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언군

恩彦君

1754~1801

1 소개

조선의 왕족으로, 이름은 인(裀).

사도세자의 3남. 서자로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그는 일찍이 영조 말엽에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유배를 갔다. 훗날 홍국영 일당의 잔당들의 반란에 그의 아들 이담이 휘말리면서, 역적의 아비라는 점 때문에 끊임없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

2 생애

1754년 사도세자와 궁녀 임씨(사후 숙빈으로 추증)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혼날까봐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한 달이 넘게 사도세자를 꾸중했고, 《한중록》에 의하면 혜경궁 홍씨까지 질책을 들었다고 한다.

학문을 가까이 해야 할 20세의 젊은 세자가 궁녀에게서 자식을 본 것을 영조는 굉장히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도세자는 은언군 이후에도 숙빈 임씨에게서 은신군을, 경빈 박씨에게서 청근옹주와 은전군을 얻어 더욱 더 영조의 노여움을 샀다.

10살 때 은언군에 봉해졌으며, 3년 후 송낙휴의 딸과 가례를 올린다.

하지만 1771년 사치를 부린다는 이유로 동복동생 은신군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된다. 그 곳에서 은신군이 죽자 그 덕에(?)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복형 정조가 즉위하자 종친에게 주어지는 최고품계인 홍록대부(興祿大夫)에 오른다.

그러나 당시 실세로 군림하던 홍국영이 은언군의 장남 이담을 이용하려고 하면서 위기에 처한다. 홍국영정조후궁이 된 자신의 누이 원빈 홍씨먼 훗날의 한국의 영화배우와는 조금도 관계없다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사망하자, 상계군 이담을 그녀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1]에 봉하고 대통을 잇게끔 하려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는 미친 짓이었다. 정조가 병약하고 나이도 많으면 또 모르겠는데 아직 젊고 건강한 정조에게 "다 됐으니 너 애 낳지 말고 내가 지정해 준 애나 양자 삼아서 후계자 삼아라. 그래야 내가 내 양조카 덕을 보면서 권세를 누리지."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다.

그러니 이는 홍국영 실각에 결정타가 되었고, 이에 관련된 상계군과 은언군 모두 유배를 가게 되며, 상계군은 거기서 죽고 만다. 이후 상계군의 외조부 송낙휴가 상계군이 한 각종 불온한 말을 고해 바치면서 대형 옥사로 번졌고, 정순왕후 김씨가 연일 대신들과 함께 은언군을 죽일 것을 청했으나 정조는 단식으로 맞섰다.

그러자 정순왕후도 단식을 하며 버텼고 이 와중에 훈련대장 구선복 등이 홍국영과 결탁하여 불온한 움직임을 꾀했음이 드러나서 사건은 더 커졌다. 하지만 왕의 단식에 굴복한 대신들은 이인의 사형을 감해 진도로 유배보내기로 했는데, 정조는 은근슬쩍 진도를 강화도로 바꾸어버렸다. 유배지가 멀면 멀수록 벌이 엄중하다는 소리니까 이건 벌을 매우 경감시켜준 것이었고, 신하들은 반발했으나 정조는 이를 씹었다.

그 후 은언군은 끊임없이 노론정순왕후에게 역모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신세가 된다. 그나마 정조의 비호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정조는 수시로 이인을 유배지에서 몰래 불러내어 만나는 쇼를 벌였고, 심환지가 "어찌 병가에서 계책을 내어 적을 속이듯 하십니까?"라고 혀를 내둘렀을 정도로 첩보 작전을 방불케하는 작전을 벌여가며 만났다.

그때마다 노론, 소론, 남인들까지[2] 정순왕후와 함께 이를 크게 규탄했지만 정조는 요지부동이었고, 민심이 (이유야 어쨌건) 우애를 보이는 정조에게 쏠리면서 처음에는 "사저에 나가서 살겠다!!"고까지 할 정도로 강경하게 나오던 정순왕후도 의례적인 반대로 그쳤다.

사실 우애도 우애이지만 당시 은언군은 정조를 제외하고 사도세자의 자식 중 유일하게 생존한 자식이었으므로 이런 정조의 쇼는 곧 정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을 홍보하기 위함이었다. 정순왕후가 한발 물러선 이유도, 민심도 민심이지만 유교 국가 조선에서 '효성'은 대단히 강력한 명분이기 때문이다.[3]

하지만 이는 이인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부작용을 낳았고,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자 이야기는 달라진다. 11살의 순조정순왕후수렴청정을 받게 되었고, 얼마 안 가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신유박해정순왕후의 반동정치로 해석하는 움직임이 강하지만, 정조가 "정학을 바로 펴면 사학은 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큰소리친 것이 천주교의 지속적인 교세 확대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완전히 헛소리로 밝혀진 상황에서, 정순왕후가 칼을 뽑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 자체가 빼도박도 못할 반역죄라서... 자세한 이야기는 신유박해 항목 참조.

이 과정에서 그의 아내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천주교 신자라는 게 밝혀져[4] 순교하자, 서자 이광과 함께 가시덤불 장벽 사이에 거적을 들이밀어 틈을 만든 다음에 유배지를 탈출했다.

하지만 얼마 도망가지 않아서 붙잡히고, 이 일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1801년 사약을 받고 사사됐다. 그의 아들 이광은 용케 살아남아 순조헌종의 비호 아래에 장가도 들고 아들도 셋을 두었는데, 첫째 이원경은 헌종 시기에 민진용 일당의 역모에 휘말려 죽었으나 둘째 이욱과 셋째 이원범은 살아남았다. 훗날 헌종이 후사없이 죽으면서 이원범은 철종으로 즉위한다. 철종 즉위 이후에 이광은 전계군의 군호를 받고, 전계대원군에 추증된다.

3 사후

그 후 손자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복권되었으며, 순조비의 명으로 그와 상계군에 관한 기록이 대량으로 세초[5]하였다고 한다.

고종황제 때 충정공(忠貞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 완풍군의 이름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과 풍산 홍씨의 풍산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며, 뒷날 상계군으로 도로 고친다.
  2. 왕이 뭐라던 간에 어쨋든 은언군은 역적의 아비니 정조 덕에 명함 내밀게 된 남인들까지도 반대할수밖에 없었다.
  3. 정순왕후가 정조의 할머니이니 "아비에 대한 효만 하고 할미에 대한 효는 안하시렵니까? 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사도세자가 정순왕후보단 가까웠다. 더군다나 정순왕후는 친할머니도 아니니...
  4.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주 신부는 신유박해순교했고,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자세한 것은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항목을 참조.
  5. 사초(실록을 만들기 위한 여러가지 기록들)를 없에는 것으로 세탁을 하여 먹물만 지우고 다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