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석

1 군인

1931년 혹은 1937년 ~ 1960년 4월 28일 [1]

제1공화국의 부통령 이기붕박마리아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승만의 말년에 양자로 입적된 사람.

이승만 대통령은 영부인인 프란체스카 도너이전에 자식을 둔 적이 있었지만 아들은 죽었고 프란체스카여사와는 자식이 없었다고 한다. 이기붕과 이승만은 같은 전주 이씨였고 같은 당의 정치가로서 친분이 생기게 되며 이승만이 83세 생일이 될 무렵 양자로 입적됐다. 이승만의 양자이자 부통령 이기붕의 아들이었으니 이강석의 권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빽으로 서울대학교 법대에 입학하였으나 학생들의 반발이 거세 중퇴하고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하였다고 한다.

어느 청년이 이강석을 사칭한 사건인 가짜 이강석 사건을 들을 수 있다.

1960년 이기붕이 부정 선거를 주도하다가 이승만대통령까지 하야하게 된 4.19 혁명이 끝나갈 무렵인 4월 28일, 친아버지이기붕, 친어머니 박마리아, 동생 이강욱 등 전 가족을 총으로 쏴 죽인 뒤 자살하였다.

여러모로 권력의 단맛만 보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로써, 당시 이강석이 시내에서 헌병을 구타하고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많았음에도 보도 한 번 안 되었다고 한다. 가짜 이강석 사건으로 법정 공판이 열렸을 때는 이승만 정권에 진저리를 내던 대중의 지대한 관심으로 법정 안에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들어차서, 의자가 부서지고 판사옷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의 권력을 조롱한 피의자 강성병의 진술에 방청석이 환호했다는 후문.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를 생각나게하는 최후로서, 권력을 잃은 자의 최후는 한결같다는 교훈을 떠올리게 한다.

2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이강석(스피드 스케이팅) 문서로.

3 돈의 화신에서 등장하는 인물

이차돈 항목 참조.
  1. 이동 1960년 4월 29일자 동아일보의 이기붕일가 자살 기사에는 이강석의 당시나이를 24세로 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