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 도너

대한민국 역대 영부인
1~3대 프란체스카 도너4대 공덕귀

Syngman_Rhee_and_Franziska_Donner_in_1933.jpg

오른쪽 인물이다. 왼쪽은 그녀의 남편 이승만

Francesca Donner Rhee[1]
1900년 6월 15일 ~ 1992년 3월 19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아내.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오스트리아 사업가의 딸로 태어났다. 1920년 독일의 자동차경주 선수 헬무트 뵈룅과 결혼하였으나 3년만에 이혼하였다. 이승만이나 프란체스카나 모두 재혼이었다. 1931년 이승만이 빈 회의에 참석했을 때,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합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알게 되었고, 결국 25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이어 이승만과 함께 미국에서 살다가, 광복 후 대한민국으로 가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하며 첫 번째 대통령 부인이 되었다. 외국 혈통의 대통령 부인이라고 하여 화제를 모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와 혼동해서 그녀를 호주댁이라고 불렀다. 그 덕분에 6.25 전쟁 당시 UN군 전투기는 영부인 친정에서 지원 보내줬다면서 F-86 세이버, F-80 슈팅스타 등을 통틀어 호주기라고들 불렀다. 참고로 오스트리아는 전투기 지원한 적이 없지만[2] 호주, 그러니까 오스트레일리아에선 지원을 왔다. 글로스터 미티어가 그것.

전쟁 중 손수 각종 사무업무를 처리하며 이승만을 헌신적으로 내조했으나 고령인 남편의 신변을 지나치게 우려한 나머지 이승만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모든 인물과 정보를 차단하는 과잉내조로 이승만의 정치적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다. 사실 한국어를 잘 못했으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반드시 영어로 말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는 박마리아와의 유착관계를 형성하여, 그녀의 남편 이기붕이 이승만의 최측근이 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본인이 외국 사람이고, 이승만이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했으니 가정사에서 상당히 진보적일 것 같지만 목격자들에 의하면 가정사는 거의 조선시대 급이었다고 한다. 즉 이승만은 왕처럼 집안일에 매우 고압적이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직 순종한다는 것. 사실 두 사람의 성장하고 결혼할 당시의 사회상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미국이나 유럽이라고 마냥 진보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유럽 모두 한국처럼 가부장적이고 엄격한 집안이 많았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등 게르만 문화권은 유럽에서도 상당히 가부장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의 경우 십대 후반까지 유교 교육을 받았고 자신에게 왕족의 피가 흐르는 것[3]을 강하게 인식하며 자라 제왕적, 가부장적 사고가 평생을 관통한 사람이었다.[4] [5]

언어차이로 의사소통이 어려웠던지 프란체스카 여사가 어떤 성격이나 성향을 가졌는지 알려주는 대목이 거의 없다. 일화로 이승만에게 명절선물로 특산물이 많이 들어왔는데 부부가 먹지도 못할 정도의 양이라 남들이 다시 선물로 남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으나 그냥 보관하다 모두 상해서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서양식 사고방식으로 내껀 내꺼 이런 마인드가 강했던지, 아니면 한국의 나누어 먹는 인심을 몰랐던지)
정장 단벌에 30년 넘게 쓴 양산, 유일하게 잘 말하는 한국어가 '쪼금쪼금'이었다는 일화을 보면 그냥 구두쇠 기질이 강했던 것 같다.

이승만이 물러나면서 하와이로 가자 따라갔고, 이승만 사후에는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가 1970년 한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만년에도 노태우 대통령 등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를 방문하기도 하는 등 한국 최초의 퍼스트레이디로 예우 받았다. 한국명은 이부란이다. 한국에 귀화한 뒤에는 정식 이름이 되었다.

이승만과의 슬하에는 자식이 없다. 프란체스카 도너와는 혈연관계가 없는(이승만과 첫 부인 박씨 사이에서 태어남) 이승만의 친아들 이봉수가 있으며 이은수, 이기붕의 아들인 이강석, 이인수 모두 양자이다. 이봉수는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갔다가 병사했으며(10살 무렵), 이은수는 1949년 파양되었고(이승만의 첫 부인 박씨가 (이혼 후) 입적했었다고 한다.), 이강석은 1957년 입적되었으나 1960년 이승만 체제의 몰락(4.19 혁명) 직후 본가인 이기붕 일가를 죽이고 자살했다. 이인수씨는 이승만이 4.19 혁명 이후 하와이에서 만년을 보낼 때 입적한 양자로 2016년 현재 살아있다.

자동차생활 잡지 1983~4년호[6]에서는 프란체스카 여사와 그 며느리가 같이 기사에 나왔는데 이승만 대통령 생전 당시 직접 운전(!)하였으며 사후에는 며느리와 같이 장을 보기도 하였다고.
  1. 본명은 Franziska Donner이다.
  2. 오스트리아는 2차 대전 패전 후 영세중립국이 되는 조건으로 독립을 되찾았기 때문에 파병 자체를 할 수 없었다.
  3.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인데, 해외에서는 스스로를 한국의 왕자(prince of Korea)라고 했다고 한다.
  4. 이 때문에 개인의 능력과 별개로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법 전공한 박사라곤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민주주의 대한 이해가 부족한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그리고 조선시대 왕으로 생각하고 바라보면 그 행보가 보다 쉽게 이해된다.) 정치하며 맘에 안 드는 단체나 기관이 있으면 타협이나 설득 대신 때려 부셔버리기 일쑤였다. 전제군주제 국가인 조선에서 태어나 30년 이상을 보낸 유학자 출신이고, 1차 세계대전 종전까지만 해도 세계적으로도 민주국가가 얼마 없었으니 시대적인 배경을 감안할 필요도 있기는 하다.
  5. 이런 현상은 제3세계 독재자중에서도 흔한 현상이다. 짐바브웨의 독재자인 로버트 무가베만 하더라도 영국에서 석사까지 받은 인텔리이다... 한국의 재벌들도 대부분 미국 유학을 하지만 실제 경제감각이나 기업운영은 후진국의 기업의 행태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참고로 북한 김정은도 해외유학 출신.
  6. 정확히는 2013~4년호에서 30년전 기사와 광고를 다시 보여주던 것. 정확히 기억이 안나니 추가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