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意幽堂日記. 조선 순조 29년, 1829년에 의유당 연안김씨(延安金氏)가, 혹은 영조 48년, 1772년에 의유당 의령남씨(宜寧南氏)가 지은 여류수필. 의유당관북유람일기(意幽堂關北遊覽日記)라고도 부른다.
2 작자 논란
원래 의유당일기는 그동안 이병기(李秉岐)가 작품 원문에 교주를 붙여 최초 출판할 때 밝힌 의유당 연안김씨(延安金氏)를 책의 저자로 보았다. 이병기는 1947년 책을 발행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연암김씨의 의유당이라는 당호를 지닌 한 여사의 작품으로 순조 29년 가을에 남편 이희찬이 함흥판관으로 부임하매 의유당도 따라가 그 부근의 명승 고적을 찾아다니며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그 붓으로 적은 것이다.
그런데 이후 연구가 진행되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훗날 의유당의 또 다른 작품을 모아놓은 의유당유고가 발굴되면서 다른 이상한 점들이 발견되었고, 또 의유당일기의 내용과 이병기가 비정한 창작연대가 일치되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1977년 국어국문학회와 한국문학논총에 류탁일 교수가 논문을 게재한 것을 시작으로 지속적인 연구 끝에 의유당은 연안김씨가 아니라 같은 당호를 쓴 의령남씨이며 창작연대 역시 1829년이 아니라 60년 앞선 1772년으로 보는 견해가 높아지고 있다.
3 내용
의유당 연안김씨가 남편 이희찬을, 혹은 의유당 의령남씨가 남편 신대손(申大孫)을 따라 서울을 떠나 남편의 임지인 함흥에 도착하여 그 주변의 명승들을 구경한 내용이다. 내용 구성은 다음과 같다.
- 낙민루 : 함흥부 내의 명승지인 낙민루(樂民樓)와 만세교를 유람한 내용.
- 북산루 : 함흥부 내의 명승지인 북산루(北山樓), 무검루(舞劍樓) 등을 유람한 내용. 북산누각을 찾아가 기생들의 풍악소리를 들으며 즐기던 일과, 종일 놀고 날이 어두워서 돌아올 때 청사초롱 수십 쌍을 기생들에게 들리고 풍악을 울리며 돌아오던 기분을 서술했다.
- 동명일기 : 의유당일기를 대표하는 가장 장문의 글로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동명의 해돋이와 달맞이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남편에게 졸라 허락을 받은 후 북산루와 귀경대(龜景臺)에서 월출과 일출을 구경한 내용이다.
- 춘일소흥 : 김득신외 10인의 일화를 기록했다. 의유당일기가 소개된 이래로 의유당이 직접 저술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역시 최근의 연구로는 이미 존재한 한문 작품을 의유당이 번역한 것이라는 견해가 높아지고 있다. 즉, 김득신, 남용익, 정유악, 정탁, 정인홍은 운양만록에 수록된 일화를 번역한 것이고, 김류, 조견, 유부인, 이번, 이탁의 일화는 매옹한록의 내용을 번역했다는 것이다.
- 영명사득월루상량문 : 평양의 영명사(永明寺) 득월루(得月樓)를 중수할 때 지은 글을 기록했다. 역시 의유당이 직접 지은 글은 아니고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뜬금없이 영명사득월루상량문이 의유당일기에 들어있는 것 자체가 이 책이 1772년 의령남씨의 것임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 중 하나인데 영명사의 득월루를 건립한 사람이 의령남씨 생몰대의 평안감사였던 홍상한(1701~1769)이었고 의유당 남씨와 인척관계였기 때문. 의유당 남씨의 시매부(媤妹夫)가 홍인한으로 홍상한과는 4촌 관계였다. 반면 연안김씨는 영명사는 둘째치고 평양과도 아무 인연이 없었다.
4 의의
여성의 손으로 한글로 지어진 최고의 기행문학 작품으로 꼽힌다. 특히 동명일기에서 보이는 뛰어난 묘사와 자유분방한 필치는 어디에도 찾아보기 힘들며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또한 춘일소흥과 영명사득월루상량문은 번역문학적 맥락에서 주목받고 있으며 당대 여성문학가의 문학향유 양상과 번역 솜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특히 사물을 관찰하는 격조 높은 안목과 탁월한 표현력은 지은이의 문학적 역량이 어떠한가를 보여준다.
조선조 여성의 대표적인 수필문학 작품으로 그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기행, 전기, 번역 등을 포괄하는 작품으로 18세기 조선조 여류문학연구의 귀중한 자료다.
훗날 발굴된 의유당유고는 의유당이 50세 이후에 지은 작품들을 그녀 사후에 묶은 책으로, 의유당유고에는 그녀 말년의 삶에 대한 기록이 조금씩 나타난다. 의유당유고에 의하면 의유당은 훗날 모두 12남매를 출산하였지만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잃고 만다. 젊어서는 자뭇 활달하고 재치발랄하여 남편을 따라 남북으로 뛰어다녔지만, 말년에는 따르던 남편과 자식들 대부분을 잃고 쓸쓸히 곤궁한 말년을 보낸 것이다. 의유당유고의 작품들은 의유당일기와는 달리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기세가 느껴지지 않으며, 그녀 특유의 섬세한 관찰은 여전히 두드러지지만 젊었을 적의 자유분방한 필체는 더이상 드러나지 않는다. 의유당일기, 특히 동명일기를 읽어 본 후 의유당유고의 글을 읽으면 어딘가 모르게 강개하고 애절한 기분을 느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