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공

위의공(衛懿公, ?~BCE 600)

춘추시대 나라의 군주. 이름은 적(赤).
위나라는 왕실과 같은 희(姬)성이다. 제후국의 공실의 씨는 나라(강성 여씨)나 나라(미성 웅씨)와 같이 별 말이 없으면 대개 나라 이름과 같으므로 위씨니 풀네임은 희적 혹은 위적인 셈이다.

그러나 그가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으니.. 바로 공전절후의 덕후였다는 점이다. 즉, 로마덕후 호노리우스와 쌍벽을 이루는 덕후다!

의공은 궁궐에 거대한 새장을 짓고 수집한 학을 거기 모아서 길렀으며 그 학들에게 벼슬[1]을 내리고 국고를 기울여 수입 곡물을 사먹이는 희대의 뻘짓을 했다. 역시 뻘짓도 대륙의 기상 오오

이 때문에 나라 안팎의 불만을 산 나머지 적인(狄人)[2]이 쳐들어오자 병사들이 종군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학에게 녹봉과 직위가 있으니 학더러 싸우라고 하십시오."라고 하며 조롱할 정도였다.

이에 학들을 풀어주고 몸소 방어전을 지휘했지만 사기가 떨어진 군대는 박살나고 본인도 피떡이 되도록 칼로 난도질되어 끔살당했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였는데 타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대부 굉연(宏演)이 나중에 전쟁터에서 주군의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그나마 온전하게 남은 것은 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라 멸망 직전의 위기라 장사를 지낼 사람과 도구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굉연은 스스로 할복하고 자신의 몸을 관 삼아 그 간을 담고는 순절했다. 이 고사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바로 부복납간(剖腹納肝)이다.

수도 조가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제 환공의 원조로 초구로 수도를 옮겨 재건했다. 아버지 혜공의 막장 행각[3]때문에 정통성이 없었고 의공 자신의 삽질 때문에 백성들의 원망을 사서 의공의 후예는 임금이 되지 못했다.[4] 의공의 사촌 대공이 뒤를 이었으나, 금방 사망했고 대공의 동생 문공이 뒤를 이었다. 이 후 위나라의 임금 자리는 문공의 자손들이 대대로 계승했는데 나중에 전국시대 때 위(魏)나라의 압박으로 위씨 군주가 퇴출되고 신하였던 자남씨 군주가 들어선다. 그러나 자남씨는 문공의 7세손이며 위 영공의 아들인 공자 영에게서 갈려나온 집안으로 여전히 문공의 자손이다.
  1. 심지어는 대부가 타는 수레에 학을 태우고 놀러다녔다!
  2. 당대 패자국이었던 나라에게 원병을 청했지만 이때 제나라는 나라에 쳐들어온 이민족을 상대하느라 군이 피로했고, 무엇보다 당장 가서 싸워 얻는 이득보다 전후 복구를 원조함으로 얻는 이득이 많다는 점을 들어 관중이 원정을 반대했다.
  3. 자세한 것은 선강 항목 참조
  4. 사실 의공의 아들 개방이 있긴 했으나, 그는 일찍이 제 환공을 섬겨 제나라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