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힌츠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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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ürgen Hinzpeter, 1937년 7월 6일 ~ 2016년 1월 25일

1 개요

독일기자. 한국 한정 별명으로 푸른 눈의 목격자[1]가 있다.

학창시절에는 의사를 지망하던 의학도였으나 미디어로 진로를 바꿔 1963년에 당시 서독의 ARD 소속 방송국인 북부독일방송의 텔레비전 카메라맨으로 입사했다. 1967년 초에는 그 당시 ARD의 유일의 동아시아 방면 지부가 있던 홍콩으로 발령을 받았으며. 1969년 봄에는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다가 사이공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도쿄 지국으로 옮겨가 1973년부터 1989년까지 17년 간 특파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 때 그와 한국의 인연이 시작됐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몇 차례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정권 하의 여러 공안 사건들에 대한 기록과 광주민주화운동 직전 가택 연금중이었던 김영삼과의 인터뷰 등을 녹화하는 등 다양한 취재를 하고 있었다.

2 푸른 눈의 목격자

5.18 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5월 19일에 그는 광주에 잠입했다. 5월 18일 저녁, 힌츠페터는 일본 언론 보도를 듣던 중 '광주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힌츠페터는 그 전날 한국군 계엄사령부의 계엄령 선포 등 여러가지 정황을 봤을 때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같은 방송국의 녹음 담당 기자인 헤닝 루모어(Henning Rumohr)와 함께 5월 19일 아침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한 힌츠페터와 루모어는 곧장 통역과 함께 광주로 내려갔으나,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제지당했다. 하지만 힌츠페터 일행은 외국 회사 주재원으로 위장하고 광주에 남아있는 가족을 빼오겠다면서 군인들을 속여 광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당시 광주의 끔찍한 참상이 그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게 되었다.

힌츠페터와 루모어는 취재 후 필름 압수를 피하기 위해 호텔에서 팔던 고급 과자통에 필름을 숨겨 도쿄로 돌아갔고, 23일 계엄군이 일시 퇴각한 상태의 광주로 재차 잠입해 시민 자치 하의 광주의 모습을 추가로 담았다. 이 필름은 규탄 대회 등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평온했던 시민들의 일상을 담았고, 당시 계엄군 측이 언론에 흘린 '폭도가 점령해 아비규환이 된 시내 상황'같은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당시의 언론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이분의 취재와 영상자료가 없었다면 위 주장대로 사실이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차례의 잠입 취재에서 촬영한 필름은 도쿄 지국에서 편집되어 북부독일방송 본사로 보내졌다. 힌츠페터의 필름은 ARD가 서독 전역에 동시 송출하던 북부독일방송의 저녁 뉴스 프로그램인 타게스샤우를 통해 즉시 보도되었으며, 그 해 9월에는 《기로에 선 한국》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방송되었다. 오늘날 남아있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컬러 영상자료는 대부분 그가 촬영한 것이다. 즉 그가 카메라를 들고 뛰지 않았다면 광주의 진실은 영영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 광주의 현실을 제대로 담은 컬러 영상은 힌츠페터의 영상을 제외하곤 전무하다시피하며,[2] 《기로에 선 한국》 다큐멘터리는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신부들이 번역해 국내로 들여온 이후 언론 통제 하의 제5공화국 시절에 비디오로 복제되어 은밀하게 재야에 유입되면서 광주의 참상을 국내에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3 그 후

5공 말기인 1986년 11월에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위를 취재하던 도중 사복경찰에게 구타당해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이후 1995년 은퇴하고 독일에서 거주했다.

2004년 지병인 심장 질환으로 일시적으로 생명이 위독했던 그가 사후 국립 5.18 묘역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밝혀 광주민주화운동 유족회 및 광주광역시 등 관련 단체들이 힌츠페터의 명예 시민증 부여와 5.18 묘역 안장을 추진했다. 당시 그는 심장 질환으로 병상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병세가 위중한 상태일 때도 꼭 자신을 광주에 안장해 달라고 수없이 되뇌일 정도였으며 그 자신은 물론 관련 단체들도 한결같이 그의 광주 망월동 안장을 원했다. 하지만 광주광역시청에서 외국인이 광주 시내의 국립/시립묘지에 안장되는 경우는 광주에서 사망한 이에 한한다는 시립묘지 관리 조례를 들며 난색을 표명했다. 결국 네티즌들은 명예시민증을 수여하더라도 그의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며 그의 망월동 안장을 허가해달라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관련 기사 결국 시청 측에서도 법 개정을 통해 힌츠페터 사후 5.18 묘역에 안장이 가능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힌츠페터는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이후 광주민주화운동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3] 회고록을 집필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펼쳤다. 한국방송기자협의회는 그에게 특별상을 수여하였다. 또한 광주의 참상을 전세계에 알린 공로로 송건호 언론상의 2회 수상자가 되었다.

2016년 1월 25일 독일에서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향년 78세. '광주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생전의 유언을 따라서 유해의 일부를 항아리에 담아서 5.18 묘역에 안치한다. 정식 안치 행사는 2016년 5.18 기념식 때 행할 예정.

한국에서 그의 활동을 다룬 영화를 제작할 예정이다. 제목은 '택시 운전사'로, 광주까지 힌츠페터를 택시로 태워 준 기사를 의미한다. 송강호가 주연인 택시운전사 역을 맡을 예정이라고 한다. 배우 토마스 크레치만이 위르겐 역을 맡는다고 한다.
  1. KBS 스페셜에서 80년 광주를 취재한 힌츠페터를 다룬 다큐멘터리의 제목이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힌츠페터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 5.18을 폭동이라 주장하는 자들의 근거가 이 영상을 통해 상당부분 박살났다.
  3. 이때 그는 '광주에 묻히고 싶지만 가족들이 반대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모발과 손톱 등 신체의 일부를 5.18기념재단에 전달해 수장고에 보관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