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전군

恩全君
1759년 ~ 1778년

1 개요와 생애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사도세자의 5번째이자 막내 아들이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이찬(李禶), 자(字)는 연재(憐哉)[1], 시호는 효민(孝愍)이다. 어머니는 경빈 박씨 빙애이다.뭬야가 아니시다.[2] 의소세자와 정조, 은언군, 은신군의 이복 동생이다.
1759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4살 되던 1762년, 의대병이 있던 사도세자가 옷이 몸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생모 수칙 박씨 빙애를 살해한다. 빙애를 구타할 때 사도세자는 빙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돌이 갓 지난 왕자 은전군도 칼로 치고 칼 맞은 은전군을 문 밖 연못에 던져 은전군은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이를 알고 영조의 계비이자 은전군에겐 새할머니가 되는 정순왕후가 은전군을 구하여 이름을 하엽생(荷葉生), 곧 '연잎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죽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죽었다. 다 은전군이 4살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상궁들이 길렀다. 사도세자와 정조를 미워하던 노론의 극단적인 세력은 그가 아버지에게 적개심을 품었을 것이라 내다봤고, 사도세자의 자녀들 중에서 그를 유독 주목하였다. 은전군을 추대하려던 이들 중에는 정조의 친모 혜경궁 홍씨의 친정 일족들도 끼어 있었다.

1771년 종친부유사당상이 되었고 이후 수덕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 사용원제조를 거쳐서 흥록대부, 현록대부를 거쳐서 이복형인 은언군과 함께 수은묘에서 전작례를 행하였다.

1777년에 영조가 훙서한후 이복형인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는 자신의 대리청정을 방해하고 전횡한 홍인한, 정후겸을 처형하고 화완옹주를 사저로 내쳤다. 하지만 조정의 지배자들이었던 그들을 내치자 홍상범, 효임 모자가 강용휘, 전흥문을 포섭해 존현각에 침투시킨 것을 시작으로 남양 홍씨를 비롯한 그들의 잔여 세력이 대거 역모를 꾀했고 차례로 처형당했다.[3][4]

이들이 은전군 이찬을 옹립하려 한 것으로 드러나자 온 조정이 대의를 위해 이찬을 법대로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5] 대신 및 삼사의 수십번의 요청에 정조는 처음엔 '내 형제 중에 은신군 이진은 일찍 죽고 은언군 이인은 병약해서 목숨만 겨우 붙어 있다. 겨우 사람 꼴 하고 있는 건 은전군 뿐이니 양해해 달라'유일한 브라더야 살려주라라고 거절했지만 조정의 요구가 완강하여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은전군에게 자진할 것을 명했다. 은전군은 죽을 이유가 없다고 반항했고[6], 정조는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 때가 1778년, 은전군의 나이 갓 20살 때의 일이었다.[7]

1850년 조카인 전계대원군의 아들 철종이 즉위하면서 복권되었다. 1871년엔 고종으로부터 '효민' 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2 후손

은전군의 대는 그의 삶처럼 은근 파란만장하다.
풍양조씨 조성의 딸 조씨와 결혼했지만 20세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에 자식이 없다. 대신 형 은언군의 아들 풍계군 이당을 양자를 삼았다.

풍계군 이당은 친아들 익평군 이희가 있었지만 후사 없이 죽은 풍계군의 생가 형 상계군 이담의 양자로 갔기 때문에 풍계군은 촌수로 17촌(...)되는 조카 뻘 이세보(李世輔)[8]를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이세보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비판하다가 정권에 밉보여 강제로 파양되어 본가로 돌아갔고 풍계군의 대는 다시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손이자 19촌(...)되는 조카 뻘 이병(李昺)이 양자로 들어와 대를 이었다.[9]

앞의 각주를 보고 읽으시길 바란다. 완평군 이승응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둘째아들 이재현은 이승응의 생가 친동생 이낙응의 양자로 갔다. 그래서 이승응의 대는 나머지 3명의 아들이 잇는데 첫째 아들 인양군 이재근은 아들 이헌용이 있으나 후사가 없어 의친왕의 아들 이창을 양자로 들였고 의양군 이재각과 예양정 이재규는 아들이 있다는 사실만 확인 될 뿐 그 이후의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1. 영조가 은전군을 보고 가련하다는 뜻으로 지어준 것이다.
  2. 생전에는 경빈이 아니었다. 세자의 승은을 입었으나 세자 후궁에 맞는 첩지를 받지 못하고 단지 궁녀의 품계인 종6품 수칙(守則)의 신분이었다가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면서 같이 경빈으로 격상되었다.
  3. 이 때의 주모자 중에는 정조의 친 외삼촌(그러니까 혜경궁 홍씨의 친동생이란 말이다!!) 홍낙임도 끼어있었다. 이덕일 세력이 혜경궁 홍씨 집안이 사도세자와 적대적이었다는 걸 강조할 때 써먹는 떡밥 중 하나이다.
  4. 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바로 현빈, 한지민 주연의 역린이다.
  5. 죽이라고.
  6. 자신도 모르게 역모의 수장으로 추대된 경우 이렇게 억울하게 죽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영문도 모르고 죽는 은전군은 반항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7. 만 19세.
  8.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8대손. 은전군의 양손자이자 풍계군의 양자가 된 후 이름을 '이호(李晧)'로 개명하고 '경평군(慶平君)'이란 작호를 받았다. 후술하지만 나중에 파양되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종친 항렬자 통일 명령으로 '이인응(李寅應)'으로 개명하였다. 1895년 사망.
  9. 이병은 '완평군(完平君)'의 작호를 받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종친 항렬자 통일 명령으로 '이승응(李昇應)'으로 개명한다. 1909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