빈부격차가 심해졌으며 부정부패가 들끓었고 서방에 대한 반감도 커져갔다.

후계자 문제 역시 마누일을 압박했다. 장성한 아들이 없었기에 두번째 왕비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본 어린 알렉시오스 2세가 그의 후계자 였는데, 몇년 뒤 마누일이 사망했기 때문에 이는 그의 사후 정치적인 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당시 제국은 외교술과 군사적인 재능을 겸비한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와 안정적인 경제가 뒷받침하는 강력한 군대가 있는 상황이었으나, 마누일 사후 모든 것이 무너짐으로서 미리오케팔론 전투는 제국이 동방영토 수복을 목표로 했던 마지막 대규모 공세가 되었다. 즉, 투르크인들을 아나톨리아 중부에서 몰아낼 회심의 일격이 황제의 전술적 실책에 의해 허무하게 종결 된 것이다.
  1. 영어로 쓰면 myriad heads. 무수한 머리라는 뜻으로 여기서 머리는 산봉우리이다. 지명만으로 험한 지세를 알 수 있다.
  2. 실제로 십자군은 동로마 영내를 지나면서 약탈, 파괴 등을 일삼았으므로 경계할만 했다. 거기다 제4차 십자군 원정의 결과를 생각한다면...
  3. 헤라클리우스 이후로 제국은 자주 성전을 선포 했지만, 마누일의 의도는 상기한 이유에 의한 서방과 십자군 국가들에 대한 제스쳐라 볼 수 있다.
  4. 제국군만 이정도라는 설도 있으며, 동맹군을 더할경우 4만 이상까지 볼 수도 있다. 당시 군대의 행렬이 10마일에 달했다는 언급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