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일본어 위키백과)
우토로 마을 위성사진, 아래로 이동하면 자위대가 보인다.
1 개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장소 중 하나
일본 교토부 남부에 위치한 우지시의 마을이다. 15년 9월 초 무한도전을 통해 마을의 사정이 전파를 타게 되어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행정구역은 일본 교토 부 우지 시 이세다 정 51번지(일본어: 京都府宇治市伊勢田町51番地)이다. 본래의 표기는 우토구치(일본어: 宇土口)였으나 잘못 읽혀 우토로(ウトロ)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 징용 등의 이유로 일본에 온 재일교포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2 역사
태평양 전쟁 중인 1942년 2월에 교토 비행장과 병설 비행기 공장 건설 공사가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일본국제항공공업[1]이 시공을 맡았고 약 2천 명이 동원되었다. 이 중 약 1300명이 조선인이었으며 그들과 그 가족이 생활하고 있던, 1943년에 건조된 합숙소(숙박시설)가 현재 우토로의 전신이다.
그러나 현재 우토로 주민이 만드는 '우토로 국제 대책 회의'등에 따르면 "일본 국제 항공 공업의 1300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국민 징용령과 국가 총동원법에 의해 강제 징용된 것이며, 이들 중 대다수는 생계와 병역 등의 이유로 일본으로 이주해온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국의 국무총리 산하 '일제 강점 하 강제 동원 피해자 진상 규명위원회'도 2006년 말 보고서에서 우토로 주민에 대해 강제 징용자가 아니라 원래부터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이 대부분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작가 미즈노 나오키는 강연에서 "전시에 광산에서의 가혹한 노동이 싫어 도망간 조선인 노동자들 중 여기서 일하면 더 이상의 징용은 없다는 군의 말을 믿고 우토로에 온 사람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우토로 마을은 강제 징용 이전부터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을 기반으로, 이에 1930년대 말 빈곤 계층의 조선인과 피징용자들이 더해져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해방 직후 일본이 패전국이 돼버리자 공사가 중단되었고 자연스럽게 이들은 실업자 신세가 된다. 그 후에 어찌저찌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나 1987년 닛산지주에 마을 부지 전체가 매각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건 조선인이 조선인을 상대로 사기친것이였다#
이후 그곳에 살던 강제 징용 재일 한국인들은 퇴거 위기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문제로 당시 한국인 강제 징용 인원은 1300여 명이었지만 2015년 현재 거주민은 150여 명밖에 남지 않았고, 그리고 이들은 일본 국적 취득을 거부했으므로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피해자들을 대표해 배상금을 받은 한국에게 배상금을 지급받을 권리가 있다. 물론 한국에서 한일기본조약은 흑역사 취급을 받고 있고 한국 국내에서의 배상금 문제 해결에도 진척이 없기는 하지만... 다행히 재일동포와 국민들의 도움으로 17억원을, 참여정부의 30억 지원을 받아 일부 토지를 구입해[2] 거주권을 확보한 상태. 2017년에 재개발을 할 예정이라고. 완공은 약 6년 뒤에 될 예정이라고 한다. 재개발을 하는 것은 좋지만 역사와 추억이 담긴 공간이 사라지는것이 아쉽다는 의견도 있다.
이 지역은 상수도 시설이 없어서 직접 우물을 팠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물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하수도 시설은 아직도 없다. 그러니까 비오면 이 마을은 속절없이 침수당하는 거다. 뿐만 아니라 하수도 시설이라 함은 사용한 더러운 물을 내려보내는 시설을 통틀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목욕을 하거나 변기에 볼일을 볼때 사용한 그 물을 버릴 곳이 없다는 얘기다. 이 정도로, 주변 일본인이 사는 마을에 비해 아직도 시설이 열악하다.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 역시 다가와 아키코씨가 우토로에 사는 친구가 상수도가 없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시작한 일이라고 한다. 현재는 거의 30년차.
우토로 마을 주변의, 원래는 언덕이었던 곳이 강제 징용 이후 공사를 통해 지대가 상당히 낮아진 것이라 한다.(출처 : 무한도전 배달의 무도 아시아편 방영분) 그리고 이 터에는 현재 자위대 기지가 자리잡았다.
부산 일보의 우토로 특집에 기사화된 우토로 마을이 걸어온 길
3 기타
공식 홈페이지
킨키 일본 철도 교토선 이세다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