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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 ||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 ||
이름 | 한글 | 경주역사유적지구[1] |
영어 | Gyeongju Historic Areas | |
프랑스어 |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 |
국가·위치 |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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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2000년 | |
등재기준 | (ii)[2], (iii)[3] | |
지정번호 | 976 |
慶州 月城
1 개요
신라의 궁궐 | |||||
월성 | 임해전 |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의 궁궐터. 사적 제16호.
성 바로 북동쪽에 동궁과 월지가 있는데, 원래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그 사이에 7번 국도가 나면서 나뉘었다. 또한 바로 남동쪽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이 있는데, 여기도 1974년 건설 당시 왕궁터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어 일부 역사학자들이 동궁과 함께 남궁(南宮)이 있었고 그 위에 박물관을 세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동궁과 합하면 약 21만 제곱미터에 달해 상당히 큰 왕궁이었다.
2 명칭
후대에 붙여진 지명인 고려의 만월대와는 달리 당대 신라때부터 궁궐이 있었던 곳의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 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이라 불렸다. 혹은 반달 모양에 가깝다고 반월성이라고도 부른다. 신라 당대에는 그냥 간단하게 임금이 사는 성이라 재성(在城)이라고도 불렸다고.[4] 어쨌든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는 반월성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3 구조
월성은 하늘에서 바라보면 이름대로 달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초승달 내지 반달 모양으로, 주변보다 높은 언덕 지역이라 고대에는 천혜의 요새지였을 것이다.
경주 월성 북쪽으로 넓은 주작대로가 나 있어 정북쪽의 성동동 전랑지까지 이어졌다. 월성의 남쪽은 남천이 흐르고 있어서 주작대로와 연결된 정문이 북쪽인데, 옛날 동아시아 웬만한 도시들은 중국의 장안을 본따서 비슷비슷한 계획도시를 만들었는데[5] 중국식이라면 남쪽으로 나 있어야 할 궁전의 정문이 북쪽이라[6] 서라벌은 이런 표준에서는 다소 벗어난 구조였다. 당연히 중국 문화가 들어오기 전 까마득한 고대부터 서라벌이 수도였으니 어쨌든 타고난 지형상 그건 어쩔 수 없고, 중대에 들어서는 나름대로 중국의 장안을 본따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도시를 네모 모양의 방리로 구획하였다. 전체가 정사각형 36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1개 방은 16개의 작은 구획으로 나누었는데 구획에는 자갈 등으로 폭 13미터의 도로를 깔았다. 경주 왕경 전체는 6부 55리 36방으로 되어있었다.
4 역사
원래 신라 건국 이래 왕궁은 금성이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파사 이사금 22년(서기 101년)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7] 동경잡기에는 유례 이사금 7년(서기 290년) 큰 홍수로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 보수하였으며, 소지 마립간 9년(서기 487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다. 이외에도 중수만 29번을 거쳤다고.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래 호공의 집이었는데 탈해가 그 땅이 좋음을 알고 숯과 부싯돌을 묻고 자신이 대장장이의 후손이며 옛날에 우리 가문이 살았던 땅이라고 야바위 이스라엘?속여 빼앗아 월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보면 주위가 1,023보이며, 언덕 위에 반월형으로 흙과 돌을 혼용하여 쌓았고, 여기에 신라 역대왕들의 궁성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문무왕 때에는 안압지, 임해전 , 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의 동, 서, 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고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임해전으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지금은 안에 있던 많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1741년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 만든 석빙고(보물 제66호)만 남아 있다. 지금으로써는 정확한 월성의 건물 배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나, 유구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고 아직 발굴이 안된 부분이 많다. 관련 글
1955년 경주군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되자, 경주군의 잔여지역을 이 월성의 이름을 따 '월성군(月城郡)'으로 개칭하였다.[8] '월성 원자력 발전소'라는 이름 등에서 아직까지 월성군 명칭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후 1989년 다시 경주군으로 명칭을 환원하였고 1995년 도농통합제 실시로 경주군이 경주시에 통합되었다.
참고로 백제 성왕의 목은 왕궁의 북청 계단 밑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왕궁이 월성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월성 계단 밑에는 성왕의 머리가 잠들고 있을지도..백제의 원한이 느껴진다.
5 주요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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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서라벌 시가지의 모형. 앞 부분에 월성이 보인다. 그러나 위 이미지의 월성의 건물 배치는 본격적으로 월성 발굴이 아직 시작되기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 뚜렷한 근거가 없는 상상일 뿐이다. 오른쪽 중간쯤에 황룡사가 보인다. 월정교와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가 돼야 생겨서 여기에는 없다.[9] 아직 테크가 모자랍니다 참고로 월성 남쪽에 있는 절은 인용사다. 월성 북쪽으로 큰 도로가 있고, 그 끝에 보이는 건물은 또 다른 신라의 궁궐터인 전랑지(대궁지)다. 정확한 이름은 불명.
삼국사기 등 사서에는 왕궁 내 각 건축물의 이름들이 남아있는데, 숭례전, 강무전, 명학루, 월정당, 월상루, 망은루 등의 건물과 임해문, 인화문, 무평문, 현덕문, 귀정문, 준례문, 적문 등의 출입문이 있었다. 이 중 숭례전은 일본 등 외국 사신을 접견하고 연회를 여는 장소로 썼다.
2000년대 후반 들어서 진보한 레이더 관측으로 지하에 묻힌 유적을 탐사했는데, 위 상상도 같은 당초의 예상과 달리 월성 위 각 건물의 배치가 그리 바둑판식으로 반듯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월성 안에는 여러 건물들의 초석 외에도 지름 40미터 안팎의 호수와 가마터, 공방, 우물 등 여러가지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6 발굴과 복원 논란
월성 복원 상상도. 중심 건물인 조원전이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됐지만 건물과 행각의 위치 등은 상상으로 만들어졌다.
http://www.miraetv.net/wp/wp-content/uploads/2013/10/신라왕궁-핵심유적-복원정비1-신라왕궁대전복원.jpg
중심 건물인 대전의 상상 복원도. 겹처마가 인상적이다.
경주시 땅에 수많은 신라 관련 유적이 있지만 월성은 신라 국왕이 천 년 동안 살았고 정치의 중심이 되는 왕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일개 무덤이나 사철터 정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귀중한 고고학적 비밀이 묻혀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장 궁전의 일부였던 안압지에서만 나온 발굴 결과는 월성 발굴에 큰 기대를 걸게 만들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시험 발굴에 나섰다가 지하에 너무 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어 당시 기술로는 도저히 발굴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대로 덮어버렸다고 한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레이더 탐사를 비롯한 전면적 학술조사 결과 예상대로 놀라울 정도로 많은 유구가 잘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각종 건축물이 초승달 모양의 월성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으며 그 초석, 기타 유물이 온전하게 매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과가 알려지면서 고고학계에 있어서는 희망인 동시에 큰 과제가 되었다. 제대로 발굴하려면 50년 100년은 걸릴 것이라고 볼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규모였고, 그만큼 돈과 정성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천 년 세월 동안 건물을 세웠다 허물었다를 반복했고 월성 지하에는 여러 시대의 흔적이 수직으로 겹쳐 섞여있어 발굴하기가 매우 까다롭고, 섣부른 발굴은 오히려 파괴를 부를지 모른다고 보는 시각도 크다. 당장 무령왕릉의 사례만 봐도 졸속 발굴로 알아내지 못한 정보가 컸으며 바로 옆 안압지도 예상하고 시작한 게 아니라 발굴과정이 비교적 부실했다.
뜬금없다면 뜬금없지만 월성 신라왕궁을 원래 있던 그 자리에 복원해야 한다는 얘기가 간간히 흘러나오는 모양이다. 이유인즉슨 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신라 궁궐이 어디 있고 어떻게 생겼냐고 물어볼때 난처하다는 것과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군은 연간 600만 명 국내외 관광객 유치 목표로 6천904억원을 투입해 백제문화단지를 만들어 백제문화역사관, 사비 궁, 능사(왕국 내 사찰), 5층 목탑, 생활문화마을, 관광리조트 등을 조성했는데 우리도 그렇게 해야하지 않겠냐는 것. 숙명의 라이벌이다.#그만둬! 문화재를 망칠셈인가! 드높은 신라의 고대 법률은 현대 세상이 관여하는 것을 엄격히 금한다! 그런 짓을 하다니 뻔뻔하구나! 어째 고구려 왕궁 안학궁 옆에 세워진 테마리조트(...)가 생각나면 기분 탓이다. 이웃 일본도 역사적 근거 없이 상상에 근거해 헤이조쿄를 복원해서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는 실정이다.[10]
어쨌든 간에 왕궁인 월성과 경주 남쪽을 연결하는 주 통로로 사용된 대규모 교량이었던 월정교는 현재 복원 중이다#. 물론 이것도 역사적인 고증이 부족한 상태에서 만들어진다고 말이 많다.#
2025년까지 복원을 위해 국비 1천 890억원, 지방비 810억원 등 2천 700억원을 투입한다. 우선 2017년까지 140억원을 투입해 월성 발굴 조사 및 기초 학술 연구를 진행하고 궁궐 핵심의 복원에 착수한다. 경북도와 경주시는 발굴 조사 성과를 토대로 복원 가능한 유구(옛 물건) 등의 복원을 추진할 예정이다 #. 그리고2014년 12월 12일 드디어, 월성에 대한 본격적 발굴이 시작되었다. # 일단 발굴을 통해 남아 있는 건축물의 흔적을 확인해 복원까지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다음과 같이 2023년 까지 발굴이 진행될 계획이다.
- 1단계(2014∼2018년/5개년): 월성 중앙부 시굴조사와 정문으로 추정되는 북문지와 동문지, 남문지, 서문지를 발굴 조사
- 2단계(2019∼2023년/5개년): 원지와 기타 유구 확인지역을 발굴하며, 학술대회 개최 및 발굴 종합보고서를 발간할 계획
참고로, 월성을 제대로 발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 동안 성벽이나 해자에 대한 발굴만 진행이 되었고, 월성 내부에 대한 발굴은 이번이 최초인 것. 따라서 학계는 이번 발굴에 거는 기대가 크다.
월성 주변 발굴 현황은 다음과 같다.
1915년>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처음으로 월성 주변 발굴 조사를 함. 월성 서쪽의 남쪽 성벽 일대
- (골촉, 골침, 멧돼지 이빨, 사슴뿔, 동물뼈, 탄화곡물, 토기편 등 발굴)
1979~1980년> 동문지 발굴
-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의 문터를 확인, 성벽에 대한 대략적인 토층 상황과 석축 해자 유구를 확인)
1984~1985년> 성벽 바깥에서 해자 발굴
- (해자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 해자가 기능을 상실한 후 통일신라 시대에는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을 확인)
1985~2014년> 1~5호 해자와 계림 북편 건물터, 첨성대 남편 적심(積心) 건물지, 월성 북서편 건물지 등 확인
2007년에 행해진 지하 레이더 탐사와 이후의 시굴 조사에 의해 많은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 ↑ 석굴암, 불국사, 양동마을 제외
- ↑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 ↑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 ↑ 월성 발굴때 재성이라고 적혀있는 기와가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 ↑ 발해의 상경용천부, 일본의 나라, 교토 등도 똑같이 장안을 본따서 정궁과 주작대로를 두고 구획을 지었다.
- ↑ 중국식 정석에 가까운 구조는 경복궁이나 자금성을 떠올려보면 된다. 경복궁의 경우 광화문이 정문이고 광장 쪽이 주작대로
- ↑ 참고로 금성은 계림(시림) 동쪽으로 추정중이다.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삼국유사)" 금성과 계림, 월성 모두 반경 1km 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 같은 예로 수원시와 화성군(현 화성시)이 있다.
- ↑ 단, 안압지와 붙어있던 임해전 건물은 보인다
- ↑ 다만 헤이조쿄의 경우는 대극전(大極殿) 복원에 필요한 자료가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헤이안 시대 말기에 고시라카와 덴노(後白河天皇)가 만들게 한 『연중행사 에마키(年中行事絵巻)』라는 문헌에 고시라카와 덴노 당시의 대극전 모습이 그림으로 수록되어 있었고, 이 그림은 나라의 대극전을 복원할 때 기본 자료로 쓰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이 헤이조쿄를 발굴하고 대극전 복원을 완료하기까지는 60년이 걸렸다. 현지에서는 "1,300년을 기다렸는데 10년 정도 못 기다리겠냐"라는 반응이었다고.나라현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