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경제

명의 역대 황제
12대 세종 가정제 주후총13대 목종 융경제 주재후14대 신종 만력제 주익균
묘호목종(穆宗)
시호계천융도연의관인현문광무순덕홍효장황제
(契天隆道淵懿寬仁顯文光武純德弘孝莊皇帝)
연호융경(隆慶)
주(朱)
재후(載垕)
생몰기간1537년 3월 4일 ~ 1572년 7월 5일(36세)
재위기간1567년 2월 4일 ~ 1572년 7월 5일(5년 152일)
역대제왕묘 배향자


가정제의 3남으로 태어났다.

가정제 말기에 파면된 해서[1]와 같은 신하를 다시 부르고, 양정화 등 가정제에 대항하다가 관직이 삭탈된 사람들의 관직을 복구시켜 주었다. 또한 융경제 시기에 유명한 신하들이 많은데 서계, 고공, 장거정 등이 재상으로 있었고, 유명한 장수로는 담륜, 척계광이나 이성량 등이 있었다.

가정제 시기를 괴롭혔던 문제점을 파악해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왜구를 강력하게 진압함과 동시에 해외무역을 허가하였다.[2] 해외무역을 허가함과 동시에 명의 무역량은 빠르게 증가하였다. 이 당시 포르투갈 상인과 같은 외국 상인들이 중국에 찾아오기 시작했는데, 한 연구에 따르면 융경제가 해외무역을 개방한 이후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유입된 은의 양이 3억냥을 넘는다고 한다. 이는 당시 전세계에서 생산된 은의 1/3에 해당하는 양이다.

또한 가정제 시기를 괴롭혔던 몽골의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왜구문제가 잠잠해진 뒤 남쪽에서 활약하던 척계광을 북쪽으로 불러들여 국경을 방어하게 했다. 그 결과, 명나라의 서쪽과 북쪽 국경에서 쏠쏠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그 덕분에 타타르와의 평화협상을 체결하고 국경을 안정시켰다.

대체로 유능한 신하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활용했다는 점, 근검절약하고 비교적 부지런한 편에 속했다는 점에서 좋은 황제의 자질이 보인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황제가 늘 그렇듯이(...)특히 명에서는 더더욱 일찍 죽어서, 36살에 죽었다. 재위 기간은 겨우 6년. 일설에 따르면 명에서 신하가 가장 대하기 쉬웠던 황제라고 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 황제 다음에 나타난 황제가...

이 사람 앞에는 아빠가, 뒤에는 아들이 워낙 장기간 동안했던 막장짓이 워낙 쟁쟁해서, 그 탓(?)에 별로 유명하지 않다.
  1. 가정제 항목에서도 언급되는데, 가정제의 연호를 이용해서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라는 언어유희의 상소문을 올렸다가 사형당할 뻔했던 인물.
  2. 완전한 자유무역은 아니어서 무역항은 푸젠 성의 장저우로, 출입 가능한 무역선은 허가 당시에는 1년에 50척으로 제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