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붕

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전 · 현직 정치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치적 · 이념적으로 민감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어 문서를 열람할 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한 문서의 악의적 서술 · 편집은 민사 · 형사 상 소송이 발생할 여지가 있습니다.
역대 대한민국 국회의장
2대 1~2기
신익희
3대 1기 ~ 4대 1기
이기붕
4대 2기
곽상훈
역대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2대 신성모3대 이기붕4대 신태영
역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장
128px-Seal_of_Seoul.svg.png
2대 윤보선3~4대 이기붕5대 김태선

李起鵬
(1897년 1월 22일 ~ 1960년 4월 28일[1])

1 개요

"은 갖고 놀라고 준 게 아니라, 쏘라고 준 겁니다." 결국 지 아들이 쐈지?
- 3.15 부정선거로 인한 마산시위가 터진 이후 경찰의 발포에 대한 견해를 묻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망언."[2]


제1공화국 시절의 정치인. 호는 만송(晚松)이다.

2 생애

2.1 청년기

1897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산리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무녀독남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3] 여의고 과부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어려운 환경에서 선교사의 도움으로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연희전문학교를 다녔으나 중퇴한다. 일본을 거쳐 도미하여 아이오와 주 데이버 대학 문학과를 졸업했다. 미국에서 대한국민회 회장으로 있던 이승만을 만났고, 허정과 함께 삼일신문을 발간하였는데 이 때부터 이승만과 인연을 가지게 되었다.

유학시절 신민회 집회에서 박마리아를 만나 1931년 약혼했다가 박마리아의 귀국으로 약혼이 취소되었지만, 1935년 이기붕이 귀국하면서 다시 재회하여 결혼했다. 귀국 후 이기붕은 북촌 일대에서 가회상회를 운영했지만 실패했고, 중추원 참의 최남이 경영하던 종로 국일관[4] 지배인을 지냈다. 이 무렵 세 아들인 강희, 강석, 강욱을 두었다. 다방 <종로>를 경영하기도 했고, 건축청부업사무소 등 이것저것 잡다한 일을 거쳐 일제 말기엔 허정과 함께 광산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채 8.15 광복을 맞았다.

2.2 정계진출

이렇게 하는 일마다 잘 안 되던 잉여로운 사람이었는데,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의 개인 비서가 된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의 아내 박마리아가 출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이승만 주변에 붙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특히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가 당시 여성 정치인 임영신[5][6]과 불화가 있었던 틈을 타[7][8] 박마리아는[9]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프란체스카 여사와 친분을 다져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지위로나 별 볼일 없었던 남편을 정계에 들이는데 성공했다.

이 덕분에 이기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고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사실,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던 때의 이기붕은 의외로 꽤 청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뭐라고요? 한강다리를 끊고 후퇴를 할 때는 "서울시장이 된 책임으로 남겠다."라고 주장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만약에, 여기서 책임을 지고 서울에 남았다가 인민군에게 죽었다면, 역사교과서에서는 당연히 좌우익을 막론하고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간신배가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을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영구까임방지권으로 인정하는 위인으로 실렸을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10] 그나마 지나가는 말로 시민들에게 사과한 사실도 있으니 어떻게 보면 누구보다 나은 점도 있을지도 모른다. 사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만

2.3 2인자 등극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사임한 신성모[11]의 후임으로 국방장관에 취임하여 2인자로 등극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주동자들을 공개처형하는 강수까지 두면서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서 인기를 끌었다. 아무튼 여기까지는 당시의 혼탁한 정계 상황을 감안해서 뭐 그렇다 쳐도 이제부터는 정치깡패 이정재를 영입하고 사사오입 개헌에 앞장서는 등 무리수가 많아지기 시작한다.

자기 아들 이강석을 후사가 없었던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다졌다. 당시 법에는 장자는 다른 집 양자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이걸 어기고 양자로 입적시켰다고 한다. 더군다나 양녕대군파인 이승만과 효령대군파인 이기붕간의 관계는 문중에서도 장자 넣기가 좀 곤란한 것도 있었다. 세간에서는 아들 팔아 출세한다고 깠다. 그런데 이기붕 입장에서도 가장 똘똘해 보였던 이강석을 내주기 싫어서 둘째 주면 안 되냐고 했다가 이승만이 이강석 아니면 싫다고 해서 이강석이 양자로 넘어간다.

2.4 부통령이 되고야 말겠다!

하지만 이렇게 잘나가던 이기붕에게도 시련(?)이 있었으니 바로 1956년 정, 부통령 선거. 이기붕은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장면에게 밀려 미끄러지고 말았다. 낙선한 이유는 이기붕의 스펙이 떨어진 것도 있었으나[12] 당시 국민들이 자유당 정부에 염증을 느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조차 승리를 장담 못할 상황이었으나 민주당 후보였던 신익희가 유세 도중 급사하는 바람에 무난히 당선된 것이었다. 신익희에 비해 훨씬 인지도가 낮았던 대통령 후보 조봉암조차 대선에서 30%가 넘는 지지율을 받았을 정도였다.[13] 그 후 이기붕은 장면을 제거해야겠다면서 장면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참조.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도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으나 후계구도를 명확히 하겠다고 3.15 부정선거라는 최악의 병크를 터뜨린다. 이번에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두달여를 앞두고 급사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의 재선은 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당시 매우 고령이라(한국 나이로 86세) 대통령직을 무난히 마칠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통령은 대통령직 승계가 예약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고, 이 부통령 자리에 당선되기 위해 부정선거를 감행한 것.

상황이 매우 나빠지자 4월 22일 국무회의에서는 이기붕을 사퇴시키기로 합의했고 국방장관 김정렬, 법무장관 홍진기[14]에게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4월 19일 성난 군중이 자신의 집으로 몰려온 것을 본 이기붕은 겁을 먹고 서대문의 저택을 빠져나와[15] 포천시대한민국 육군 제6군단사령부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이미 스스로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식사는 못해서 미 육군이 준 주스로 연명했으며 말도 박마리아가 옆에서 알아듣게 설명해줘야 겨우 알아들었다고 한다. 김정렬 장관의 연락을 받고 서대문의 집으로 돌아간 이기붕은 김정렬 장관으로부터 부통령 당선자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기붕은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졌고 잠시 후에 난 그럴 재목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잘되었단 말을 했다. 그럴거면 왜 부정선거를 하셨나

김정렬 장관은 중앙청으로 가서 이기붕의 사퇴 수락 소식을 전했고 한갑수를 시켜 사퇴 성명을 쓰기 시작했다. 한편 이기붕은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에게 부통령 당선자 자리에서 사퇴를 하겠다는 의사를 전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고 김정렬 국방장관이 설득하고 나서야 겨우 동의했다. 하지만 다음날의 신문기사엔 이기붕 사퇴가 아니라 이기붕 사퇴 고려란 기사가 실렸다. 국무위원들은 김정렬 장관에게 항의했고 확인 결과 자유당 강경파들의 반발로 사퇴 성명서가 사퇴 고려 성명서로 후퇴한 것이 드러났다. 이는 결과적으로 자충수였다. 여론이 들끓자 다음날에 이기붕은 직접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이란 의사를 발표했다. 하지만 4월 25일에 이기붕의 집은 기어이 파괴되었고 이기붕은 다시 6군단사령부로 달아났다가 경무대 별관 36호실로 옮겼다.

2.5 최후

결국 4.19 혁명이 일어난 지 9일째 되던 4월 28일 새벽 5시, 당시 육군 소위였던 장남 이강석이 가족들을 모조리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살했다. 참으로 비참한 최후였다. 이기붕 사망 당시 나이 만 63세. 공교롭게도 같은날 아침 미국 대사 맥카나기는 이기붕 내외의 망명 신청이 수락되었다는 미국 정부의 뜻을 전달한 상태였다.

이강석이 어떤 심정으로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가족들 전부가 같이 죽기로 합의하고 죽은 것이란 말도 있다. 하지만 훗날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강석의 시신엔 머리와 가슴에 총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머리에 한발 가슴에 한발 쏘았다는 말이므로 타살론이 나왔다. 타살론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였던 곽영주가 이기붕 일가를 살해해 국민여론을 달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막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 다음날 하야한데다가 이기붕 일가를 죽인다고 해서 국민여론이 단번에 돌아설 리도 없는데다가 애당초 타살론 자체가 무풍지대에서 이환경이 지어낸 썰인지라...[16]

거기에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일전에 사는게 힘들다고 자살 기도를 여러 번 했다고 하며 그로 인해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이미 자살한 상태였고, 이강석이 권총 두 자루를 준비하여 머리와 가슴에 각각 대고 쏘았다고 본다. 한 자루의 총만 사용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데, 이는 사실 종종 있는 일이다. 로베스피에르의 경우에도 권총으로 자살하려다가 죽지 않고 턱뼈만 날아가고 말았고, 그 상태에서 정적들에게 체포되어 응급처치를 받고 단두대로 보내져 목이 잘렸듯이 권총자살은 의외로 실패 확률이 높다.

3 평가

201308220500002_1.jpg
제1공화국이기붕 일가. 왼쪽부터 장남 이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차남 이강욱.

3.15 부정선거 및 이승만의 양자 관련으로 한국 권력 2인자를 굳히면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가 무너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자이자 대한민국 정치인 사상 최악의 인물로 손꼽히는 자…이지만 욕은 이승만이 거의 다 먹는 듯하다. 지금은 이승만이 욕을 다 먹고 있지만 부정선거 이후 사회 분위기는 이기붕이 부정선거 책임자로 욕먹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시민들은 이승만이 독재자이긴 해도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민 대표를 보내 정중하게 면담을 요청했고, 이승만도 당시 나이가 워낙 많아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고 더 버티는 게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는지 하야를 선택했다.[17]

물론, 2인자인 이기붕의 입지는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존립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1인자인 이승만의 책임은 부인할 수 없다. 어쨌거나 현재의 평가로서는 이승만도 논란의 대상이지만 이 사람은 뭐라할 것도 없이 간신 취급을 받으며 이승만 옹호자들에게도 미움받는다. 아예 이승만이 하야하거나 부정선거에 얽힌 것도 죄다 이기붕 탓이라고 책자로 비난하고 이기붕만 없었더라면 이승만이 비참하게 해외에서 객사하지 않았을테고 평가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단체도 있으니 말다했다.

이렇듯 이승만을 옹호하는 보수 쪽에서 이기붕 탓으로 돌리며 이승만을 필사적으로 옹호하지만 그 반대로 이승만을 비난하는 쪽에선 그러한 간신배 이기붕을 오냐오냐하고 차기 권력자를 물려주려고 한 것만 봐도 이승만도 다를 게 없었다고 깐다. 이승만 정도 되는 정치인이 그 긴 집권기간동안 휘하 인물됨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리고 이건 박정희와 2인자 차지철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즉 양쪽에서 차지철이나 이기붕이나 신나게 비난을 듣고 있다. 즉 한 쪽은 최고 권력자를 옹호하기 위한 악역으로서 희생양(?), 한쪽은 그 권력자의 2인자로서 그놈이 그놈이라는 평.

4 창작물에서의 이기붕

4.1 TV 드라마

공화국 시리즈에서는 박규채가 담당했다. 병약했던 모습이 부각되었으며 항상 느긋한 모습을 유지하지만 박마리아가 지나치게 나대면 계집년이 너무 나선다면서 다그치는 권위주의적인 모습도 보인다. 조병옥과는 사석에서 친구처럼 말놓고 지내며 서로 내각책임제 막후협상을 벌이는 모습도 연출되었다. 3.15 마산 항쟁이 발생했을때에는 상황 파악 못하고 기자들 앞에서 "총은 쏘라고 준거지 가지고 놀라고 준게 아니다." 라는 실제로 했던 발언을 그대로 표현했다.

결국, 4.19 혁명이 발발하자 앓아누운 상태에서 업혀서 제6군단으로 피신하고 그 와중에서도 권력에 대한 미련을 못버려 깔끔하게 사퇴를 하지 않고 사퇴 고려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해서 민중의 분노를 더 극대화시켰다. 이승만이 하야 결심을 하자 6군단에서도 더 머무르지 못하고 경무대로 왔고 결국 아들 이강석에 의해 가족이 집단자살한다. 이 모습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이강석이 이기붕 일가가 머무르는 건물로 들어가고 잠시후 총성이 5발 울리는 것으로 간접 표현하였다. 이기붕 일가의 죽음이 곽영주에 의한 것이라는 가설 자체는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이기붕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곽영주가 이기붕 일가가 경무대로 왔다는 말을 듣고 "이것들 차라리 집단자살 해줬으면 좋겠네...' 라는 식으로 한마디 내뱉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드라마 무풍지대(드라마)에서는 권성덕[18] 야인시대에서는 이인철[19]이 맡았다. 두 드라마의 작가가 이환경으로 같아 드라마내의 이기붕의 모습은 비슷하다. 느긋한 모습으로 나오는 공화국 시리즈와는 달리 꽤나 다혈질스러운 모습을 자주 보여 대조를 이룬다. 이승만이 흑화되기 전에는 평범한 비서1 역할로 나오나, 정치계에서 파워를 얻으면서 점점 비중이 높아진다. 야인시대에서는 본인 역시 권력욕이 있긴 하지만 아내가 그 이상으로 권력욕이 높은지라 자주 바가지(...)를 긁히는 장면이 나오고 일도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아 속병으로 고생하는 안습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틈만 나면 앓아눕는 장면에, '날 좀 내버려둬요' 하고 절규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며 기어이 낙선까지 하자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까지(...).

그러나, 4.19 혁명 이후 아내가 '그 동안 당신을 너무 못살게 군 것 같다'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리며 사과할 때 "그런 말 마시오. 그래도 당신은 내 아내요" 하고 보듬었고, 이어 이강석이 권총을 겨누자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이내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오냐, 쏴라" 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풍모를 보인다. 드라마는 드라마로 받아들이자 야인시대에서 이기붕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강한 남자로 묘사된 장면. 결국 이강석이 권총으로 가족들을 모두 쏘고 마지막으로 자신도 자살하는 것으로 묘사했으나, 썰 풀기 좋아하는 작가의 취향(...)에 맞게 나레이션을 통해 "이기붕 일가의 죽음이 곽영주가 주도한 타살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며, 이는 앞으로 역사가들의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5 기타

4.19 혁명 직전 "민족의 해와 달"이라는 책이 출간되어 이승만을 민족의 해, 이기붕을 민족의 달로 찬양하였다.# 흠좀무. 출판업계까지 권력에 순종하였다는 증거인데, 책이 나온지 1년만에 혁명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 그야말로 권력무상이다.

박마리아의 서적도 꽤나 충격적이라는데. 이 서적을 신촌 헌책방에서 본 마광수 교수의 에세이에 보면 "누가 이 글만 알고 박마리아가 나쁜 사람인지 생각할수 있는가!"라고 한탄했다. 네이버 지식인 같은 곳을 보면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와 혼동하는 글도 발견되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니 주의할것. 김마리아박마리아의 공통점은 세례명과 여성 교육운동가라는 점 뿐이다.

이승만의 정치분석 서적 일본 내막기의 번역에도 이기붕과 박마리아가 관여했다. 이 책인 Japan Insideout은 2차대전 전에 미국에서 영어로 출간되었다. 책을 번역 의뢰받은 분은 기껏 번역했더니 박마리아가 중간에 가져와서 최덕신 번역으로 먼저 책을 만들어 이승만에게 선물했다…나중에 이 책은 동일한 번역자의 손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내막이라는 제목으로 80년대 재출간된다. 당시에도 이승만의 이미지가 생각보다 안 좋아서인지 영향으로 원저자인 이승만의 이름은 작게 표시되어 있다. 그래도 이름 빌린게 아닌게 어디야.

이기붕이 이승만 정권때 부정축재한 자금은 4.19 혁명 이후 환수되어 공항대로를 건설하는데 쓰였다. 또한 이기붕의 저택은 개발살난 뒤 그 자리에 4.19 혁명기념 도서관이 세워졌다.
  1. 생일을 음력으로 따지면 1896년 12월 20일이다. 그래서 생몰년도를 1896-1960으로 표기한 자료도 많다. 하지만 그레고리오력으로 계산하면 1897년생이다.
  2. 3.15 부정선거로 인한 마산시위가 터진 이후 경찰의 발포에 대한 견해를 묻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망언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저 발언이 보도되자 시위 규모가 몇 배로 커졌다. 더불어 이 말은 당시 최인규(현재의 안전행정부 장관에 해당하는 내무부 장관이었고 경찰은 내무부 장관 소속이다)가 한 말이라고도 알려지기도 했다. 참고로 이 사람은 나중에 사형당했기에 이기붕도 살아있었다면 5.16 이후 정치깡패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를 비롯한 일당과 최인규 및 자유당 여러 정치인들을 사형시킨 박정희 군부에서 처형했을 가능성이 크다.
  3. 그의 회고에 의하면 할아버지도 20세에 사망하고 아버지 마저 오래 산다는게 30세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4. 당시 아내 박마리아가 현재의 이화여대인 이화여전 교수였기 때문에, 여학교 교수 남편이 요정운영한다고 말이 엄청났고 심지어 기사화도 되었다.
  5. 중앙대학교 설립자, 초대 이사장 겸 총장. 초대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지냈으며(따라서 최초의 여성 장관이기도 하다.) 이후 대한여자국민당을 조직해서 부통령 선거에도 출마하였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중대생 앞에서 "내가 부통령 선거에 떨어져서 학생들이 데모한다고 사람들이 욕할 수 있다. 데모하지 마라"라는 자뻑성 연설을 한 적도 있다. 실제 이승만에게 팽당한 이후론 정치적 영향력은 전혀 없었고, 부통령 선거 결과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더불어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 활동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다.
  6. 한국전 당시 북한의 선전물이나 민족과 운명같은 북한 시대극(?)에서는 이승만의 처 "에리쓰"로 묘사된다.
  7. 임영신이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이 워낙 강해서 돈암장을 들락날락거리자 임영신과 이승만이 불륜관계라고 소문났는데, 그게 해외에 있었던 프란체스카의 귀에 들어가서 급히 귀국하고 임영신의 돈암장 출입을 금지시켰다.(…)
  8. 프란체스카를 만나기 전 이승만은 캘리포니아대 유학중이던 임영신에게 한때 청혼했었다. 그리고 차였다. 보통 국외에서 외국인과 결혼한 독립운동가들이 귀국시에 처를 버리고 오는 일이 많아서, 임영신이 돈암장에 들락거린 게 문제가 되었던 것.
  9. 사실 박마리아는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김활란(이화여전), 임영신, 모윤숙, 노천명, 박순천 등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라는 친일단체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전국을 돌면서 황국신민, 내선일체를 외치면서 정신대 모집과 국방헌금 헌납 등의 활동을 하였다.
  10. 이 때는 아마 자신이 중추원 참의 최남이 경영한 국일관 지배인으로 일했던 경력이라거나, 아내 박마리아의 지대한 친일 경력들이 문제가 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박마리아는 아내일 뿐 자신이 아니고 자신은 그렇게 큰 친일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백선엽 보다 오히려 옹호하기 좋았을 것이다.
  11. 얘는 나중에 일본으로 쫓겨간다.
  12. 사실 이기붕은 마누라가 구축한 인맥으로 출세했을 뿐, 유학까지 다녀왔음에도 박사 하나도 못 땄다고 까였다. 당시에 정계에서 리더로 인정받으려면 유학을 가고 영어를 가고 박사호 붙어야 하는 분위기였는데 이기붕은 민주당 신파 리더이고 법학박사까지 한 장면보다 스펙이 한참 떨어졌다. 일제하 미국 유학파들이 그렇듯이 일본의 주구가 되지 않으면 버로우 타는 이유도 있어서 그랬다.
  13. 조봉암은 훗날 간첩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당한다. 자세한 것은 진보당 사건 항목 참고.
  14.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의 아버지. 친일파이기도 하다.
  15. 이때 이기붕의 저택에서 수박을 발견한 군중들은 더욱 거세게 들고 일어났다는 소문이있다.
  16. 무풍지대 이전에도 이기붕 일가 동반자살 직후부터 타살설은 야사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17. 사실 하야때는 나이가 무려 85(!)나 됐다. 이런 상태에서 또한 의학도 그 당시에는 부실한 상태였는데 그나마 이승만보다 젊은 이기붕이라면 모를까, 그렇게 나이가 엄청나게 높은 이승만이 정권을 꼭 잡겠다고 생각을 해야했는지도 의문이지만 권력욕이 무엇인지 사퇴를 한다고 하고서도 그것을 취소하고 계속 남아있으려고 했으며 하와이로 도망갈 떄도 길어도 2달을 넘기지 않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들 아시는 대로 살아서는 한국 땅을 다시는 밟지 못하고 1965년 7월 하와이에서 죽었다. (사실 1962년에 돌아오려고 시도는 했지만 정부에서 막았다.)
  18. 야인시대에서는 이승만 역으로 나온다.
  19. 무풍지대에서 김영삼 역으로 나온다. 실제로 이 배우는 외모가 대통령이 된 90년대 당시의 김영삼과 매우 닮았지만, 이승만 정권 시절 김영삼은 20대의 청년이었기 때문에 성우 겸 배우인 정명준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