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역대 황제 | |||||
11대 무종 정덕제 주후조 | ← | 12대 세종 가정제 주후총 | → | 13대 목종 융경제 주재후 |
묘호 | 세종(世宗) | |
시호 | 흠천이도영의성신선문광무홍인대효숙황제 (欽天履道英毅聖神宣文廣武洪仁大孝肅皇帝) | |
연호 | 가정(嘉靖) | |
성 | 주(朱) | |
휘 | 후총(厚熜) | |
생몰기간 | 1507년 9월 16일 ~ 1567년 1월 23일(60세) | |
재위기간 | 1521년 5월 27일 ~ 1567년 1월 23일(45년 241일) |
목차
300px |
수염이 몹시 |
1 소개
중국 명나라의 11대 황제. 성화제의 4번째 아들이자, 효종 홍치제의 이복동생이 되는 흥헌왕 주우원의 차남. 그러니까 전임 황제인 정덕제의 사촌동생이 된다.
묘호는 세종(世宗), 연호는 가정(嘉靖). 시호는 흠천이도영의성신선문광무홍인대효숙황제(欽天履道英毅聖神宣文廣武洪仁大孝肅皇帝).
가정제의 통치 시기는 북로남왜, 즉 몽골과 왜구의 침공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시기였다. 사실 그가 즉위하게 된 것도 단지 정덕제의 직계친족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항렬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즉위 당시 겨우 15세. 예법에 따르면 황제의 자리는 아버지→아들, 그게 아니면 형→동생으로 계승된다. 당연히 정덕제랑 같은 항렬이거나 그 조카뻘에서 찾아야 한다. 만약 흥헌왕 주우원이 살아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정덕제의 후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홍치제의 바로 아랫동생이기에 정덕제보다 항렬이 높았고, 조카→숙부로의 계승은 예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홍치제가 성화제의 3째 아들이고 흥헌왕 주우원이 4째 아들이니 홍치제의 아들인 정덕제의 뒤를 이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항렬의 황족은 주우원의 아들인 주후총 뿐이다.
즉위 당시에 가정제는 대신인 양정화 등의 건의와 조처를 따라 무종의 측근들을 처치하고 그 악정을 고침으로써 민심의 일신을 꾀했다. 새 황제에 대한 기대는 대단히 높았다.
1.1 대례의 의
명예종 주우원
그러나 가정제는 즉위 직후 커다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것이 중국판 예송논쟁인 '대례의 의(議. 혹은 대례의분의)'이다. 문제의 중심은 가정제가 방계로부터 들어와 즉위했기 때문에 황제로서는 누구의 뒤를 잇는 것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과 친부인 흥헌왕(興獻王) 주우원(朱祐杬)[1]을 어떻게 처우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들 문제는 단지 호적상의 문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황제의 뿌리를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이며, 황실의 정통성이라는 실로 가장 중요한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황실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양정화 등을 위시한 관료들은 가정제의 백부에 해당하는 효종(홍치제)을 양부로 모셔서 황고(皇考:'고考'는 亡父(망부;돌아가신 아버지)의 의미)라 하고 친부인 흥헌왕은 황숙부(皇叔父)라 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가정제는 이를 내키지 않았고, 친부를 황고, 홍치제는 황백부라 칭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리하여 황제파와 신하들이 정면으로 대립하는 대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가정제를 설득시키는데 실패한 양정화 등 예법파가 사직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나머지 황제파를 중심으로 하여 황제의 뜻대로 결론을 지으며 흥헌왕을 예종 헌황제로 추존하게 되었다.[2]
이 문제는 단순히 고루한 예법에 얽매여 치고 박고 싸운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였다.근데 예법관련 문제는 다 그시대엔 중요한거 아닌가? 왜냐하면 가정제가 정덕제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흥헌왕의 뒤를 이은 것이 된다면, 황제가 적장자를 우선으로 하는 정통 라인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방계에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서 이것은 영락제 시기에 발생했던 것과 사실상 동일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건 황실의 방계라도 힘만 있으면 영락제처럼 황제가 되든가 아니면, 나중에 이런 상황이 또 발생할 경우 누구라도 황실의 계승을 주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게 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훗날 정덕제처럼 후손이 끊긴 상황이 발생하면, 비록 방계 출신이지만 자신이 제2의 가정제가 되겠다고 나서는 황족이 나올 위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정화 등은 목숨을 걸고 반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가정제가 승리했다. 여기에는 가정제의 독단적인 똥고집(?)도 작용하기는 했지만 양명학처럼, 절대적인 정통성 말고 누구라도 정종이 될 수 있다는 사상적인 뒷받침, 국법을 엄격하게 준수하기 보다는 유연하고 느슨하게 적용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명대 중후기의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뒷받침된 결과이다.
1.2 도교에 빠지고 궁녀들을 혹사하고
이후 황제는 환관의 주선으로 도교를 신봉하여[3] 스스로를 신선이라 칭하고 긴 도호를 붙이는가하면, 생리혈과 아침이슬 등으로 불사의 약을 만든다고 궁녀들을 학대했다.[4] 명나라 황제 가운데 즉위 후 가장 빨리 여색에 빠졌는데(3년), 이것도 도교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총애하는 도사들이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미래를 본 걸지도
그가 얼마나 궁녀들을 혹사시켰는지 여기에 견디지 못한 양금영 등 16명의 궁녀들이 황제를 목졸라 죽이려고 시도했다.[5] 죽었다면 역사상 최악의 죽음을 당한 황제가 되었겠지만, 매우 불행히도 다행히 황후가 그를 구해주었다. 물론 가정제 암살을 시도한 16명의 궁녀들은 전원 저자거리에 끌려가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런데 황후가 뒷처리를 하면서 아무 관련 없는 가정제의 애첩까지 죽여버린 것이 드러나자, 크게 화를 냈는데... 물론 이 정도는 정상적인 거지만, 훗날 황후궁에 불이 나자 끄지 말라고 해서 그 황후가 불타 죽고 말았다(...) 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야사에서 나오는 추측일 뿐이다. 황후 방씨는 가정제가 죽었을 때 유일하게 그의 무덤에 같이 묻힌 사람이다. 가정제는 황제가 되기 전에 있던 황후부터 융경제의 생모가 된 두황후까지 모두 4명의 황후가 있었는데 오직 방황후만 가정제와 같이 묻힐 수 있었다. 현재 가정제의 무덤에는 모두 3명의 황후가 묻혀 있는데 나머지 둘은 가정제가 죽은 다음 융경제가 자기 생모를 합장시키면서 같이 합장시킨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자신이 죽인 다음에 그 사람을 자신과 같이 무덤에 묻을리가 없다. 사람을 죽인 다음 슬픈 척 하면서 이런 저런 제사를 거하게 벌이는 일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저승에서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곤녕궁의 화재로 방황후가 목숨을 잃은 다음 사람들의 상상에서 비롯한 추측일 뿐이다라는 주장도 있으나 다른 주장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가정제는 황후가 죽고 난 후에 그래도 자신을 구해주었던 황후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고 다시 보고 싶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자신이 죽으면 황후 옆에 묻어달라 라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주장도 있다.
이를 도교의 제문(祭文)을 청사(靑詞)라 부르는데 급기야 청사를 잘 만드는 자가 재상으로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청사의 작자로부터 출세하여 정권을 장악한 인물이 엄숭이다. 그는 도교를 광신하여 정치를 돌보지 않는 가정제를 대신해 국정을 전횡하기를 전후 20년에 미쳤다. 그 동안 극도의 뇌물수수 행위가 정치전반에 만연했다. 환관 세력이 일시 후퇴했으나[6] 그 대신 권신의 독직정치가 왕조의 퇴락을 촉진시킨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 황제 중에서 도교를 믿은 황제는 원래 많았는데 예를 들어 명군으로 손꼽히는 홍치제도 도교를 믿었다. 엄숭은 도교의 제문을 잘 짓기로 유명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문을 잘 지어서 재상에 발탁된 것이 아니다. 엄숭은 제문으로 총애를 받기 전 이미 재상으로 발탁된 뒤였다.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쫓겨난 다음 도교의 제문으로 황제의 신뢰를 회복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청사재상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엄숭이 간신이기는 하지만 그는 이미 대학사였고 재상에까지 오른 인물이었으며 쥐뿔도 없는 인물이 청사 하나 잘 짓는다고 재상까지 오른 것이 결코 아니다.
1.3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진다는 해서파관
이 양반 황제 말년에 걸출한 사람 한명이 나타났으니 바로 그 유명한 해서다. 해서는 가정제의 무능함을 비판하는 강도높은 비난 상소를 올린다.
"황제 폐하께서는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폐하의 연호인 도타울 가(嘉), 아름다울 정(靖)을 집 가(家)에 깨끗할 정(淨)이라고 바꿔 부르며[7] 가정(家淨)이라고 하면서 폐하를 원망합니다."
라고 황제를 정면으로 디스 비판했다.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한국 속담에도 '서 발 장대를 휘둘러도 거칠 게 없다'는 말이 있는데, 집안에 가구고 항아리고 식량이고 전혀 없어서 부숴먹을 것도 없다는 뜻이다.
이에 격노한 가정제가 "너 사형"이라고 외쳤으나, 옆에 있던 환관이 해서는 이미 상소를 올리기 전에 가족과 이별하고 관을 짜놓았다라고 알려주자 탄식을 하고는 결국 죽이려던 생각을 포기했다고 한다.[8] 결국 당시 재상인 서계[9]가 말리기도 해서 처형이 늦어지다가 가정제가 죽고 그 다음에야 다시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 해서의 이야기가 발단이 되어 먼훗날 붉은중국의 황상께서 문화대혁신을 일으키셨다고 한다. 물론 반어법이다 그 유명한 해서파관海瑞罢官인 것이다.
1.4 장수와 추존
수은 등 중금속 가득한 선단[10][11]을 그렇게 먹고도 오히려 총애하던 도사들 보다 장수하여 환갑 직전에 사망하는 등 장수했다.[12] 빨리 죽여야 될 놈과 그렇지 않은 놈도 구별하지 못하냐 하지만 그가 죽으면서 명의 재정난은 표면으로 떠오른다.
그런 가운데 말년에는 경술의 변(몽골의 알탄 칸이 베이징을 포위한 사건)이 일어났고 남쪽으로는 왜구가 극성을 부리는 등의 혼란을 겪게 되었다. [13]
더해서 1556년엔 산시 대지진이 터저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사건까지 벌어젔다.
근데 이 사람이 세종(世宗)으로 추존됐다.[14] 업적으로서는 당연히 세종을 받을 자격이 없으나 정덕제 이후 끊어진 황통을 가정제가 새로 이었기 때문에 분에 넘치는 묘호를 받은 것이다.[15] 다음왕이 선왕의 아들인데 아빠한테 뭐같은 시호를 줄 수도 없고
2 트리비아와 시대상,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파일:Attachment/image 174.jpg |
- 한편 좋은(?) 점도 있었는데, 이 가정제대부터 만력대(萬曆代)에 걸친 경제 발전과 신사층 문화의 발달 속에서 문학·미술 부문에 많은 명품(名品)이 나왔다는 것이다.
- 약간 다른 쪽의 이야기이지만, 조선 후기 소설인 '창선감의록'과 서포 김만중의 소설 '사씨남정기'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엄숭이 등장한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게임 어새신 크리드의 세계관에서는 성전기사단의 후원 덕에 황제 자리에 오른 것으로 나오고(출처:어크 백과사전) 막장성이 실제 역사보다 한 층 강해졌다(...). 소녀 암살단원 챠오 융의 정덕제 첩 시절 친구들인 나머지 첩들을 고문하고 끔살했고 암살단 중국 지부도 자근자근 짓밟아 버렸다. 이후 이탈리아 피렌체로 떠난 챠오 융과 그녀의 스승도 잡기 위해 자객들을 파견했고, 자객들은 그녀의 스승을 죽인 걸로도 모자라 기어이 피렌체까지 그녀를 쫒아왔다.[17]
- 대항해시대 3에서도 등장한다. 중국 발견 후 개항 협상 이벤트를 진행하면 자금성에서 협상할 때 등장해서 오문이란 조그만 항구를 내준다. 조건이 까다로워서 이벤트 자체를 보기가 힘들고, 능력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헥스에디터 같은 수단을 썼을 때 확인할 수 있다. 직업은 군인, 혈액형은 B형. 능력치는 체력 46, 지력 66, 무력 46, 매력 61로 후한 편이다.
- ↑ 1476~1519. 성화제의 4남이자 홍치제의 이복동생이다.
- ↑ 이는 조선시대에도 영향을 크게 끼친게 된다. 흥미롭게도 가정제 사후 즉위한 선조와 달리 인조가 자신의 생부인 정원대원군을 추숭하려고 어거지를 쓴 추숭 논쟁과 매우 닮았다.
- ↑ 할아버지인 성화제와 많이 닮은 행동이었다.
- ↑ 궁녀들이 조금이라도 비위를 거슬리게 하면 사정없이 매를 쳤다.
- ↑ 이렇게 죽은 케이스가 없지는 않았다.(!) 동진의 사실상 마지막 황제 효무제는 애첩한테 "네 나이도 이제 30이구나. 더 젊은 여자를 찾아야겠다"라고 말했다가 질식사 당했다.
- ↑ 엄숭이 휘두른 권력의 배경은 환관 세력과의 적절한 타협에 있었다. 즉 일시적으로 후퇴했다고 볼 수는 있어도,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후퇴였다는 것.
- ↑ 집이 깨끗하다. 집이 깔끔하게 정리정돈이 잘 됐다는 뜻이 아니라, 집에 아무것도 없다- 즉, 먹을게 없어서 가난하다는 말이다...
야! 신난다~ 가가호호 거덜나네!한국 발음만 같은게 아니라 중국어 발음도 嘉靖과 家淨은 둘 다 jiajing으로 같다. - ↑ 사실 해서를 죽이면 자신이 충신을 죽인 폭군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해서를 고문만 하지 처형은 하지 않았다.
고문만 하면 폭군이 아닌거냐?? - ↑ 서계는 간신이 아니다. 황제 앞에서 사바사바해서 오래 자리를 보전했다는 평이 있기는 하지만 명재상이란 평가를 받는다. 또한 명말의 대표적인 명재상으로 꼽히는 장거정을 키운 인물이기도 하다. 일종의 멘토인 셈
- ↑ 당시 중국인들은 수은을 신기한 힘을 가진 액으로 보고 장수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절대 아니다. 수은 같은 중금속은 인체에 흡수가 되지 않기 때문에 적은 양도 인체에 치명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걸 장기간 복용하여 몸에 축적되면 신경이 파괴되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 ↑ 다만 이런 경우 지칭하는 수은은 주로 주사(경면주사)를 의미하는데 이는 HgS(황화제이수은, 적색 황화수은)으로 인체흡수율이나 위험성이 적은 무기수은이다. 주사의 경우는 수비법이라 하여 상당히 오랜 시간 물에 띄워 걸러내는 방법을 사용, 무기수은 만을 정제하는데 이 과정에서도 증발한 수은을 흡입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러운 과정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무기수은중독도 없진 않고, 수은도 한약재로서 따로 존재는 하나 대한대독(大寒大毒)하여 절대 함부로 쓸 수 없는 한약재로 기록되어 있다.물론 현대에 쓰는 것은 좀... 아니다.(여담이지만 비교적 후기에 쓰여진 본초 저서에는 석유 등도 기록되어있다. 석유의 주된 용도는 살충제. 유독하여 연기를 함부로 흡입하면 안되며 그을음으로 먹을 만들면 매우 좋다고 되어있다.)
- ↑ 명나라에서 홍무제 주원장, 영락제 주체 다음으로 장수했고, 재위기간으로는 만력제 다음으로 긴 45년을 재위했다.
- ↑ 척계광이 관직에 임명된 것이 1544년이지만 이 때 그는 겨우 16살이었다. 이 때 척계광을 기용하지 않았다고 가정제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척계광이 적당한 규모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사령관직에 오른 것은 1555년이며 당연히 이 때는 아직 가정제가 있던 시기다. 이때부터 척계광은 가정제 시기에 왜구 토벌로 명장으로서 이름을 날렸으며 융경제 시기는 척계광이 왜구 토벌을 마무리짓고 북쪽으로 이동한 시기의 일이다.
- ↑ 조선의 세종대왕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듯 세종이라는 묘호는 어지간한 업적으로도 못받는다.
- ↑ 조선의 여러 방계 혈통 출신 임금들 대다수도 어울리지 않게 분에 넘치는 묘호를 받았다.
- ↑ 이것과 똑같은 얼굴의 인물이 홍콩의 관광지로 유명한 식당인 점보의 로비 계단에 그려져있기도 하다. 동일인물인지는 확인하지못함
- ↑ 21분짜리 애니메이션 어쌔신 크리드: 엠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