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계대원군


조선의 대원군
덕흥대원군 이초정원대원군 이부전계대원군 이광흥선대원군 이하응

全溪大院君
1785~ 1841

조선의 왕족, 이름은 광(㼅). 은언군의 5남으로,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생부. 초명은 이해동(李海東).

1779년 아버지 은언군과 큰형 상계군이 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강화도 교동도로 귀양갈 때 그도 같이 유배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살았있는 동안에는 왕족으로 기본적인 품위는 유지하며 살수 있었다.1801년 정조 사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아버지는 죽고 자신은 30년 넘게 강화도에서 빈농(貧農)으로 지내야했다.

그래도 강화도에 있는 동안 본처 외에 첩을 2명이나 두고 차남 이욱[1]을 둘 정도였으면 그렇게 빈곤한 삶은 아니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1827년 초부터 경제적 상황 급격하게 좋아진다.(장남 1827년 9월생, 차남 1828년 7월생인 것만 봐도 알수있다.)

1830년 효명세자가 요절하면서 다급해진 4촌형 순조의 의해 방면되어 두아들 이원경(4세)과 이욱(3세)과 함께 지금의 서울 한성부 향교동(鄕校洞) 경행방(慶幸坊)에 다시 정착해서 1831년에는 3남 이원범을 얻고, 자식들을 키우다 1841년 사망했다.

사후에는 1844년 장남 이원경이 또 중인 민진용이 일으킨 반란에 말려서 죽고 나머지 아들 이욱과 이원범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를 간다. 이후 3남 이원범이 철종이 되자. 원래는 은언군의 서자라서 군호를 받지 못했는데, 아들인 철종이 아버지에게 전계군이라는 군호를 주고 왕의 친부가 받는 '대원군'으로 봉해 '전계대원군'이 되었다. 덧붙여 철종을 포함한 철종의 형제들도 철종이 즉위한 후에 군호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2]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에 묘가 있다.
  1. 이전 항목에는 이경응으로 되어 있었으나 원래 이름은 '이욱(李昱)'이었다. '이경응(李景應)'은 1868년 3월에 흥선대원군이 종친 항렬자 통일 명령을 내리면서 바꾼 것.
  2. 역모에 몰려 죽은 이원경은 '회평군(懷平君)', 이욱은 '영평군(永平君)'의 군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