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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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申采浩, 1880년 12월 8일 ~ 1936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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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짓는 것이요, 역사 이외에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짓는 것이 아니다.
오호라, 어떻게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의 귀에 애국이란 단어가 못이 박히도록 할까?

오직 역사로써 해야할 것이다.
오호라, 어떻게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의 눈에 항상 애국이란 단어가 아른거리게 할까?
오직 역사로써 해야할 것이다.
...(중략)...
성스럽다, 역사여! 위대하다, 역사여!
일곱 겹, 여덟 겹의 화려한 누각으로 일국 산하를 장엄하게 수놓을 자, 역사가 아닌가?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의열단 선언'의 마지막 구절, 신채호 著-

식민지 조선에서 혁명을 꿈꿨던 진성 열사(烈士)

신채호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다.[1] 조선시대 정치가인 신숙주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호는 단재(丹齋)·단생(丹生)·일편단생(一片丹生)이다. 충청도 회덕군 산내면(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출신이다.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다. 특히 '한놈' 등은 스스로를 낮추기 위해서 쓴 필명이다.

한국근현대사 파트에서 수능 근현대사 및 공무원 시험에 단골로 출제되는 민족사학자며 사실 제일 유명하고 영향력이 컸던 문제는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국어영역 B형 17~20번 지문이다 그가 쓴 〈독사신론〉,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통하여 암울한 개항기 및 독립운동기 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주체성을 강조한 민족주의사관을 바탕으로 만주 땅이 한민족의 땅임을, 발해가 한민족의 국가였음을 강조했다.

2 계몽운동과 독립운동

1897년[2]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3]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이전부터 독립협회만국공동회에 참여해 실패에 좌절했던 그였지만,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민족 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하기 시작한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주필로 활동했으며, 〈이태리 건국 삼걸전〉(가리발디, 마치니, 카보우르), 〈을지문덕전〉 등을 지어 민중에게 자주 의식을 고취시켰고, 일진회의 성토에도 앞장섰다.

국권 피탈 즈음해서 1907년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의 일환으로 국외로 이주해 만주, 연해주 등지를 다니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고 견문을 쌓았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나철대종교(당시는 단군교)와 연계가 있었는데, 이후 나철이 사망하고 2대 교주 김교헌이 독립운동보다 종교 체제를 강화하는 형태로 대종교를 운영하자 사이가 소원해지게 된다.[4]

1911년 권업회를 조직하고 주필로 일하였다. 이후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사고전서를 보기도 하고, 조선상고사를 쓰기도 하는 등 학술적인 면에서 나름대로 좋은 시기를 보내다가, 1919년 3.1 운동이 발생한 것을 보고 민중의 힘을 자각하게 된다[5].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으나 미국에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출되자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까지 파는구나!" "라며 반대하고 재선출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1919년 4월 11일의 재선출에서도 이승만이 당선되었고 그 꼴을 보고 빡친 신채호는 임시의정원에서 퇴장해버린다.(...) 이후, 신채호와 이승만의 관계는 노선의 차이로 더욱 비틀어진다. 위임통치 청원 사건으로 촉발된 임시정부 분열 사태 속에서 신채호는 임시정부의 존재 이유 자체를 문제삼으며 창조론을 더욱 거세게 내세우며 임시정부를 갈아버리려고 했지만 온건세력인 안창호 세력과 김구 세력과의 대립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외교론이 임시 정부의 주요 방안으로 자리잡자 그는 임시 정부의 조직에서 사실상 빠지고 〈독립신문〉에 정면으로 맞서 〈신대한〉을 발간했다.(신들의 전쟁...)[6] 결국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지도 기관을 세우자는 창조파의 대표 주자 역할을 하다가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임시정부를 탈퇴한다.

같은 해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문)을 짓는다. 여기에서는 '우리 조선인 한 사람이 일본인 한 사람씩을 죽이다 보면 언젠가는 일본인이 전멸할 것이며, 내가 두명을 죽이면 조선인 한명을 살리는 일이며, 내가 열명을 죽이면 조선인 아홉명을 살리는 길이다'라는 취지의 글을 썼다. 이외에도 자치론, 외교론, 실력 양성론, 무장 투쟁론[7] 등을 차례로 매섭게 비판하며 민중에 의한 직접적인 폭력 혁명, 즉 건설을 위한 파괴를 답으로 제시했다. 특히 뒤에보듯 자치론에 있어서 "일본이 생불이 되어 모든 것을 돌려주고 명목상의 종주국만을 요구하더라도 생각있는 사람이면 그것이 치욕일 것임을 알 것이다"[8]라고 일갈한 건 백미.

제1은 외교론이니 이조 5백년 문약 정치가 '외교'로써 나라를 지키는 으뜸 계책으로 삼아 그 말세에 더욱 심하여...탄원서나 열강의 공관에 던지며...민족 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렸도다.

제2는 준비론이니 을사조약 당시 여러나라 공관에 빗받돋듯하던 종이 쪽지로 넘어가던 국권을 붙잡지 못하며...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쉽게 요약하자면 우리 주권이 없는 상태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떤 폭력적 수단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발짝의 행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울분과 원한이 있으면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 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 양성소-학교-로 보내고, 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된다 하면 '단군을 속여 스사노 노미코토의 형제'라 하여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이 다스리는 땅'이라 한 일본놈들의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 정치를 찬미하는 반(半)일본화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세상을 비관하고 절망하는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의 명칭 하에 감옥에 구류되어, 주리를 틀고 목에 칼을 씌우고, 당근질·채찍질·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팔다리를 달아 매는, 콧구멍에 물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刑律), 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 감옥 문에서 나온대야 평생 불구의 폐인이 될 뿐이라. (중략)

설혹 강도 일본이 갑자기 부처·보살이 되어 하루 아침에 총독부를 철폐하고 각종 이권을 다 우리에게 돌려주며, 내정외교를 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고 일본의 군대경찰을 일시에 철수하며, 일본의 이주민을 일시에 소환하고 다만 이름뿐인 종주권만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모두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받든다 함이 '치욕'이란 명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할지니라. (중략)
일반민중이 굶주림·추위·피곤·고통, 처의 울부짖음, 어린애의 울음, 납세의 독촉, 사채(私債)의 재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에, 만일 그 압박의 주인되는 강도정치의 시설자인 강도들을 때려누이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四海)에 전하며 뭇 민중이 동정의 눈물을 뿌리어, 이에 사람마다 '굶어죽음'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라 하 길이 남아 있음을 깨달아, 용기 있는 자의 그 의분에 못 이기어 약한 자는 그 고통에 못 견디어,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보편적으로 전염하여 거국일치의 대혁명이 되면 간사·교활·잔혹·포악한 강도 일본이 마침내 구축되는(쫓겨나는) 날이라. (중략)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요 둘이 아닌 줄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 줄 알진대, 현재 조선 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 조선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 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 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 다리 위'에 선 줄을 알진대,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1927년, 신간회 발족에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나 크게 마음에 둔 것은 아니었다. 홍명희안재홍의 권유로 해외에서 참가한 것. 이 무렵 아나키즘 사상을 담고 있는 '대흑호의 일석담',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 등의 글을 남겼다.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때 혐의는 위조지폐 제조로, 아나키즘과 연결이 강했다.

1936년 옥중에서 뇌일혈로 삼일간 방치되었다가 사망했다. 이 직전에 부호였던 일가 친척의 도움을 받아 병보석으로 풀려날 것을 제안받았으나, 그가 이미 친일파로 변절했기에 거절했다. 조선일보의 취재와 (추가) 연재 요청도 능력부족을 이유로 거절했으며, 일본 연호쇼와를 사용하는 것에 일침을 가했다.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왜놈들 발에 시체가 채이지 않게 화장해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는 말을 남겼으나 주변인들 대다수가 단재의 시신을 국내로 가져가자고 주장했고 이에 국내에 안장했다. 이 과정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3 역사 저술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을 저술한다. 이는 기존의 단군 - 기자 - 위만으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고대 사관을 기자를 자르고 단군조선 - 부여 - 고구려로 이어지는 사관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전 역사 서술이 거의 일본 역사서의 번역에 그치고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에 비해서, 임나일본부설 비판부터 근대적 역사연구 방법론까지 어지간한 이야기는 여기서 다 나온다. 때문에 최초의 제대로 된 근대적 역사연구신채호의 독사신론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1924 ~ 1925년 동아일보에 여러 논문을 썼는데, 이를 홍명희 등의 엮어낸 것이 〈조선사연구초〉이다. 1931년 옥중에서 쓴 글을 안재홍이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는데 이는 후에 〈조선상고사〉로 불리게 된다[9]. 〈조선사연구초〉에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 실려있고, 〈조선상고사〉 서문에 그 유명한 아와 비아의 투쟁[10][11]이 쓰여져 있다. 우리 민족의 고유 사상이자 정신인 낭가 사상을 강조했다.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에서 삼국사기의 편집자 김부식을 무자비하게 비판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는 당시 서경천도운동을 주장하였던 묘청이야말로 고려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던 자주적인 역사관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김부식묘청의 난을 진압하게 되면서 자주적인 역사관이 사대주의에 억눌리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12]. 또 정여립 역시 높게 평가했으나 프랑스 혁명처럼 세계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고 한계를 그었다. 단순히 묘청과 정여립을 띄웠다는 사실만 흔히 알려지지만 차이가 있다.

이외에 중국 신문에 역사 관련 사설을 연재한 경력이 있으나 을 벌기 위해 쓴 글이었기 때문에 본인은 이 글들을 쓴 것을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자신이 쓴 글을 편집자가 약간의 자구 수정[13]을 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때려치운 일화도 있는데, 호구지책을 위해 글 쓴 것을 후회했다는 이야기는 이와도 연결된다.

당시 도망치듯 중국에 건너가서 집필활동을 할 때였기 때문에 돈도 별로 없었는데, 그는 매일 중국의 서점이나 헌책방에 가서 선 자리에서 관련된 책을 모두 읽어버린 후, 통째로 암기하여 집에 가서 자신의 원고와 비교 분석하여 다시 글을 쓰는 일을 반복했다 한다. 뭐 이런 괴수가... 어느날 찾아간 집의 귀한 책이 불에 타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복원해 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한, 조선혁명선언문을 작성할 때는 방에 틀어박혀서 꼬박 1달을 글쓰는 데만 매진했다고도 한다.

이러다보니 황당할 정도로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사설 연재를 집어치운 앞의 일화도 그렇지만, 자신이 이전에 쓴 글도 마음에 이후에 다시 봐서 마음에 안 든다는 생각이 들면 그 자리에서 불살라 버렸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이 때문에 아까운 원고들 상당수가 이렇게 신채호의 손에서 사라졌다.

이와 같은 어려운 사정 때문인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등에 있는 한담에선 "내가 지금 3원만 있으면 무슨 책도 사고 무슨 책도 살 텐데... 아니다. 정말 1원만 있다면 이 책을 사서 공부할 수 있는데..."와 같은 안습한 글귀가 보이기도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금은과 재백(財帛)을 다하여 깊이 장사지내고, 돌을 둘러 봉하고 또한 소나무, 잣나무를 심는다(高句麗人金銀財帛 盡於厚葬 環石爲封 亦種松柏)."고 한 아주 간단한 문구의 뜻을 비로소 충분히 해석하고, 수백원만 있으면 묘 하나를 파볼 수 있을 것이요, 수천 원 혹은 수만원이면 능 하나를 파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천년 전 고구려 생활의 활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인데. 하는 꿈 같은 생각만 하였다. 아! 이와 같은 천장비사(天藏秘史)의 보고(寶庫)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人材)와 물력(物力)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았다.

여기에 덧붙여 "집안현을 한번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실증주의적인 연구자가 오늘날 실증주의라면 이를 갈며 달려드는 환빠들의 추앙을 받고 있으니 아이러니 할 수 밖에.

하지만 자존심이 강해서 다른 사람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이 놀러가서 몰래 집구석에 매우 적은 돈(조금만 더 크면 의심하니까)을 쑤셔박아놓았고, 단재는 집을 청소하다가 이 적은 돈을 발견하고 '헐 언제 잃어버렸었지... 횡재했구만'이라며 겨우 입에 풀칠을 하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주위 사람들이 이정도밖에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에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조금 이른 시기 만주 을 돌면서 답사를 할 때 광개토대왕비 탁본 한 장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을 정도였다고.

의외로, 신채호는 기자(箕子)의 존재를 부정한 적이 없다. 기자가 중국에서 와서 고조선에서 단군을 제치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 자체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고, "특별한 발견이 있기 전까지는 기자의 연대를 그냥 두고 볼 것"이라던가, "그냥 3천 년 전에 기자라는 사람이 있었고 우리 나라에 왔었구나 하는 정도로만 보면 된다"는 것.(출처: 조선사연구초)

4 사상과 정신

생애초기에는 성균관 박사까지 지낸 유학자 였으며, 초기에는 영웅주의적 역사관에서 '왜놈들을 쳐부셔줄 영웅'을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후 민중주의적 방향으로 선회했다. 1920년대 초기부터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후기에는 민족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사해평등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 즈음해서는 아나키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사회주의, 아나키즘 사상 때문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음에도 군사정권 시절까지 가족이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이건 신채호가 평소에 이승만을 대차게 까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채호는 그 올곧은 정신으로도 이름이 높다.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고 세수를 했다는 일화는 역사 공부 좀 했다면 한번쯤 들어봤을 만한 일화.[14] 이외에도 고기가 일본산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다 토해버렸다든지 하는 일화가 많다. 또 일상 생활과 일상 상식에 관심이 없어 빨간 속옷을 빛깔이 곱길래(...) 입고 다녔다든가, 앞에서 보듯 방구석을 치우지 않아 지인들이 (그냥 주면 절대 안 받으니) 돈을 몰래 좀 놓아두고 다녔다는 식의 이야기도 많다.

조선의 종교와 이론 수용자세에 대해서 비판적 자세를 취했는데[15], 이런 어록이 있다.[16]

옛날 도덕이나 주의란 것이 그 표준이 어디서 났느냐? 이해에서 났느냐? 시비에서 났느냐? 만약 시비의 표준에서 났다면 나무 그늘에서 여름 더위를 피하고는 겨울에 그 나무를 베어 불을 때는 인류며, 소를 부리어 농사를 짓고는 그 소를 잡아먹는 인류며, 연암 박지원이 말한 것 같이 벌과 황충이의 양식을 빼앗는 인류니, 인류보다 더 죄악 많은 종족이 없으므로, 먼저 대포로 인류를 쏴죽여 인류의 종자를 없애 버려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인류는 이해 문제일 뿐이다. 이해 문제를 위해서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프트킨도 났다. 시대의 경우가 같지 아니함으로 그들의 감정의 충동도 같지 않아 그 이해 표집의 크고 작음과 넓고 좁음은 있을 망정 이해는 이해다. 그의 제자들도 스승의 정의를 잘 이해하여 자신들이 이익을 구함으로 중국의 석가가 인도의 석가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와 중국의 공자가 다르며, 마르크스도 카우스키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마르크스와 중국이나 일본의 마르크스가 다 다름이다.
그러나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전에서 진리를 차지하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주의와 도덕은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내용을 보면 마치 광복 후 예수쟁이의 등장을 예언한 것처럼 보인다.[17] 그리고 지금 세상 돌아가는 걸로 봐선 석가, 공자, 예수 그 다음에는 알라(이슬람)가 되려나?
러시아식 유머?

5 그외의 부분들

역사학자로서 유명한 신채호이지만, 국문학에 있어서도 한자리 걸쳐있다. 초기의 영웅전 번역 이외에도 다양한 소설을 서술했기 때문이다.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 '일목대왕의 철퇴'가 대표작이다. 다만 궁예에 대해서 다룬 '일목대왕의 철퇴(그나마 미완성)'을 포함해서, 문학성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단적으로 '용과 용의 대격전'은 짤막한 단편이지만, 당시 심취하였던 아나키즘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가정사에 있어서는 힘들게 지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초창기에 결혼해서 아들을 보았으나, 아내가 물도 타지 않은 분유를 먹여서 아이가 죽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된다. 이때 분유통을 모두 도끼에 찍어 강물이 온통 우유빛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후 국외로 나가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을 주면서 이혼. 이후에 중국에서 지내는 과정에서 간호사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자혜(띠동갑 차이가 난다)와 재혼(1920년)을 했으나 이 시기도 경제적인 문제로 고생했던 것은 앞서 언급된 바 있다. 박자혜는 3년만에 신채호의 권유로 조선으로 돌아갔고, 아들 신수범만 장수하여 1991년까지 살았다.

말년에는 앞서 계속 언급되었지만, 아나키즘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처음 아나키즘과 연결된 것은 의열단선언을 쓰는 등 의열단과 연계를 가지던 시기에 아나키스트였던 의열단원들중 일부와 접촉하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나키즘과 민족주의자 신채호의 연결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신채호는 민족의 독립이라는 목표하에서 유교 - 영웅사관 - 대종교를 포함한 민족주의 - 아나키즘을 거침없이 넘나들었던 전례가 있다. 독립이라는 목표만 제외하면 도구는 별 신경 안썼다고 보면 단순하다.

그렇다고 아나키즘이 단순히 민족독립을 위한 도구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말년에 갈수록 신채호의 사상은 아나키즘의 영향을 짙게 받게 되었으며, 민족독립이라는 목표 역시 현재 상황에서 시급한 목표였지 그것을 지상목표로 삼는 전형적 민족주의자의 태도를 보이지는 않게 되었다. 사실 민족주의자로서의 신채호에 비해 사회주의자, 나아가 아나키스트로서의 신채호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근래에 들어서야 이루어진 편으로, 김구처럼 무난한(제도권 입장에서) 민족주의자로서 교과서의 단골이던 신채호 선생이 빨갱이(!)와도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대중에게 알려질 사실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이회영도 마찬가지여서 국사책에서 이회영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독립운동사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신채호는 여러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유연하게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근본적으로 인간해방이라는 이념 하에 식민지 조국의 현실과 자본주의, 국가주의 등 여러 억압과 착취의 현실을 고민해 온 역사학자 겸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재가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던 것은 3.1운동 당시 봤던 민중들의 힘이었고 그 이전까지 계몽주의자였던 신채호 입장에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지로 독립을 외친 것이 매우 신선했을 것이다. 그리고 북경에 거주하면서 이회영,유자명등의 거물들과 교류를 하면서 아나키즘을 수용했을 것이고 나중에는 민족보다는 민중을 더 중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당시 일제에게 억압받던 다른 지역의 아나키스트들과 연계하기도 했다. 사실 계몽운동을 독립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신채호에게 있어 민중해방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아나키즘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사상적으로 옳기만 하다면 유연하게 수용했던 신채호의 생각과 항상 대쪽같은 모습은 전형적인 선비라 할 수 있겠다.

이 과정에서 쓴 글 중 하나가 "외국의 주의가 조선에 전해지면 조선의 주의가 아니라 주의의 조선이 된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낭객의 신년만필'인데, 이 글이 청소년 추천 서적으로 지정되어서 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을 준 적이 있다. 애초에 이 글도 아나키즘의 대표적 인물이자 러시아 혁명기에 활동한 '크로포트킨의 세례를 받자'는 등 아나키즘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글이기 때문이다.

6 오늘날의 신채호

그의 역사관은 현재 한국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주어, 국사책에도 그의 연구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아와 비아의 투쟁이란 말은 각종 역사 관련 시험2015 수능과 2016 연대논술, 참고로 생물이다에서 가장 유명한 말 중에 하나다.

그러나 현대에 여러번 지적되듯이 사관이 지나치게 편협, 교조적인 성격을 가졌고 자금 부족과 사료획득의 한계로 연구가 부실했던 사례도 많으며 그가 사료로 쓴 도서나 금석문 같은 것이 현대에 와서 존재하지 않거나[18] 잘못 판독한 경우가 꽤나 있어서(대표적인 것이 삼조선설) 그의 주장은 후대의 연구성과에 의해 상당수 사장되었다.[19] 하지만 사론(史論), 그리고 구한말부터 항일투쟁시대까지의 민족사학의 정신은 높이 평가받아, 사학사(史學史) 쪽에서는 상당한 비중으로 다뤄지며 존경받는다. 애초에 그 시대는 지금처럼 전산으로 사료들이 데이터베이스 되고 여러 연구가 대규모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상황은 커녕 일제의 탄압에 대놓고 연구를 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니, 신채호란 인물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과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채호의 연구결과 자체를 절대시하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는 유사역사학이라는 소리를 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일 것이고. 이는 모든 과거의 학자를 바라볼 때 비슷하게 적용되는 사실이다.

그가 워낙 독보적인, 그리고 대표적인 민족사학자이자 항쟁가였기 때문에 후대의 인물들은 현대의 역사관 논란을 타파하기 위해 그의 주장을 차용하는 것이 많다. 주로 재야에서, 심지어 몇몇은 틀린 것으로 밝혀진 것들을...

일례로 쥬신이라는 이름은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비롯된 떡밥(그는 '주신'을 이야기했고, 쥬신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그 후 어느 만화가가 만든 것이다.). 환빠들은 하필이면 특히 현재 검증되어 버려진 학설들을 들고 와서 "신채호 선생도 맞다고 한 학설임. 니들이 감히 신채호 선생님 까나요 이 매국노들아?" 식으로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을 몰아붙인다.

"그러면 진서나 위서나 남제서에는 어찌하여 이를 빼버렸는가? 지나 사관(史官)이 매양 국치(國恥)를 꺼려 숨기는 괴상한 버릇이 있어……오직 양서나 송서의 '백제가 요서를 공략해서 차지하였다.'고 한 구절은 그 기록이 너무 간단하고 사실이 너무 소략하므로, 당태종이 우연히 주의하지 못하여 그 문자가 그대로 유전된 것일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백제 본기에는 이런 일을 빼었는가? 이는 신라가 백제를 미워하여 이를 뺏을 것이고, 또는 후세에 사대주의가 성행하여 무릇 조선이 지나를 친 사실은 겨우 이미 지나사에 보인 것만을 뽑아다 기록하고 그 나머지는 다 빼버린 때문이다." ─ 조선상고사, 신채호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로 단재를 욕먹이는 일이다. 누가 자신의 글 중 틀린 것을 들고가서 자신을 팔면서 이게 맞다고 벅벅 우기는 장면을 연상해보자. 아마 단재가 되살아난다면 그 성격에 도끼들고 쫓아가서 찍어버릴 듯.[20]

더더군다나 환빠들 중 단재의 주장 일부분만 따서 자기들 주장이 맞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체 글을 보면 그에 대해 보완하는 설명도 많이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세조 분서설. 세조가 고대 역사사를 태워 지금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떡밥인데 신채호 주장 전체를 보면 세조가 태운 것은 주로 역술서 같은 책들로 역사서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신채호 주장은 당시 문화 등을 알 수 있는 역술서 등을 태워 그것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한 것인데 환빠들은 이를 왜곡 이용하고 있다.[21]

하지만 반대로 이런 환빠들의 특성 때문에 역으로 환빠에 비판적인 사람들의 최대 무기가 되기도 하는데, 신채호는 천부경 등을 대차게 까기도 했기 때문.[22] 환빠들은 신채호를 그들의 선생으로 추앙하지만 사실 단재 신채호가 지금 살아있었다면 친일파만큼이나 이것들을 혐오했을것이다.

분명 신채호는 존경받을 만한 독립운동가고 사학자이기에 환빠들이 신채호를 방패삼아 밀고 오면 조심스러워지는 역사학자도 있지만(사실 잘못 건드리면 환빠들이 더 날뛰는 탓도 있다.), 신채호는 상당히 비판을 많이 받은 학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대놓고 까는 사람도 제법 있다. 단재 사학의 독단성, 교조주의적인 면모는 학계에서도 비판적으로 다루어지며, 특히 두세 번씩 본인의 추측만을 거친 이두 해석법은 정말 평이 좋지 않다('머리' - '수밀이' - '수메르' 드립을 쳤던 환빠들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대개는 그와 당시 시대의 환경을 감안해[23] 적어도 신채호가 역사에 대한 열정만큼은 인정받는 편이고, 환빠들과 신채호를 동일 선상에 세우려는 사람은 없다. 밥 굶어가면서도 책 한 권에 목말라했던 역사학자와 밥 먹고 하는 짓이 정신승리밖에 없는 잉여인간을 같이 비교한다면 말이나 되랴.

1962년 이미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일제의 호적등록을 거부한 탓에 일제의 호적법을 계승한 대한민국 국적법상 무국적자로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2009년 4월 14일 그가 일찌감치 탈퇴한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기념해서 겨우 국적을 회복하게 되었다.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는데, 신채호 본인은 이 말을 한 적이 없다.[24]

덤으로 2015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B형 지문으로 단재 신채호의 사상[25]이 나와 국어 B형을 응시한 고등학생들의 머리를 터트렸다.그리고 그 문제에 멘붕한 수험생 일부는 신채호 안티카페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독립운동가도 나쁜놈 취급하게 하는 수능

사실상 신채호의 역사관은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힘의 논리를 중시하는, 당시의 역학관계에 영향을 받고 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주장했던 자주에 대한 열망은 결국 힘이 받춰져야 가능한 것이었다. 조선인의 지배는 이전 왕조들, 특히 서경천도 운동에서 힘을 숭상하고 자주를 외쳤던 세력이 패배하고 사대주의자가 승리했기 때문에 이후 왕조들이 사대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민족은 망국의 슬픔을 겪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현재 조선인들이 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시간적 흐름 속에서 고민했던 역사학자였다.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러한 논리 속에서 현재 그의 역사적 해석, 특히 조선시대에 대한 해석은 비판을 받고 있다. 신채호가 강조한 자주로는 조선시대가 사대주의에 점철된 국가였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26]

최근에는 신채호가 조선의 중화사상에 대해 극렬히 비판한 점을 지적하면서 조선의 중화는 문명이었고 이것이 단순한 사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밝히는 작업들이 진행 중이고 어느 정도 성과가 드러나고 있다.[27] 그의 주장이 현재 들어서 비판을 받고 있지만 신채호는 대한민국 사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고 근대 이후 민족주의 역사학자로서 큰 성과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신채호는 독립운동을 역사학과 결부지으면서 그 사상적 기반을 다진 중요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친일파 따위가 쓴 소설 가지고 정신승리하는 환빠들에게 추앙받는 것 자체가 모독이다

  1. 하지만 말년에는 민족주의에서 탈피해 아나키스트작인 성향을 보였다
  2. 대한국 건국원년이다.
  3.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다시피 외교권을 박탈당한 해.
  4. 오해를 풀기 위해서 언급하지만, 종교적 체제 강화에 주도했다고는 하지만 대종교는 그 어떤 종교단체보다도 무장 독립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단적으로 청산리 전투의 북로군정서가 대종교의 지원을 받아서 만들어진다. 다만 역사학계에도 한 자리 걸치고 있는 김교헌의 책들이 역사서인지 종교서적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쓰여진 것처럼, 을사오적 암살단 조직해서 직접 총 들고 뛰어다닌 나철 시기 보다는 종교적 성향이 강해졌다는 이야기다.
  5. 3.1 운동의 진정한 의미중 하나가 민중의 재발견이다. 영웅과 초인의 등장을 바라던 지식인들이 이전에는 선도해야할 대상으로 취급하던 민중에 시선을 돌리는 계기가 바로 3.1운동이었다. 이는 뒤이어 일어난 중국의 5.4 운동에 따라 중국 지식인들이 시각을 교정한 것과도 일치한다). 이후 민중을 독립운동의 동반자로 보느냐 아니면 여전히 교화의 대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지식인들의 행적은 확연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6. 이때 독립신문을 박은식이 주도했으니, 초기 근대사학의 대표자 2명이 언론을 통한 정치논쟁키배을 벌인 셈이다.
  7. 신채호는 기본적으로 무장 투쟁은 긍정적으로 봤지만, 당시의 상황하에서는 독립군 활동으로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8. 영연방식의 자치독립론도 반대하는 내용이다. 오오.
  9. 〈조선상고사〉는 1948년 출간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조선사〉라는 이름으로 통사를 목표로 연재했으나 연재가 백제의 멸망에서 끊겼기에 이와 같은 이름을 얻었다.
  10. 아와 비아의 투쟁은 아나키즘이 사회를 인식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책세상에서 펴낸 조세현 씨의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를 참고할 것.
  11. 원래 주체와 객체(대상)와의 투쟁, 또는 주체와 세계와의 투쟁이라는 관점은 이미 피히테, 셸링를 비롯해 헤겔 이전의 독일 역사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독일의 민족주의 역사철학에서 등장한다. 따라서 아와 비와의 투쟁은 관점에 따라 18세기 초 독일 민족주의 역사철학의 한국판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인데, 이렇게 타국에서 빌려온 민족주의 역사철학의 지적 기원은 신채호만이 아니라 민족주의 사학에서도 거의 지적되고 있지 않다. 근데 뭐 애초에 민족이라는 개념이 고유의 개념인가?
  12. 하지만 묘청도 비판했다. 너무 성급하게 추진해 묘청의 난은 실패했고 고려의 역사관은 사대주의에 머물렀기 때문에...
  13. 그냥 어조사만 고친 정도인데도 이렇다! 사장이 사과하러 찾아와도 그냥 '돈만 아는 사장놈이 어디서 감히...'라는 태도로 그대로 내쫓았다고.
  14. 다만 이는 일종의 과장이란 이야기가 있다. 마당에서 세수를 하려는데 마침 일본인이 지나가기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것.
  15. 실제로 단재는 이런 말을 실천했다. 독립에 필요하다고 한다면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이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극단적인 주의 주장도 넘나들었다. 명분이야 뭘 내세우든 어떻냐 나라만 독립시키면 그만이지. 놀랍도록 같은 문구 같은 구조인데 배경이 이렇게 차이가 날 수가 있나
  16. 출처는 신채호 본인이 저술한 낭객의 신년만필.
  17. 이전에는 이 이야기 예수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원래 본문에는 없다. 다만 예수쟁이의 경우는 오히려 개신교가 한국에서 변태적으로 로컬라이징 된 결과라고 봐야 한다. 세계 주류 신학적 관점에서 보다면, 한국 개신교가 무척 특이한 것이다. 그리고 주류 신학이 이단드립을 듣는 한국 개신교 신학의 현실
  18. 예를 들어 조선상고사 후반부는 거의 그 책의 해설본이라고 할 만큼 조선상고사에서 자주 나오는 책으로 '해상잡록'이라는 것이 있는데, 교차 검증도 전혀 되지 않고 현재 전하지도 않는다. 역사학자 대부분의 추측은 신채호가 당시 범람하던 가짜 민족주의 사서에 낚였다는 것.
  19. 민족주의가 지나쳐서 본인이 잘 알지도 못하는 부분에까지 왜곡을 한 경우도 존재한다. 조선상고사에서 택견이 일본 유술의 원류가 되었다고 적었는데 한국무술계에 이상한 사이비 무술 가져다 놓고 고대로부터 전해왔느니 하는 식으로 역사팔아먹는 사람이 꽤 있는지라 무술인 중에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20. 이부분은 백제의 요서경략설에 대해서 다룬 부분인데, 이에 대한 기록이 남조의 사서에만 나오고 북조의 사서에는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신채호가 추측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내용은 해당항목을 봐도 알 수 있지만 현대까지 학계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는 대목이고, 왜 기록이 없는가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진행되고 있다. 위서의 경우에는 집필진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손댄 부분이 많고, 당태종 연간에 지어진 북제서 같은 경우도 당태종이 직접 편찬에 참여하는 등 편파성을 강화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즉, 위중국휘치라는 부분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가능한데, 저 대목에서의 위사나 당태종은 쉴드 쳐주기 어려울 정도로 전근대부터 꾸준히 비판을 받았다. 저 대목에 대한 진짜 비판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것.
  21. 애초에 이들에게 정확한 근거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이들은 단재의 이름과 권위가 필요한 것이지 그의 저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재가 하지도 않았던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지어낼 수 있을까? 환빠들의 거란 한민족 떡밥 - 고통받는 단재.
  22. 역사를 연구하려면 사적 재료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지라. 고물이 산같이 쌓였을지라도 고물에 대한 학식이 없으면 일본의 寛永通寶(관영통보)가 箕子(기자)의 유물도 되며, 십만책의 藏書婁(장서루) 속에서 坐臥(좌와)할지라도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후인 위조의 《천부경》 등도 단군왕검의 성언이 되는 것이다.(조선사연구초)
  23. 당시 상황이 교차검증이니 뭐니가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이 인정받기 때문이다. 신채호의 대척점으로 훨씬 안정적 상황에서 연구했던 실증사학의 이병도 역시 '지명의 한자가 뜻이 비슷하기 때문에'라는 식으로 지역 비정한 예가 수도 없다. 발음을 통한 연원연구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발음의 해석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삼청동이 三淸洞으로 표기한다면 세 가지 맑은 것들이 있는 동이라고 하는 것인데 세 가지 맑은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혹은 저 삼청동의 한자가 진짜 본래 의미가 맞기는 하냐 같은 문제가 생긴다.
  24. 누가 먼저 한 말인지는 알 수 없다. 영어권에서는 비슷한 맥락의 명언이 윈스턴 처칠이 했다는 루머로 널리 알려져 있다.
  25. 위쪽에도 나왔던 아와 비아의 투쟁.
  26. 같은 시기 안확은 조선시대를 근대 사회정치이론에 빗대어 실증적 연구를 진행했고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음을 밝혀냈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다. 현재 그의 연구는 조선시대를 사회정치이론에 끼워맞추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결국 1960~70년대 이후로 조선시대사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조선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지금까지도 이루어지고 있다.
  27. 다만 아직까지 고등학교 교과서 등에는 반영이 되지 않았다. 학부생이나 대학원생들도 사상사는 상당히 어려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