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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蔭敍

1 개요

고려조선에 있었던,그리고 지금도 고위 관리의 친인척에게 하급 관리직을 주는 관리 임명 제도. 음보(蔭補), 문음(門蔭), 음사(蔭仕), 음직(蔭職)이라고도 표기하며, 음덕(蔭德)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음서로 선발된 관료는 음관(蔭官)으로 불리기도 했다.눈칫밥

중국의 문벌귀족에게 구품관인법이 있다면 고려의 문벌귀족에게는 음서가 있다고 할 정도로 강력한 수단의 초필살기 넘버 1. 일종의 낙하산 인사. 귀족의 재산을 보장하는 공음전과 함께 문벌귀족 형성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2 고려

5품 이상 고관들에게 주는, 관직의 세습을 합법적으로 보장하는 제도였다. 대상 범위가 아들, 손자, 외손자, 사위에게까지 주어졌다.[1]

공음전과 함께 문벌귀족의 조건이 되는 특권으로서 부와 권력의 세습을 뒷받침해주는 제도였다. 공음전이 귀족의 수조권을 보장함으로서 귀족들의 경제적 기득권을 보장했다면 음서는 귀족 자제들의 관료 진출을 도움으로서 정치적 기득권을 보장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아버지나 아버지의 친인척, 혹은 어머니의 친인척, 혹은 삼촌, 장인 등이 고위 공직자이면 태어날 때부터 놀고 먹어도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거다.

고려시대에는 음서를 받을 수 있는 친인척 관계가 매우 광범위했다. 더구나 귀족들은 계급내혼 관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의 자제라면 거의 누구나 저 넓은 음서 수여가 가능한 혈연관계망 어디에선가는 음서를 얻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귀족들이 계급내혼을 하고 있던 것은 이처럼 음서의 범위가 광범위함에도 지배층이 과도하게 확대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물론 고려 사람이 바보는 아니라 음서로 받는 관직은 대개 산직일 뿐만 아니라 품계가 낮았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바로 고위 관직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음서가 주어지는 것은 대개 10대 초반이었다.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승진하기에 이처럼 빠르게 품관직을 얻는다는 것은 이후 고위 관직을 얻을 기회가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이는 오직 과거로만 입사하는 신흥세력들과의 차이를 크게 벌리는 요인이 되었다. 과거 급제자가 20대에 초직을 얻었던 반면 음서를 받은 귀족 자제들은 이미 10대부터 관직 경력을 쌓아왔기 때문에 이후 다시 과거에 급제할 경우 처음부터 과거로 입사한 이들보다 훨씬 유리하게 고위직으로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직을 주는 것과 요직에 배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로, 음서로 관직을 제수받는다고 해도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한직에서 관료인생이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일단 고위 관직에 무능한 놈이 들어가는건 힘들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정말 잘나가는 귀족들은 음서는 물론 과거까지 급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실제로 도병마사나 추밀 등의 고위 구성원들의 출신성분을 보면 과거(실력)+음서(신분)가 많았다.

또한 후대인 조선만큼은 아니지만 음서로 관리가 된 자에게는 어느 정도 관직임명 제한이 있었다. 물론 고려는 조선만큼 필수관직을 무조건 못거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고려 사회에서 높은 관직으로 나아가는 데 필수적인 인맥의 핵심지공거가 있었기 때문에 음서출신 관리가 딱히 돋보이는 능력이 없었다면 요직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볼 필요가 있었다.인맥이 인맥을 견제하는 순기능을 내는 고려의 기묘한 관리임명

따라서 음서만으로는 아버지가 누렸던 정도의 고위관료가 되긴 힘들며, 나름대로 실력을 보여야 하는 것. 따라서 어떻게든 능력을 인정받을 기회를 찾으려 했고, 기회가 없었다면 스스로 공부를 해서 과거에 응시하는 일도 있었다. 물론 유능하다 쳐도 일부 기득권층 위주로 고착화되어 썩는 것은 피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이 제도만으로 무능력자가 혈통만 믿고 날뛰는 상황은 잘 벌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음서로 출세한 뒤 권력의 정점에 올랐던 이인임 등을 보면 모두가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충분히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 즉 출세는 부정하게 했어도 그 뒤의 능력은 확실하게 입증된 이들이기 때문에(혹 능력이 없으면 능력을 갖추어야만 대우받을 수 있었기에) 음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당시는 공식적인 제도인 만큼 '부정하게 했다'고 보기도 어렵고.

이 문단은 음서를 비판하는 서술과 변호하는 서술이 동시에 있는데, 실제 사학계도 그렇다. 현재 고려사회의 성격에 대해 귀족사회론과 관료사회론이 대립하고 있는데 음서에 대해서도 자주 행해지던 문벌귀족들의 권력기반이다.vs특수한 경우에만 행해지던 것으로 일종의 관리에 대한 포상이다.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고 있다.[2]

3 조선

조선시대에도 음서제도는 계속 유지되었으나 고려시대에 비하면 상당히 빡빡한 조건을 유지하였다. 일단 2품 이상의 관료 또는 실직 3품 관료의 아들, 조카, 손자, 사위, 동생에 한하여 음서를 누릴 수 있었으며, 과거에서 급제한 인재들을 우대하기 위해 승진할 수 있는 상한 품계를 두었고, 관품도 대거 낮춰서 음서로 받을 수 있는 관직은 별 실권도 없는 자리나 명예직을 내줄 정도로 차별하였다. 무엇보다도 음서로 임용된 경우에는 제도적으로 청요직에 나갈 수 없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청요직을 거치지 못하면 고위관료로 승진할 가능성은 0%나 마찬가지였다.

제도적으로뿐만 아니라, 과거 출신자들의 견제와 멸시도 심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음서는 당사자가 좀 쑥스럽기는 해도 꿀릴 건 없는 제도였던 반면에 조선시대에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상당히 쪽팔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문음으로 합격하더라도 이후 다시 과거에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미 벼슬을 얻은 사람도 과거를 여러 차례 보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명회로 할아버지가 명나라에서 조선건국을 인정받아온 개국공신의 장손이였는데 과거합격을 못해서 음서로 개성의 말단직으로 일했다. 그러던중 관리들 친목모임에 참여했다가 개국공신 가문 후계자가 문자 그대로 개무시를 당했다. 그리고 계유정난으로 사실상 조선의 2인자인 상황에서도 과거시험을 쳤다. 한국현대사에 도입해보면 쿠데타 직후 김종필 차지철 노태우가 공무원시험을 치러갔다고 생각해보자

면신례라고 하는 관료들의 신참의 군기잡기도 음서와 관련이 있다. 고려말 과거 급제자들은 음서 출신을 아니꼽게 여겨서 갈구는 것이 이어지면서 조선시대에는 신참 관료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집권세력의 족벌체계가 확고히 자리잡으면서 음서제도는 고려시절 못지않은 유력양반들의 관직 세습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래도 고려시대와는 달리 음서로 벼슬하면 아무리 잘해도 군수(종4품) 또는 목사(정3품)정도의 지방관료였다. 고려시대에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정1품도 가능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실제로는 고려든 이때든 그 정도쯤 되는 관리라면 거진 다 이미 과거에 합격한 사람일테니 최종 벼슬은 차이가 없었다. 대신 조선 후기에 이르면 과거시험 자체가 유명무실화되지만….

단적인 예로, 영조 대의 좌의정 이후는, 인조반정 공신 이귀의 6세손이었다. 그런데 30번이나 과거에 낙방해 노인이 됐고, 그에 비해 그의 동생 이유는 그가 25살 때 이미 급제했다. 그러나 좋은 가문 덕분에 음서로 나주 목사를 지내고 있었는데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 때문에 잠시 한양에 올라와 있을 때, 마침 동생의 생일잔치가 있었고 꼭 참석해 달라는 동생에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하긴 했는데, 동생을 비롯한 동석하는 대감들은 거의 다 자신보다 품계가 높은 관료들이었다. 그 때문에 스스로 말석에 가 앉았는데 주인의 형이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권해 상석에 앉았다.

그런데 동생이 한 점쟁이를 불러 점을 보게 했는데, 잘난척하던 호조 판서가 한 명 한 명 언제 점을 보겠냐며 이 중에 누구가 가장 먼저 정승에 오르겠나 봐달라고 하자. 그 좌중에 하필이면 나주 목사 이후를 지목해 버렸다. 이후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열등감 때문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자신이 어떻게 정승이 되겠냐면서 화를 내고 나와 버렸다. 그 날 밤, 형과 대면한 동생은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다음 과거에 응시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고, 응시하자 하필이면 평생 인연이 없던 과거에 덜컥 붙어 버렸다. 그의 나이 56세였으며, 동생이 과거에 합격한지 31년 만이었다. 당시 한양은 낙방도사가 과거에 급제했다고 떠들썩했다. 그리고 7년 후, 이후는 그 잔치에 동석했던 판서들보다도 먼저 우의정에 오른다. 점쟁이의 점이 맞아떨어진 셈인데, 이후는 원래 능력만 따지자면 정승감이라고 평가되었으나, 과거를 급제하지 못한 탓에 승진이 멈춰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끝은 불행했으니, 이후는 얼마 뒤 좌의정 겸 세자시강원 책임자이자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부에 임명되었는데, 문제는 모셔야 할 세자가 사도세자였다는 것. 사도세자의 평양원유 사건에 연루된 이후는 세자와 영조 사이 끼여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영중추부사 이천보, 우의정 민백상과 함께 음독자살을 하고 만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으면 세자부가 되지 않았을 테고, 세자의 평양원유사건에 연루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죽지도 않았을 것이기에 더욱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4 현대판 음서

현대한국에 음서제도는 없지만 유사한 사례들이 발견되고 있다. 당장 수시[3], 입학사정관제, 기여입학제, 특별전형, 5급민간인특채, 로스쿨 등이 있다. 물론 음서와는 달리 다른 목적으로 운용되거나 직원에 대한 혜택등의 이유로 도입된 경우이므로 취지를 잘 살리면 별 문제 없는 제도들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제대로 안돌아갈 경우에는 그야말로 현대판 음서가 된다.

개와 공주의 대한왕국에서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듯 하다.
  1. 외가는 음서의 혜택을 볼 수 없었던 조선과 달리 외손이나 사위 등 외가까지 친가와 똑같이 음서가 가능했던 점은 조선보다 고려시대가 여권이 더 높았다는 주장의 근거 중 하나로 곧잘 사용된다. 다만 고려시대에는 제사 같은 의무까지 친가와 외가가 똑같이 나눠 짊어져야 했으므로 의무와 권리 모두 남녀가 평등하게 가진 셈이다.
  2.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역사비평사,2009,p174-175
  3. 논술과 적성검사는 예외다. 자격제한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