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대 영의정 | ||||||
이서 | ← | 이거이 | → | 성석린 |
李居易
(1348~1412)
고려 말 참찬문하부사를 역임했고, 조선 건국 후 우산기상시, 평안도병마도절제사, 참지문하부사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이후 왕자의 난에 개입해 정사공신에 이름을 올렸으며,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에 올랐다.
아들 이저는 태조의 딸인 경신공주와 결혼했으며, 또 다른 아들인 이백강은 태종의 장녀인 정순공주와 결혼했다.
실록을 살펴 보면 정말 많은 탄핵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용케 살아남는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왕실과의 혼인 관계와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신이라는 점이 작용했던 것 같다. 탄핵된 내용을 보면 살려둔 게 용한 수준...
먼저 정종 때 사병 혁파 정책이 시행되자 사병을 내놓지 않고 버티다가 사병 혁파를 주장한 사람들을 가리켜 "한 두 놈이 한 덩어리 고기와 같다."라고 불평하였다. 사실 대간에서는 이거이가 왕실과 인척 관계이기에 조영무 등만 탄핵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이거이의 저 언행에 어지간히 빡쳤는지 정종이 받아주지 않았음에도 계속 상소를 올려 이거이의 처벌을 청했다. 이후 임금이 이거이 부자를 불러 탄핵의 내용과 같은 말을 했는지 묻자 "안 그랬어요 ㅠㅠㅠ."라고 답해 이를 불쌍하게 여긴 임금이 계림부윤으로 좌천시키고 적당히 봐 주었다.
이후 태종 때 또 한 건이 터졌는데 조영무에게 "야 우리 요즘 잘 나가는데 앞으로 계속 잘 나갈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지금 왕 아들들이 왕 되면 우리 밀려날 것 같으니까 걔네 쓸어버리고 호락호락한 상왕 앉힐까?"라고 한 것. 이건 그냥 대놓고 역모짓이다. 탄핵을 받은 후 태종이 이거이와 조영무를 불러 "이거 진짜임?"이라고 묻자 이거이는 또 "두 아들이 부마이고 저도 과분한 자리에 있는데 어찌 그랬겠어요. 조영무 너 왜 나 모함하나 ㅠㅠ."라는 변명을 하였다. 하지만 태종이 이거이는 공신이니 봐주겠다는[1] 강력한 의지를 천명해 고향인 진주(진천)으로 유배를 갔다가 태종 12년인 1412년 고향에서 죽었다.[2]
용의 눈물에서는 강재일이 연기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룬 정도전에서는 비중이 가벼운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오기는 커녕 언급조차 되지않는다. 짧은 화수와 제작비 문제때문인듯.[3]- ↑ 공신이니 봐주겠다는 것도 있지만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언질도 약간의 영향이 있어보인다. 태종실록을 보면 아들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 태조와 만나서 '이거이 부자가 이런저런 혐의가 있어서 죽음으로 다스릴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태조에게 말을 하는데 왕위에서 물러난데다가 조사의의 난 이후 남은 권력마저도 모두 사라져 뒷방 늙은이가 된 태조가 '내가 무슨 힘이 있어 니맘대로 혀'가 아니라 '야, 그래도 사돈지간에 너 도와서 같이 일했던 공신 아니냐? 그래도 목숨만은 살려줘라'라고 언질을 한다. 무인정사 주역으로 자기 자식들과 총애하던 신하들을 도륙낸 사돈양반인데도 말이다.
- ↑ 박시백 화백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진짜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며 실제로는 조영무와 태종이 꾸민 음모론이라는 데 무게를 두었다... 정황상 의심스러운 점이 있긴 하다. 일단 공론화된 것이 태종이 이화 등 측근을 불러 '옛날에 조영무가 이거이가 이런 말을 했다고 말하더라. 이때까지 묻어두긴 했는데 이거이와 조영무 둘다 늙어가고 있어 두명 중 한사람이 죽으면 진실이 묻히지 않겠냐' 라고 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제보받으면 바로 밝혀내던가 영원히 덮어두던가 하는 게 정상적이다. 이거이의 후일 행적에서 의심스러운 것이 없었다는 점에다가(즉, 역모를 꾀할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태종의 측근이기도 한 조영무에게 하기에는 너무 막나가는 말인데다가 애초에 이 말을 했다면 역모인데 태종이 살려둘 리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 ↑ 사실 정도전에서는 생략된 사람이 꽤 많다. 이성계의 이복동생이자 이방원의 숙부인 의안대군 이화, 이성계의 형 완풍대군 이원계와 그의 차남 이천우, 조온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