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완옹주

和緩翁主
1737 - 1808?

1 개요

조선옹주. 영조와 그의 후궁영빈 이씨(선희궁) 사이에서 태어난 1남 3녀 중 3녀이다.[1] 따라서 사도세자의 동복여동생으로서 정조고모이고 혜경궁 홍씨시누이가 된다. 화평옹주, 화협옹주는 그녀의 동복언니들이었다. 남편은 일성위 정치달이며 그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았지만 일찍 죽었고, 정치달이 요절했기 때문에 더 후사를 남기지도 못했다. 그래서 정치달의 사후에 정치달의 친척인 정후겸을 양자로 입적했다.

보통 화완옹주라고 하면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한 딸"로 알려져 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 비해 딸들을 아낀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도 화평옹주와 동생인 화완옹주를 유독 편애했다고 한다.영조가 딸 가운데서도 유독 아꼈던 화평옹주화순옹주[2]는 일찍 죽고, 곧 화완옹주에게 편애가 쏟아졌다. 화평옹주에 대한 애정이 화완옹주에게 옮겨간 이유로는 화평옹주가 죽은 당시 영조에게 혼인하지 않고 부모 곁에 남아 있는 딸은 화완옹주와 화유옹주뿐이었고, 화평옹주의 동복자매인 데다가 어리고 애교 많은 나이인 화완옹주가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영조선희궁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화평옹주는 아버지 영조가 자신을 편애하는 것에 대해 동생들에게 늘 미안해하며 사랑받지 못하는 동생들과 아버지 사이를 현명하게 중재하려고 했던 것에 반해, 어린 시절의 화완옹주는 영조의 사랑을 양보하려 하지 않아 남매 사이에 갈등을 유발했던 듯하다. 그러나 혼인하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는 지나친 편애 때문에 형제들의 미움을 받는 것이 마냥 좋은 상황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눈치가 생겼고, 남편인 정치달도 화완옹주에게 영조의 사랑을 형제들과 나누라 조언하였다. 한중록의 기록에도 "정치달이 화완옹주에게 영조의 편애가 쏟아지고 사도세자에게는 자비롭지 않은 것을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문인지 화완옹주는 1756년에 영조가 사도세자의 명릉 수행을 허락하도록 영조를 설득하는 등 사도세자의 편에 서서 그와 영조 사이를 중재하려 하기도 했다. 사도세자도 이에 대해 화완옹주에게 매우 고마워하였으며, 얼마 후 화완옹주가 첫 딸을 순산한 것도 매우 축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듬해 1월에 화완옹주의 딸은 생후 5개월 만에 요절하고, 다음 달인 2월 15일에는 남편 정치달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날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도 사망했는데, 영조는 사별한 딸을 위로하기 위해 화완옹주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런 일화를 보면 그 유별난 딸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 있다. 반대로 얼마나 정성왕후가 홀대받았는지도 알 수 있다. 또한, 출가한 왕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그대로 사가에서 지내는 것이 원칙이나, 영조는 화완옹주를 염려하여 관례를 깨고 옹주를 다시 입궁시켜 궁에서 살게 했다. 다시 입궁하여 영조의 바로 곁에서 총애를 받게 되기 때문인지, 남편과 자식을 잃어서 부모의 애정이 고팠기 때문인지 화완옹주는 다시 영조의 편애에 집착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화완옹주는 오빠인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에게는 조카인 정조에게도 무척이나 집착했다고 한다. 한중록을 보면 친모인 혜경궁 홍씨보다 더 세세하게 신경 쓰는 장면도 나온다. 심지어 조카며느리인 효의왕후에게도 자신이 시어머니 노릇까지 하면서 심하게 구박했다고. 혜경궁 홍씨는 화완옹주가 정조의 마음을 다른 곳에 빼앗기는 것이 싫어서 온갖 사람, 심지어 물건에까지 질투를 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고모에게 정조가 부담을 느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화완옹주의 조카를 향한 비정상적인 애정은, 당연히 남편과 사별한 혜경궁 홍씨를 더욱 힘들게 했다.

정조의 즉위 과정에서 정조와 척을 진 것은 사실이기에, 정조 즉위 직후 화완옹주 역시 양자인 정후겸, 비슷한 혐의를 받고 있는 홍인한 등과 함께 죄인으로 몰려 탄핵당했다. 실제로 본인도 "아바마마가 저렇게 정정한데 대리청정이 웬 말이냐?!"며 대리청정을 반대한 전력이 있으니, 탄핵은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논의 끝에 옹주의 신분을 잃고 서인으로 강등당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후 뭍으로 옮겨져 파주로 이배되었다. 귀양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사약을 받은 것은 양자인 정후겸뿐이고 화완옹주는 계속 유형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원년에 귀양을 갔다가 23년이 지나고 나서야 석방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정조도 "정처를 용서하겠다."고 한 것으로 볼 때, 오랜 귀양에서 풀려나기는 한 것 같다. 하지만 왕실 인물임에도 졸기가 없는 것으로 볼 때, 끝까지 옹주의 신분으로 복권되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1808년 5월 17일자에 기록된 순조 실록에서 대신들이 "정처가 죽어 더이상 죄를 묻지 않는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2 평가

여담이지만 한중록을 통해 화완옹주와 사도세자의 근친상간 가능성을 제시한 학자도 있다. 하지만 그 근거라는게 겨우 화완옹주가 사도세자의 궁에만 오면 "오랫동안 둘이 한 방에 있었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모두 녹초가 되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풀어헤쳐진 몰골로 함께 있었다." 정도의 문구밖에 없다. 상상력이 뛰어난 건 좋지만 너무 지나친 비약이 아닌지 때로는 화완옹주가 정조에게 집착하는 모습과 영조가 화완옹주를 사도세자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는 모습을 근거 삼기도 한다.[3] 이에 대해서 영조에게 편집성 인격장애가 의심되는 점으로 볼 때 자신이 아끼는 딸 화완옹주가 세자와 함께 있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로 세자를 증오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나올 수 있다.

한편 한중록에는 사도세자는 화평옹주화협옹주와는 달리 화완옹주에게는 유독 냉하게 굴어 화완옹주가 오빠를 두려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완옹주는 "오빠는 왜 나에게만 그러는 걸까" 한탄했다고. 화완옹주가 화평옹주만한 인격자는 아니었던 모양

흔히 각종 소설, 드라마 등의 매체에서 화완옹주가 정치적인 이유로 오빠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사도세자 사후에는 조카 정조와 대립각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화완옹주의 시가(媤家)는 소론[4]였으며 사도세자와의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시누이 화완옹주를 정처[5]라 칭하며 싫어했던[6] 혜경궁 홍씨도 그 점만은 명확히 했다. 하지만 영조실록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으나, 정조의 왕위 계승이 초읽기에 들어간 시점에서 정조가 홍인한-정후겸의 연합 정권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자 홍인한, 정후겸은 정조의 왕위 계승을 방해했고, 화완옹주도 정조에게 "주상께서 정정하신데 마땅히 대리청정의 명을 사양하는 것이 옳다."고 옆에서 부추겼다. 어쨌거나 정후겸, 화완옹주는 정조에게 크게 척을 지지 않았고 홍인한이 주도적으로 정조를 공격했지만, 영조가 총애하는 적법한 후계자에게 반기를 든 것은 너무 무모한 행동이었다. 결국 정조는 성공적으로 왕위를 계승했고 홍인한, 정후겸은 모조리 숙청됐다.

3 창작물에서

정조의 적으로 취급받고 있는 정후겸의 양모인데다 이덕일식 노론음모론의 영향으로 정조를 다루는 사극에서는 거의 악의 축으로 취급받는다.화완옹주와 세자의 친밀한 관계가 제대로 구현된 작품은 찾기가 어렵다.

이산( MBC)/ 성현아 - 정후겸과 함께 정조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정조 즉위 직후 귀양을 가며 하차.

화성에서 꿈꾸다(뮤지컬) - 정조에게 끝까지 발악하다 귀양을 가는 역으로 그려진다.

드라마 스페셜 붉은 달(KBS)/박소담 - 세자의 기행(살인이나 귀신 보기 등)의 뒤치닥거리를 다 해주고 위로해 준다.

3_1.png

사도/ 진지희 - 이 두 작품은 이덕일이 사도세자의 고백을 출간해 노론 음모론을 퍼뜨린 이후 노론 음모론을 전격 배제한 작품이란 공통점이 있다.
  1. 사실 3녀가 아니라 5녀이다. 기록에 따르면 영빈 이씨는 1남 5녀를 낳았다. 그러나 화평옹주 뒤로 태어난 차녀와 3녀는 옹주로 봉해지기 전에 유아기 때 일찍 죽었다고 한다. 이후 1733년부터 2년 터울로 4녀 화협옹주, 고명아들 사도세자, 5녀 화완옹주가 태어났으며 화협옹주와 화완옹주가 차녀, 3녀로 올라섰다.
  2. 38세에 죽었으니 요절한 다른 자매들에 비하면 오래 산 편이다. 남편 김한신이 죽자,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곡기를 끊어 죽었다. 사실상 자살인 셈. 정조대에 열녀로 봉해졌다. 조선 왕녀들 중 유일한 열녀이다.
  3. 배경은 약간 다르지만 연산군과 숙모인 월산대군부인 박씨의 관계도 이럴 가능성이 크다. 야사에서는 연산군이 박씨를 범해서 아기를 임신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정사에는 없다. 다만 신하들이 지나치다며 지적할 정도로 연산군이 박씨에게 각종 물품을 많이 하사하고 세자의 교육을 맡기는 등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는 기록은 있다.
  4. 흔히 노론파로 알려졌지만, 화완옹주의 시가는 엄연한 소론이었다.
  5. 鄭妻. '정씨의 처'라는 뜻으로, 옹주에서 폐해진 뒤 이런 호칭으로 불렸다.
  6. 혜경궁 홍씨가 화완옹주를 싫어한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때 화완옹주는 이미 옹주 직위를 박탈당해 정처가 공식 명칭이었기 때문에 화완옹주를 정처라 부른 부분이 혜경궁 홍씨의 화완옹주에 대한 감정의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