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홍

width=100%
'청람사'에 봉안된 정인홍 영정[1]
이름정인홍(鄭仁弘)
자(字)덕원(德遠)
내암(來庵)
생몰1535년 9월 26일 ~ 1623년 4월 3일
본관서산(瑞山)
출생지경상남도 합천의 상왕산(象王山) 아래 남사촌

조선 중기의 북인 계열 문신. 호는 내암(來菴).

남명학파로서 조식의 적통 제자로 조식이 말년에 자신의 보물인 경의검을 친히 물려준 인물이다. 강직하고 배타적인 성품으로 유명했다.

선조 재위기 초에 관직에 올랐으나 다시 재야로 내려갔다. 그러다 임진왜란 시기 경상우도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으며 이후 정계에 재입문하였다. 임진왜란 시기 나이가 벌써 환갑을 넘었음에도 의병을 지휘했었고 정유재란이 터지자 다시 의병을 일으킨 것[2]을 보면 그의 강고한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지나치게 주관이 뚜렷해서 반대파와 심한 대립각을 세웠는데 이는 송시열과 마찬가지로 정적들을 늘려 결과적으로 비슷한 말로를 겪는 이유가 되었다[3]. 임진왜란기 의병장들 대부분이 당색을 그리 강하게 내보이지 않는데 반해 이쪽은 북인이란 당색이 아주 강하게 드러난다. 왕에게도 거침없이 할 말을 하는 성품이라, 선조의 후계 문제를 놓고 당시 광해군을 밀어내고 영창대군을 후계로 삼으려던 유영경 등 탁소북의 행동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담긴 상소를 올렸다. 그것도 대놓고 선조한테 광해군 한테 빨리 왕위 넘겨줘. 너 때문에 나라 절단나게 생겼다.라고 해석될 만한 문장이 들어갔다. 역시 그 스승에 그 제자. 자세한건 조식 항목 참조. 아무튼 당연히 선조는 분노해 유배 명령을 내렸다. 선조는 대놓고 "아주 미쳤구만. 미친 놈이니까 이딴 소릴 했지. 딴에는 나라 생각한다고 한 모양인데 불충도 이런 불충이 없다."라고 신랄하게 뱉었고 "광해군은 천자의 인정도 못받았는데 무슨놈의 세자냐?"라고 덧붙여서 광해군이 엉엉 울면서 또 맨바닥에 고개 조아리고 사죄해야 했다.(…) 각설하고 유배지로 떠나기 직전에 선조가 죽어서 형이 집행되지는 않았고 덕분에 광해군 재위 내내 칭송받았다.

광해군 시기에 영의정을 지내다 쿠데타인조반정으로 축출되어 인조 정권이 그를 간신으로 윤색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크게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애초에 유배를 불사하면서까지 할 말을 했다는 점만 봐도 권세를 쫓은 이이첨과 비교시키기에는 확실히 부당한 인물이기도 하며[4], 그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소신이 강한 강경파였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그가 어그로를 끈 최대의 이슈라면 스승의 추존을 위해 이황과 이언적의 문묘종사가 이루어지자 신랄하게 까대다가 성균관 유생들에게 청금록에서 제명된 사건인데, 이로 인해 다른 학파로부터 배타적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스승의 높이려는 것은 유학자로써 당연한 일이니 참작이 되지만 이황을 필요 이상으로 깎아 내리기 보다는 조식 또한 문묘종사에 적합하다는 형태로 온건한 주장을 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조반정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조선 유학 흐름의 중요한 방점을 찍었을지도 모를 인물. 이황을 비판한 "정맥고풍록"이라는 책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글 자체의 내용을 떠나서 잘 쓴 글이라서인지 훗날 서인의 수장인 송시열도 읽어보고 '이거 잘썼네'라고 칭찬했다고 하지만 발견되었음에도 아직까지 연구가 안되고 있다고 한다. 인목대비를 죽이자는 허균 일파의 주장에 대해서는 "서모도 어머니는 어머니인데 어떻게 자식이 어머니를 죽이는가?"라고 반대했다.

인조반정 당시에는 그야말로 호호백발의 노년이었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대북의 완벽한 정신적·사상적 지주였기 때문에 쿠데타로 집권한 서인이 곱게 놔둘 리 없었다. 끝내 인조반정때 참형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88세였음에도 이런 노인에게 사약도 아니고 참수를 집행한 서인의 복수심을 엿볼 만 하다.[5] 설령 이미 죽었었다 하더라도 꺼내서 부관참시했을거라고 한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후손들은 연좌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집권 서인의 서슬에도 불구하고 정인홍을 추종하는 이들은 그의 허름한 고택을 사당삼아 무려 100년여 동안이나 그의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결국 합천군수가 여기에 불을 질러 사람이 찾지 못하도록 했는데, 그 뒤 군수 일가가 화를 당해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결국 순종 때인 1908년 그의 공이 인정되어 다시 복권되었고, 영의정 관작도 복위 신원되었다[6].

현재는 고향인 합천군 가야면에 그의 고문서 및 서적과 묘소가 정비되어 있다.

전술했듯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조식의 수제자이기도 했는데, 원래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려 했다가 이황이 그의 완고한 성품을 보고 '너무 대쪽 같아서 유연성이 없다'는 자못 괴한 이유로 퇴짜맞았다는 전설이 전해지지만 거의 사실무근인 얘기. 자세한 것은 이황 항목 하단의 에피소드와 본 링크의 분석글을 참조하자.

참고로 곽재우와 같은 스승에게서 배운 동문이며 곽재우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의병장을 지냈다. 그러나 꼬장꼬장하긴 했어도 정인홍처럼 배타적이진 않았던 곽재우는 큰 이미지 훼손 없이 지금도 의병장으로서 유명하지만, 계속 정계에 머물며 특유의 배타성으로 정적을 양산한 정인홍은 반정 이후 철저히 소독되어 의병장으로서의 활약마저 묻힌 감이 있다. 그러다 조선 멸망 후 신채호처럼 그의 활약에 크게 주목한 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지금도 시간이 지나면서 스승인 조식처럼 점점 조명이 이뤄져가고 있다.

남인의 영수 류성룡과는 그야말로 물과 기름 같은 정적관계였는데, 결국 이산해와 함께 류성룡을 정계에서 축출한다.

정인홍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 연구서로 남명학연구원에서 2010년 8월에 펴낸 《내암 정인홍(예문서원)》이 있다. 정인홍 관련으로는 가장 체계적으로 각 잡힌 책으로, 여러 대학의 역사학 교수 및 연구자들이 집필에 참가한데다 정인홍과 남명학에 대한 풍부한 사료와 철저한 고증에 빛나는 명저이니 관심있는 분들은 꼭 일독해보기 바란다. 단, 이 책은 정치가, 학자로서의 정인홍에 대한 연구는 풍부하지만 의병장 정인홍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다.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는 이 사람을 높이 평가해 조선을 구원한 위대한 세 사람 중의 1인으로 거론했다. 나머지 둘은 을지문덕이순신. 그리고, 이 때문에 신채호는 역사학자로서 평가가 훼손되었고, 을지문덕과 이순신 역시 그 업적이 신채호한테는 무시당했다는 평가를 지울 수 없게 되었다.

김성한 작가의 소설 7년전쟁에서는 의병장의 모습을 다루기 때문에 대북파를 이끌던 시절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평가가 호의적인 편.

  1. [1]
  2. 이산겸, 김덕령등의 억울한 죽음으로 민심이 흉흉해졌고 전쟁이 너무 길어지면서 의병하다간 끝장날 판국이라 정유재란 때부터 의병활동은 뜸해진다.
  3. 심지어 송시열과 사사 당시 나이까지도 비슷하다. 송시열은 83세로 죽었으니 송시열이 다섯살 어린 나이에 죽었다.
  4. 이이첨이 화살받이로 그를 자주 내세운 것도 한몫했다. 무슨 말만 하면 "이거 정인홍이 시킨거다.""정인홍도 나와 뜻이 같다"라고 주장했고 아예 정인홍 이름으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정인홍에겐 사후에 알렸다. 그러나 정인홍은 상소의 내용이 내 뜻과 같다.라면서 동의한 경우가 많아 할말은 없다.
  5. 당시 80세 이상은 사형시키지 않는 관례가 있었다.
  6. 당시 복권은 주로 조선 후반 내내 집권 서인으로부터 폄훼당한 남인, 북인 계열 인사들 및 무신들, 그리고 훈구파 인사들까지 포함되는 77인에 대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