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귀

李貴, 1557 ~ 1633

1 소개

조선 중기(광해군~인조 시기)의 문신. 이이성혼의 문하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항복류성룡을 따라 종군하였다.이후 인조반정의 핵심적인 인물로서 인조 시대의 권신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이괄의 난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거나, 말년에는 레임덕을 벗어나기 위하여 인조의 아버지를 왕으로 추숭하는 오점도 남겼다. 선조: 이귀는 본래 헛소리를 잘해![1]

고집불통으로 유명했다. 줏대가 없다는 평을 듣던 신중론자 김류와는 정반대 성격을 지닌 라이벌이었다. 둘의 나이부터 거의 한 세대나 차이가 나서 부자뻘이었고, 자식 교육에는 더 차이가 나서 김류의 아들 김경징은 온갖 횡포와 병크 끝에 청군에게 강화도를 내주고 탄핵받아 죽은 반면, 이귀의 아들 이시백은 능력이 일류는 아니었지만 청렴했고 이괄의 난, 병자호란 때 큰 활약을 하여 평판이 좋았다. 그의 동생 이시방은 명신으로 평가받으며 훗날 효종조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이시백, 이시방 형제는 김육대동법 확대에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한 대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명길은 이귀와 김류를 묶어서 비판했는데, 그의 말처럼 "큰 일은 잘 벌이지만 실속이 없다" 라는 평가에 딱 어울리는 마무리를 보여줬다. 김류가 잡일은 잘 했으나 큰 일을 못해서 악당으로 왜곡당하는 것과는 달리, 결국 두 사람은 업적과 전공의 총합이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김류는 치세의 업적이 지나치게 저평가 받고, 이귀는 화끈하기만 하고 마무리를 못한 행적이 고평가 받는 경향이 있다. (...).

1.1 선조 치세

선조 시기에는 스승인 이이를 강력히 옹호하는 상소를 올려서 명성을 얻었다. 북인에게 개발살나서 갈려나갔던 서인들 중에서 그나마 벼슬을 해본 사람으로서 지방 수령직을 했다. 다만 백성들에게 자꾸 힘든 일을 시킨다고 좋은 평가는 못 받았다...

1.2 임진왜란의 활약

선조가 평양으로 파천하러 갈 시기에 이귀는 강릉참봉(康陵參奉)이었는데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한 후 의병들을 모집해 의병장이 되었다. 황정욱(黃庭彧)의 진영에 갔다가, 선조 일행이 가고있던 평양으로 가 선조에게 죄를 청하고 방어대책을 논의하였다.

이후 류성룡 휘하에서 종군했는데, 이때의 인연 덕분인지 선조 실록에서 류성룡이 선조에게 "장성 현감(長城縣監) 이귀(李貴)는 신이 그의 사람됨을 몰랐었는데 지난번 비로소 만나보니 취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근래 살펴보건대 군사를 훈련시켜 진법(陣法)을 익히게 하고 굳게 지킬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매우 훌륭합니다" 라며 이귀를 칭찬하는 기록이 있다.[2]

이어 이덕형과 이항복의 주청으로 삼도 소모관(三道召募官)으로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한후. 이천으로 가서 분조활동을 하고 있던 세자인 광해군을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는 등 광해군의 분조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었고 비록 선조 말에 정인홍을 탄핵하는 상소를 자주 올리기는 하였으나 이 때까지만 해도 광해군을 "지지"하는 입장이였다.

1.3 인조반정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적이지만 광해군이 총애하는 정인홍을 풀어주자고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3]. 그러나 이이첨의 일파를 처형한 이유로 옥에 갇혀 있었던 최기와 만나 공초를 수정한 일 때문에 광해군 8년 해주옥사에 연관되어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되었고 [4]. 위처럼 본래는 광해군을 지지했으나, 이 일을 계기로 광해군에게 마음이 떠나버린다.

인조반정 직전에는 역모를 꾸민단 혐의를 받자 "날 모함하는 놈들하고 대질을 시켜달라" 고 정면돌파 승부를 내기도 했다. 어르신 깡 보소

60이 넘은 늙은 나이에 인조반정에 직접 가담하였으며, 특히 대 호랑이 특수부대인 착호갑사를 이끌고 와 계획이 비교적 허술했던 반정 성공에 앞장섰다.[5] 이이첨을 처형할 때 직접 심문하기도 하였다.

이떄 이이첨이 이귀에게 하는 말이 실록과 연려실기술에서 내용이 다른데 실록의 기록에는 이이첨이 이귀에게 대감은 나의 마음을 알 것이다. 자전(대비)께서 이제까지 보전하실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나의 공이 아니겠는가라며 허균같은 놈들이 대비마마를 해치려는거 지킨 충신인거 아시죠?".라는 뉘앙스의 말을하면서 살려달라고 빌었고 연려실기술 에서는 유순익(柳舜翼)을 통하여 대감의 말을 듣고 힘껏 폐론(廢論)을 멈추게 하였으니, 대비께서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다 내 힘이오. 그런데 어찌 특별히 용서하지 않고 죽이는 것이오라고 한걸로 나온다. 이에 이귀가 답하는 내용은 실록과 연려실기술 모두 똑같이 지금까지 네 졸개들이 앞장서서 악행을 저질렀던게 오늘 이 말하려고 그런 거였냐?" 라고 비웃어준걸로 나온다 [6] [7]. 반정 후 1등공신으로 추대되었다.

1.4 인조 치세

인조 즉위 직후에는 판서직에 올라 최고의 권신으로 행세했다. 반정 직후 김류와의 반목으로 좌천된 이괄을 옹호하는 입장이였지만 이괄의 난으로 상황이 악화되자 이괄의 정적 김류를 뛰어넘어 이괄을 역적으로 몰았다. 오히려 김류는 이괄의 편을 들었으며, 사실 김류보다 더 결정적인 반란의 방아쇠를 제공하기도 했다.

권세도 오래 못가 반정 4년만에 인헌왕후[8] 에 대한 예송논쟁에 휘말려 탄핵을 받아 사직했고, 정묘호란 때에는 주화를 주장하다 대간에게 제대로 어그로를 샀다. 즉 별로 명예롭게 말년을 보내지는 못했다. 호란 당시에 그의 모습은 제법 혁신적인데 "후금 놈들이 형제의 의리가 아니라 군신관계 요구해도 우리가 힘으로 막을 재간 있어요? 정 불리해지면 칭신도 가능합니다."라고 훗날의 더 큰 호란을 예견하는 듯한 말을 했으며 후금이 의맹식[9]을 요구하자 영의정 오윤겸 등이 죽을지언정 어림없다고 반대하는 와중에 "춘추에도 있는데 안될게 뭐가 있소?"라고 얼른 전쟁이나 끝내자는 주장을 했다. 대간의 반대를 위한 반대에 질린 나머지 걍 없애자고 주장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매우 실리를 추구한 조선시대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질이 거칠어서 인심을 잘 못얻어서 공신 중의 공신임에도 온건한 김류와의 파워 게임에서 밀렸고 인조도 그의 성정을 꺼려해 큰 권력을 가지진 못했다.

하지만, 막판에 나름대로 뒤집기를 하는데,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는데 앞장 선[10] 결과 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선조-정원군-인조 이렇게 조부손의 계보를 만들면 얼마나 좋나?"라는 요지로 인조를 적극적으로 옹호했고 인조는 "경의 식견은 실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점이 많소."라고 매우 칭찬하며 좋아했다. 라이벌 김류는 추숭에 반대하다가 인조 눈밖에 난 처지라서 몇년만 더 살았으면 꿈에 그리던 영의정도 해볼 수 있을 듯했으나 그의 나이가 76세. 그 이듬해에 죽어서 별로 혜택을 못봤다.[11] 대신 그 아들들이 총애를 받아 장남 이시백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차남 이시방은 공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역임했다. 두 형제 모두 김육대동법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특히 이시방은 대동법 시행의 실무자 중 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가문은 조선 후기 명문가 중 하나[12]가 되었다.

2 트리비아

말년에 병들어 인사를 분별하지 못할 지경이어서 자손들이 밤새 둘러앉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닭이 우니 문뜩 깨어나 한 아랫사람을 부르니 곧장 아무 마을에 가서 호조 서리 집을 찾아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했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와 아뢰기를, "가 보니 호조 서리 집에서 무당을 불러 신굿을 크게 하고 있는데, 특히 '연평대감(이귀)' 상을 성대하게 차려놓고 노래하고 춤추며 요란하게 굿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이귀는 다음 얘기를 했다. 밤에 자신의 영혼이 육신에서 떠나 날아서 큰길을 따라 가는데, 문득 장모님이 광주리를 옆에 끼고 오기에 인사하니, 장모님은 지금 어느 마을 호조 서리 집에서 신굿을 하고 있으니, 거기 참여하러 가는 길인데 서랑도 함게 가자고 했다. 그래서 같이 가니 과연 호조 서리 집에서 크게 굿을 하면서 무당이 귀신들을 불러 맞고 있었다. 이귀가 들어가니 참석했던 귀신들이 모두 기립했고, 음식상 앞에 가서 각종 음식의 냄새를 코에 쏘이니 저절로 배가 불러지는 것이었다. 이러고 나와 장모님을 작별하고 집에 오니 자신의 육신이 완연하게 자리에 누워 있었고, 그 육신 가까이 가니 어느덧 깨어났다. 그런데 분명히 꿈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ㅡ 《한국문헌설화5》, 김현룡, 건대출판부, 2000. 205-206쪽-

  • 임란 당시 장성현감을 지내면서 상중이던 김덕령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한 인물이기도 하다.[13] 여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텐데 의병활동에 나선 후배를 아끼는 마음에선지 김덕령 최강 전설 을 지어내어 김덕령을 띄어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 그 내용이 너무 어처구니 없어 선조가 대놓고 "이귀는 본래 헛소리를 잘 한다." 말하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김덕령은 이귀가 부풀린 명성이 해가 되어 죽어버렸다……

3 창작물

인조를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핵심공신이건만, 드라마에선 늘 김자점이나 소용 조씨같은 부류에게 비중을 빼앗기고 등장하지 않거나 간신배1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막나가는 성격 때문에 멋있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정권 유지면에서만 보면 김류보다 못한 점도 많고, 업적이 딱 비슷한 수준이라 잘 묘사하기는 힘들다.

자식농사와 큰 일을 벌여놓는 능력수습은 못 했지만을 빼면, 김류랑 딱 라이벌이라고 평가하기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물론, 자식농사와 큰 사고를 치는 능력은 이귀의 압승이다. 김류가 보신주의자니 줏대가 없다니 하면서 까이기도 하지만, 정권을 보수하는 눈에 안 띄는 부분에 있어서는 김류의 역할이 뛰어났으며, 둘 다 이괄의 난에 큰 영향을 끼쳤고, 말년에 주화론을 주장했던 걸 보면 정말 비슷하다.[14]

드라마 화정에서 등장. 배우는 장광. 드라마에서는 외골수라기 보다는 전형적인 간신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온다. 정작 이괄의 난에서는 이괄을 몰아붙여야하는 역할을 못하고 김자점이 그걸 대신했다.

4 관련 문서

  1. 다만 명신이었던 최명길도 동참하긴 했다. 단, 최명길 쪽은 현실주의자였던 만큼, 뭘 그런 걸 갖고 논쟁하냐, 추숭해두면 권위가 더 올라가서 도움이 되겠지 정도의 입장이었다.
  2. 다만 이순신은 이귀를 별로 안 좋게 봤던 모양인지 난중일기에서 암행어사 유몽인이 담양이나 진원, 나주, 창평 등지의 수령들과 함께 장성현감 이귀를 포상한 것을 두고 그들이 한 나쁜 짓은 덮어놓고 상을 주는 것은 임금을 기망하는 짓이라고 일기에서 깠다(갑오일기 2월 16일자). 아예 그런 보고를 올린 유몽인을 두고 진회와 같다고 할 정도. 조선 시대(+중국 명청 시대)에 상대에게 "너는 진회 같다"는 말을 듣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항목 참조.
  3.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002013_004
  4. 공교롭게도 이귀가 귀양을 간 이천은 이귀가 세자시절의 광해군을 도와 민심을 수습한 곳이다
  5. 조선시대에는 호환으로 인해 피해가 막심했다. 고심 끝에 정부에서는 대 호랑이 전용 특수부대인착호갑사를 만들었디. 더 나아가 호랑이를 잡는 일에는 임금의 사전 허락 없이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권한 및 지정구역을 넘어서 활동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었는데 이귀는 이를 이용해서 잡으라는 호랑이는 안 잡고 왕, 즉 광해군을 잡아버렸다.
  6. 연려실기술의 내용에 의하면 이위경 등이 대사헌 임취정과 함께 모후를 해치려고 했는데, 이이첨이 실상 이를 주도했었고. 유순익이 이를 듣고 한교를 시켜 이귀에게 알리니 이귀는 한교에게. 내가 이첨에게 말을 전달하여 그 의논을 저지시키려고 합니다 옛날 선조때에 최영경이 죽은 것은 송강(정철)이 한 일이 아닌데도, 마침내 송강이 이 일로써 죄를 입었다.오늘날의 대비를 폐하자는 의논도 비록 다른 사람에게서 나왔지마는, 일이 이루어지면 공이 실상 이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시역의 죄는 사람마다 이를 목베일 수 있는 것이니, 중국에서 만약 이 말을 듣게 된다면 역적의 죄목으로 토벌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고, 또 강홍립이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나온다는 말이 들리니, 또한 반드시 이 일로써 우리나라를 성토할 것이다. 공론이 만약 일어난다면 역적을 치자는 의논이 어찌 선비(최영경) 죽인 송강의 죄 따위에 그치겠는가. 그렇다면 세 나라에서 모두 공의 머리 하나를 다투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만약 이전의 허물을 몹시 뉘우치고 죽음을 힘을 다해 힘껏 저지시켜 서궁을 활짝 열어 놓는다면 뒷날의 공론이 혹시 공을 용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내 말을 옳지 못하다고 이 말로써 반역을 고발한다면 나도 마땅히 마음에 품고 있는 말을 다 진술하고 죽을 것이라고 하라라고 말했고이에 한교가 순익을 가서 보고 그를 시켜 이첨에게 전하니, 이첨은 깜짝 놀라 얼굴빛이 변하면서 “이귀가 아니면 내가 어찌 이말을 들을 수 있으랴.” 하였다. 그 후에 이첨이 현저하게 그 의논을 주장하지 않은 것은 모두 이 말 때문이었다라는 기록이 존재한다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h006&gunchaId=av020&muncheId=01&finId=003&NodeId=&setid=1675591&Pos=1&TotalCount=7&searchUrl=ok
  7. 인조실록의 기록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귀가 한교를 이이첨에게 보내 화복으로 설득시켰는데 그 말이 몹시 준엄하여 이첨의 기가 꺾였었다라는 기록이 있는걸 보면 이귀가 유순익과 한교를 통해 이이첨이 폐모론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게 설득한것은 사실로 보인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4_009
  8. 숙종 때의 인현왕후가 아니고, 인조의 어머니이자 정원군(원종)의 부인인 인헌왕후 구씨를 말한다. 참고로 정원군은 광해군 시절에 죽었으나 부인은 아들이 쿠데타로 집권하는 것을 보았고 부대부인으로 격상되었으나 이때 죽었다. 결국 사후 6년 뒤 왕비로 추존됨.
  9. 흔히 "삽혈맹세"라고 해서 동물의 피를 받아 입술에 바르는 것.
  10. 당시 인조는 추숭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다 내쫓고 이귀, 최명길을 앞세워서 추숭을 밀어붙혔다.
  11. 인조는 이귀를 재상으로 승진시키려 했으나, 그 전에 사망하였다. 그래서 사후에나마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2. 9대에 걸쳐서 봉군되었다고 한다.
  13. 김덕령은 1592년 고경명 막하에서 의병으로 종군하다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유에 낙향했는데 1593년 어머니 상중에 이귀, 이경린의 권유를 받고 독자적인 의병을 일으켰다. 참조
  14. 김류는 신중론자였으니 주화파였지만 척화파의 여론도 끌어 안으려고 했고, 이귀 이 양반은 성질머리가 거칠었던 만큼 "청과의 화친을 고려할 필요도 있긴 한데 지금은 빡치네" 라고 생각하는 수준이었다. 정말 라이벌 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