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교

파일:Attachment/WJbridge3.jpg
월정교의 터. 석축만 남아있었다.

파일:Attachment/096.jpg
현재는 복원 중이며, 2013년에 1차 복원으로 누교(樓橋) 복원이 마무리됐다. 2단계 사업인 교량 양쪽 문루 건립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준공될 예정이다.

月精橋

1 개요

통일신라 시대 서라벌에 세워졌던 다리. 세트로 지어진 일정교와 함께 국왕이 사는 궁전경주 월성과 그 남쪽 남천 건너편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한때는 나무로 된 다리는 사라지고, 다리 바닥에 있던 석조물만 일부 남아 있었다.(사적 457호)

2 역사

월정교는 춘양교와 함께 신라 제35대 경덕왕 19년(760)에 축조된 것으로 삼국사기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 제25대 충렬왕 6년(1280)에 경주부 유수 노경론이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최소 520년간은 존재해왔다는 말이다.

3 복원안

파일:Attachment/WJbridge.jpg
파일:Attachment/WJbridge2.jpg

문이 있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입구를 막는 누각을 세우는데, 복층안과 단층안이 제시가 되었다. 아무래도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겸사겸사 복층으로 결정되었다. 물론 왕궁과 연결된 다리라는 점과 방어목적이 있었을 것이란 이유가 붙긴 했다. 아무튼 복층안이 선택되어 2007년부터 복원사업에 들어갔으며, 이런저런 논란 덕분에 계속 연기되다가 2012년 말을 완공 목표로 공사가 계속되었다.
월정교에 대해..

2011년 9월에 이미 상량식을 했기 때문에 사실상 누각을 제외한 다리의 목조 구조물은 거의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

그리고 2013년에 1차 복원 사업이 완료되어 일반에 개방되었다.

2016년 4월에는 양쪽 문루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4 복원 논란

사실상 월정교의 모습은 거의 상상에 의존하고 있다. 목조건축의 특성과 출토된 기와로 봐서는 지붕이 있는 다리였다는 것은 맞지만, 세부적인 모습이나 누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 사실상 고풍스러운 스타일의 다리를 새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월정교를 복원하는 측에서도 이 것이 다소 무리한 계획임을 인지하고 있으며, 월정교가 첫 복원 대상으로 선정된 것도 랜드마크급 유적들에 비하면 비교적 원형 훼손 논란의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덜하기에 일종의 시험 케이스로 선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황룡사등의 더 중요한 유적의 복원 문제가 월정교에 달려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이 것은 말하자면, 경주시라는 도시 자체를 재건하고, 관광 상품을 늘리자는 취지가 학술적인 정확성보다 우선시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경주가 신라의 도읍으로써 그 흔적은 많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사라진 부분이 많아 실제적인 볼거리는 좀 부족했다는 점에서 이해가 안 가는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학술적인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계속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다.

복원된 결과물에서 고대 건축의 특징인 인자형 대공이나 조선시대에 사라진 목조 박공장식인 현어, 출토된 금동 난간 장식 등을 어느 정도 사용한 점은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봐서는 몇 가지 의문점이 보인다. 다리 난간 아래에 있는 기와 지붕 등이 대표적인데, 이런 양식은 중국 구이저우 성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풍우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지만,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관련성을 찾기는 어렵다. 이외에도 고질적인 한국 건축물 복원의 난점인 단청의 세부문양과 상록하단법이 실제로 신라 시대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겠느냐 등 누군가 확실하게 그렇다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또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난감한 점들이 남아있는 것.

다리가 남아있던 시절 지어진 김극기의 시에 나온 무지개 다리 그림자 거꾸로 문천에 비치었네’ 구절로 볼 때 아치형 다리였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 하지만 발굴조사에서 아치에 쓰이는 부재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치형 다리가 아니라고 판단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