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호 | 은신군(恩信君) | |
시호 | 소민공(昭愍公) | |
성 | 이(李) | |
휘 | 진(禛) | |
아버지 | 대한제국 장조 | |
어머니 | 숙빈 임씨 | |
생몰기간 | 1755년 ~ 1771년 |
조선의 왕족으로, 본명은 이진(李禛). 사도세자의 4남으로, 후궁 숙빈 임씨의 차남. 정조의 두번째 이복동생이다.
12세가 되는 1767년에 홍담용[1]의 딸 남양 홍씨와 혼인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4세 때 김구주 일당이 사치를 부린다고 모함해 친형인 은언군과 함께 관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로 귀양을 간다. 그 후 풍토병에 걸려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이에 영조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아! 이번의 처분이 국가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마음에는 지금까지 차마 못할 일이라고 여겼었다. 본주(本州)의 계본(啓本)이 어제 도착하였는데, 중관(中官)이 혹시 상심할 것을 염려하여 머뭇거리면서 머물러 두게 하였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알렸으니, 슬픈 마음을 어디다 비유하겠는가? 관재(棺材)는 본목(本牧)으로 하여금 가려서 지급하게 하고, 의금(衣衾)은 본현감(本縣監)으로 하여금 종신(宗臣)의 예(例)에 따라 살피고 단속하여 마음을 써서 거행하도록 하되, 우선 가시 울타리를 철거하게 하고 마음을 써서 운구(運柩)하도록 하라.〈은언군(恩彦君)〉 이인(李橉)이 만약 함께 물고(物故)하였다면 나의 마음이 어떠하였겠는가? 특별히 석방하는 일을 당일 안에 배도(倍道)하여 분부하도록 하라. 그리고 진의 처(妻)에게는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하라.”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종자(宗子)는 성(城)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왕실(王室)의 울타리가 됨을 이르는 것이다. 진은 지금 임금의 손자로 아주 멀리 떨어진 섬에서 그의 죄가 아닌데 죽었으니, 임금이 비록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전례를 시행하기는 하였지만 미칠 수가 없었다.이복 형 정조가 즉위한 뒤 복권되었고, 소민공(昭愍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정조는 은신군을 숙종의 6남 연령군의 양자 낙천군(洛川君)의 양자로 입적시켰는데 은신군은 자식 없이 사망했으므로, 나중에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인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했다. 그래서 고종의 증조부 중 한 명이 된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