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光化門

1 개요

조선왕조 이래 한국의 상징적인 중심이자[1], 서울자존심

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의 정문이다.

2 역사

사진으로 보는 광화문 변천사

출처 : 문화유산채널 #

1395년(태조 4) 9월에 경복궁이 건설될 때 처음 지어졌으며, 원래는 그냥 정문(正門)이라고 했다가 1425년(세종 7년)에 광화문으로 개칭되었다. 태조때 이미 광화문이라고 불렸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광화문이라는 이름은 세종때 붙여진 것이 맞다.[2] 세종전까지 쓴 이름은 사정문(四正門)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실록에서는 이런 이름은 당대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3] 같이 무너졌다. 이후 273년간 공터로 있다가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1865년 재건되었다. 이때의 현판은 당대의 서화가 정학교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무관 임태영의 글씨[4]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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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춘문 북측(현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옮겨진 광화문(1927년 경)

그러나 일제강점기일본이 경복궁 앞뜰을 때려 부숴 가면서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지을 때 광화문도 같이 헐릴 예정이었으나, 수많은 반발(특히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5])가 철거를 반대하여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에 부딪혀 광화문은 일단 보존되었다. 이에 대해 <헐려 짓는 광화문>이라는 수필이 존재한다. 단,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는 총독부 건물을 가로막으면 안되었기에 원래 자리에서 벗어난 건춘문 북쪽으로 해체 이전해버렸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원래 광화문과 다르게 5도 가량 동쪽을 바라보도록 각도를 틀어 남산의 조선신궁 쪽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참고로 육조거리는 방향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광화문 광장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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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광화문의 목조 문루 부분은 6.25 전쟁 때 포탄을 맞아 완파되어 사라지고 석축만 남았다. 그러다 1968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남아있던 석축을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청사) 앞으로 이전하고 그 위에 철근 콘크리트로 문루를 만드는 방식으로 복원되었다. 그러나 이 복원은 문제가 많은 게, 큰길인 사직로가 광화문 앞으로 지나가기도 하고, 중앙청를 기준으로 광화문을 지어서 원래 지어질 때의 자리에서 후퇴하여 지어졌다. 게다가 각도도 원래 육조거리 각도에 맞춘게 아니라 틀어진 조선총독부에 맞춰 지어져 3.75도 가량 틀어졌다. 원래 근정전, 근정문, 흥례문, 광화문이 일직선에 있어서, 왕이 근정전에 앉으면 육조 거리가 보이도록 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근정전과 근정문만 원래 축 자리에 남았고 흥례문은 헐렸으며, 광화문은 동쪽으로 옮겨졌다. 결과적으로 이어지는 축이 광화문 부근에서 꺾여버리게 된 것이다. [6] 그리고 콘크리트로 문루를 복원한다는 것 역시 말이 많았다. 관련 링크 석축의 경우에도 깨어진 부분이 많아 전부 활용할 수 없었고, 남은 것은 기단부 안쪽에 넣어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7]

1968년에 복원된 광화문.

결국 이 광화문은 경복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 철거되었다. 이후 콘크리트 문루를 철거하고 다시 복원 공사를 진행했다.[8] 이때 광화문 앞의 월대도 함께 복원하기로 했으나, 서울시에서 교통 체증을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월대 복원에 반대하고 나섰다. 서울시에서는 광화문 자체가 남쪽으로 14.5m 내려오는 데다가, 광화문 앞 옛 월대의 길이가 40m나 돼, 차로를 55m나 줄여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결국 월대를 복원하는 대신 광화문광장에 월대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2010년 8월 완공. 15일 광복절에 현판식이 거행되면서 광화문 복원 공사는 모두 끝났다.[9]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이 뜨거운 감자였다. 대체로 옛 현판을 유지하는데 찬성했던 입장은 우파-보수세력이었거나, 한글 전용주의를 위해 내린 의견인 경우가 많았다. 현판을 한자로 복원하는 것을 주장한 쪽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싫어한 좌파-진보세력이었거나, 고증을 위해서 한자 현판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 쪽이었다. 전통이란 것은 박제가 아니기에 현실의 반영이란 측면에서는 한글현판도 가치가 있으며, 문화재의 충실한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는 반대측의 주장도 가치가 있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맞고 틀리고 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10] 다만 박정희가 쓴 한글 현판의 수준 자체에 대한 서예 전문가들의 평가는 문화재로 지정해 걸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한다. 현판식이 있었던 날, 국회의원이자 이름난 서예가였던 윤제술이 냅다 "아니 어느 놈이 저걸 글씨라고 썼냐!"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는 일화도 있다. 옆에 있던 동료 정치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통령을 가리키자 또 큰 소리로 "아, 그래도 뼈대 하나는 살아 있는 글이구먼!"라고 했다. 빠른 판단력

2010년 8월 15일 이후로 공개된 광화문의 모습. 현판이 다시 조선시대처럼 한문으로 바뀌고[11] 소나무와 화강암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복원한 것이 특징이다. 기단의 돌 색깔이 어떤건 말끔한데 어떤건 지저분한 이유는 옛날돌과 새돌을 같이 썼기 때문이다. 요즘 복원 추세는 과거에 사용된 자재를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지저분하게 보일지라도 말이다. 숭례문 석축의 돌 색깔이 맞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 조금은 줄어드는 셈.

3 복원 논란

그러나 3달이 지난 2010년 11월 즈음, 현판이 갈라져 버렸다는 기사가 떴다.

어쩌면 G20 정상회담 맞춰서 딱 갈라지냐(...)

specialnews1 금 간 광화문 현판 (인터넷 중앙일보 기사)
역시 부실하게 만들었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자연적인 균열인지, 복원 기간 단축으로 인한 부실 복원으로 생긴 균열인지에 대해 설왕설래 중이다. 일단 정부는 목재를 잘못 썼다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고 한다. 원래 이런 데 사용하는 목재는 몇 개월 이상 잘 말린 것을 사용해야 뒤틀리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이 일로 인해 목재를 담당한 장인과 전각을 담당한 장인은 서로 네 탓이오 다투기도 했다.

2016년 2월 29일 광화문 현판이 본래 검은 바탕에 흰색 혹은 금색 글씨였다는 주장이 2014년에 이어[12] 또 다시 제기되었다.[13] 기사, 기사 이와 더불어 궁궐 전각에 걸린 현판 가운데 4분의 1이 엉터리라는 조사 결과가 나와 논란이 가속화되었다. 기사.

4 교통수단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5번 출구)이 가장 가깝다.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은 역명과는 달리 광화문과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어차피 이 역에서 나와도 광화문의 정면이 떡하니 보이며 금방 걸어서 접근할 수 있다. 5호선을 타고 오는 경우라면 굳이 종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하지 말고 그냥 광화문역에서 내리는 게 훨씬 낫다. 5호선 광화문역에서 광화문에 가장 가까운 출구는 2번 출구이며, 광화문광장으로 나 있는 9번 출구로 나와도 된다.

참고로 세종로사거리 중앙(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는 서울과 다른 도시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인 도로원표가 있으며, 이는 대한민국의 도로가 시작되는 기점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요즘같이 자동차로 붐비는 세종로 한복판에 조형물을 만들 수는 없으니, 도로원표 조형물은 실제보다 151m 떨어진 코리아나호텔 북쪽에 있다.

5 지명으로서의 광화문

'광화문' 자체가 세종대로를 비롯한 이 일대를 통칭하는 지명으로도 쓰인다. 세종대로와 종로, 새문안로가 교차하는 세종대로 사거리도 실제 광화문에서 약 6~700m 가량 떨어져 있지만, 광화문 네거리라 많이 불린다.

6 광화문광장

항목 참고.
  1. 서울에서 타 지방과의 거리를 계산할 때 광화문이 기준이 된다. 정확히는 세종대로사거리(광화문네거리). 아래의 '교통수단' 항목 참조.
  2. 실록에 보면 태조실록 1395년 9월 29일 기록에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지만 똑같은 태조실록(1395년 10월 7일)을 보면 정도전이 경복궁의 각종 전각들 이름을 지은 뜻을 밝히는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서 '남쪽의 문을 정문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기록이 충돌하는 이유는 태조실록은 두 번에 걸쳐 찬집되었는데, 현존하는 태조실록은 세종 30년(1448년) 8월에 찬집된 본이기 때문에 편찬 과정에서 세종 재위기에 이미 쓴 '광화문'이란 이름을 그대로 삽입하였기 때문이다.
  3. 흔히들 궁궐이 불에 탄 것을 민중들의 방화로 여기는데 이는 조선왕조실록과 유성룡의 징비록을 근거로 한다. 하지만 여기엔 논란이 좀 있다. 당시 같이 갔던 종군승은 경복궁을 보며 "여기가 용이 사는 곳이냐 아니면 신선이 사는 선계냐.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라고 기록을 남겼는데, 이 말은 즉슨 왜군이 한성에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경복궁은 온전했다는 말. 이 때문에 실제로는 왜군이 불을 질렀다는 주장도 많이 나오고 있다.
  4.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참조
  5. 일본의 민예연구가, 미술평론가로 한국 민속 예술이나 미술 쪽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져 일본인임에도 조선에 대한 미술서적을 발간했다. 연구에 대한 깊이나 정도가 훌륭해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인물 연구 서적, 그의 연구에 대한 평론, 연구서적 등이 현재에도 나올 정도다. 다만 그의 주장 중 하나인 '조선의 예술은 억압과 탄압에서 비롯돼서 그에 따른 '한(恨)' 모티브가 존재한다.'란 부분만큼은 여러 학자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예를 들어 '한국 건축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곡선'은 한국인의 억압과 한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던가. 연구할 때도 이 부분은 아예 무시하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조선사람들이 한에만 맺혀 살았을까? 그렇게 따지면 봉산탈춤 같은 흥(興)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도리어 한의 정서는 야나기가 일본인의 정서를 투영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본글과 관련돼서 얘기를 돌리자면 그런 그의 광화문 철거 반대는 동정표도 섞여있을지는 모르나 워낙 그 당시로서나 지금으로서나 꽤나 민예, 미술계에서의 그의 평가가 대단했고 그 당시 입지 역시 상당한 것으로(그러니 파문이 일었겠지만) 민예, 미술연구가로서도 광화문만한 연구소재가 사라지는 것 역시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을 알든 모르든 언론이나 민중(일본이든 조선이든)이 당시상황(일제강점기 상황)에서 그가 발언한 광화문 철거 반대는 크나큰 떡밥이었으리라.
  6. 1968년의 광화문은 조선총독부에 맞춰서 지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 철거 이후에도 근정전 앞 월대에서 앞을 바라보면 광화문이 틀어진 모습이 보였다. 반대로 광화문광장에서 근정전을 보려면 세개의 문 중 가운데 문이 아니라 왼쪽 문을 바라봐야 일직선 축에 맞게 보였다.
  7. <경복궁야화> (탐구당, 1991)
  8. 서울시립박물관 외부에 철거때 남겨둔 광화문 콘크리트 단면 조각이 남아 있다.
  9. 12월 완공예정이던 걸 G20회의 때문에 9월로, 다시 광복절에 맞춘다고 8월로 앞당겨 부실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보안과 형사들까지 현장에 전화질에 방문질을 해댔다고..
  10. 영국웨스트민스터 사원 같은 경우에는 기존의 외벽에 있던 성인들의 조각을 다인종, 다문화에 맞는 현대적 조각으로 교체했다. (물론 기존 조각은 보존)
  11. 옛 광화문의 사진을 바탕으로 디지털 복원하여 만든 것이다. 다만 이 현판은 서예 전문가들에게는 글씨 자체만 놓고 보면 썩 좋지만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무래도 직접 손으로 쓴 글씨에는, 디지털 복원한 글씨에는 없는 특유의 '느낌'이 남아 있기 때문이란 것이 요지. 다만 광화문 현판은 예술성 뿐만 아니라 역사 고증도 중요하기 때문에 디지털 복원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12. 기사 참조
  13. 사실 경복궁의 다른 문들을 비롯하여 각 주요 전각들을 보면 현판들이 검은 바탕에 흰색 혹은 금색 글씨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대표성을 봐도 상당히 근거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발견된 사진만으로는 완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사진 역시도 조선 초기의 경복궁을 반영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사진 속 광화문조차도 임진왜란 후 2백여년 후에 복원된 건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