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무

1 고려조선 초의 인물

趙英茂
(1338 ~ 1414)

일개 군졸에서 일국의 정승이 된 사내.
호는 퇴촌(退村). 시호는 충무(忠武).

원래는 이성계의 가병 중 하나였으나 그의 무예를 눈여겨 본 이성계가 그를 키워준 덕에 크게 활약했고 이성계의 심복으로 활약하다가 1392년에 이방원의 명을 받고 조영규 등과 함께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였으며, 이성계를 추대하고 조선의 개국에 참여해 조선의 개국 공신 3등에 책록되고 한산백이 되었으며, 이후 관제 개정으로 한산군에 봉해졌다.

조선 개국 이후부터는 정도전에게 불만을 품고 이방원의 심복이 되었는데, 제1차 왕자의 난 당시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1등에 봉해졌다. 그 후 박포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을 이방원에게 알려 박포가 죽주에 유배되게 한다.

그 후 1402년 회안대군 이방간이 박포의 충동질에 넘어가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 1등에 봉해진다. 이후 태종이 사병 혁파를 실시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무기를 가지러 온 군관을 폭행해 잠시 동안 황주에 유배되기도 했다.[1]

이후 다시 복직해 높은 벼슬을 누리다가 우정승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가 추천한 무관이 "일을 엉망으로 한다"는 명분으로 관찰사 심온에게 파직당했고, 사헌부가 이를 탄핵함에 따라 그에게 또한 불똥이 튀었다.[2][3] 조영무는 사직을 청했지만, 태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병을 이유로 다시 사직한 뒤 조용히 경기도 광주로 내려갔고 그 곳에서 1414년에 숨을 거두었다.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은 그의 호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정종 시절까지만해도 사병혁파에 반발해 군관을 폭행할 정도로 괄괄한 면이 있었으나 한차례 귀양을 간 이후로는 함부로 적을 만들지 않는 신중하게 처신했다.[4] 태종의 공신 중 상당수가 토사구팽의 희생양이 되어 민씨 형제는 목숨을 내놓고 가문이 몰락했으며 이숙번과 이거이 부자는 목숨은 건졌으나 정치적 생명은 끝난 반면 조영무는 이런 처신 덕분에 정종때 잠시 내쳐진 것을 제외하면 일생토록 영화를 누렸다. 사실 정종 때 내쳐진 것은, 태조가 세자인 태종 이방원에게 "조영무와 조온과 이무는 날 배신한 놈들인데, 나중에 너라고 배신을 안할것 같냐? 종사를 생각하면 쫓아내라"며 쫒아낼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것도 조영무가 무고하다며 대간들이 상소를 올려서 곧 복직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역시 태종의 공신으로 조영무와 함께 정승 반열에 올랐으며 영화를 누린 하륜은 조영무와 비교하면 성격이나 처신이 완전히 반대였다는 점이다. 하륜은 능력과는 별개로 탐욕스런 인물이었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당장에 목이 날아갔을 법한 실수도 여러번 저질렀으며[5] 정적들이 많았다. 하지만 조영무는 매사 신중하고 공직생활도 깔끔한 편이었다.[6] 실록에서 그의 졸기를 쓴 사관도 "소박하고 공정하고 바른 말을 잘했다"며 칭찬할 정도.[7]

바둑과 관련해 흑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조영무가 영승추부사일 당시 아래 직급이던 상호군 권희달이 총제 이밀과 내기 바둑을 두고 있는 상황이었고 조영무가 이것을 보다가 옆에서 훈수를 둔 것(...). 이것 때문에 시비가 붙자 아래 직급의 반항에 노한 조영무는 이밀의 종리(從吏)를 가두고 권희달에게 베 100필을 징수했는데, 이쯤 되자 이것을 부당하다고 여긴 권희달이 조영무와 말싸움을 하다가 관대를 풀어 조영무 앞에 던져버리고 조영무의 집무실에 들어가 욕설을 퍼붓고 깽판을 친 것(...). 이에 태종도 크게 노해서 조영무를 꾸짖고 권희달을 파면시켰다고 한다. 이 일화는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코믹하게 각색되어 등장한다. 함부로 두는 거 아니다.[8]

이름과 행적이 비슷한 조영규와 헷갈리거나 친척 관계로 아는 경우가 많지만, 본관부터가 다른 사람이다. 조영무는 영흥 조씨. 조영규는 신창 조씨이다.

조영무 이후에 최윤덕이 두번째로 무관출신 정승이 되는데 최윤덕을 정승에 앉히기 몇년 전 세종대왕은 김종서에게 초기에 무관 출신으로 정승을 지낸자가 있다는데 '어찌 윤덕보다 훌륭한 자이겠는가?'라고 말했는데 아마 조영무를 가리킨 듯하다. 그러면서 세종은 "하륜이 정무를 처리할 때 조영무가 이렇다 할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며, "최윤덕도 무인 출신이라 학문이 부족해 조영무처럼 의견을 말하지 않을까봐 우려된다"는 아쉬움을 덧붙이기도 했다. [9][10]


참고로 조영무의 넷째 아들 조윤은 아버지 조영무가 사망한 뒤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부친상 중 기생과 동침을 했다"는 죄로 탄핵당했다. 그러자 태종은 "아비를 배신한 놈이니 아비의 음덕을 베풀 수는 없다"며, 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조윤은 장 100대를 맞는다.[11] 조윤은 4년 후 "저는 그런 적 없다"며 등문고(신문고)까지 쳐가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세종은 "그때 뭘 했다가 이제 와서 억울하다고 함부로 등문고까지 치고 난리냐"고 조윤을 또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자 상왕이 된 태종은 세종에게 "쟤 아빠 봐서 좀 봐달라"고 말했고, 세종은 "등문고를 함부로 친 것을 처벌해야 되지만 네 아비 봐서 봐준다"고 조윤을 용서했다. [12] 참고로 용의 눈물에서 신문고 제도를 설명하는 장면 중 신문고를 시험삼아 치며 신문고를 찬양하던 사람이 바로 조영무라는 점에서 세종이 "함부로 신문고를 쳤다"며 아들 조윤을 처벌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실제로 신문고가 설치된 날 태종이 하륜·이무와 신문고에 대해 이야기하던 자리에 조영무도 함께 있었다.[13]

2 사극에서의 모습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그린 드라마에서 작게나마 반드시 등장하곤 한다. 용의 눈물에서의 행적은 조영무(용의 눈물)을 참고.

정도전에서도 등장하는데, 여기선 분량이 작은 관계로 간간히 지나치는 형식으로만 얼굴을 드러낸다. 그나마도 제1차 왕자의 난과 태종의 즉위로 이야기가 끝나 그 후의 생애는 그려지지 않았다. 이는 이 드라마의 영향을 어느정도 받은 SBS 퓨전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마찬가지. 조영규는 고려때 진즉 정3품까지 올라갔던 인물이고 조영무는 이성계의 병졸, 평민출신이었단걸 고려하면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의 포지션은 조영무쪽에 가야 고증에 맞는다.

3 조영무의 족보 문제

정종실록 제5권에 미천한 번상군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는 조영무의 졸기(신하가 졸할시에 작성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본관, 부친, 행적, 아들 이름들이 기록되어있다)에는 그의 아버지와 본관 모두가 기록되지 않았으며 다만 조영무의 아들 조서의 졸기에는 한양인으로 기록하였다. 하지만 30년전 조서가 제출한 첫 과거시험 단자에는 영흥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결국 개관하였다는 증거이다.

그러니 영흥조씨의 시조인 조영무의 후손들이 주장하는 할아버지 조순후와 아버지 조세진은 모두 가공인물들로 이는 한양조씨 세대에 맞추느라고 2~4세조를 만든것이다.

또한 1799년 조영무의 11세손 조원국이 발간한 영흥조씨의 최초 족보에는 조서와 조질의 본적은 영흥인으로 기록되어있다.

즉 시조 중서공 조지수와 시조 충무공 조영무의 한양조씨는 동성동본이족이다.

시조 충무공 조영무의 한양조씨 후손들은 고려중엽부터 시작된 한양조씨의 시조 중서공 조지수의 후손이라고 억지를 부리지 말아야하며 한양조씨 시조 충무공 조영무로 따로 구별하여 사용한다면 영흥조씨와 한양조씨의 고질적인 종통문제는 깨끗히 해결이 될것이다.
  1. 애초 태조의 은덕으로 출세한 조영무가 태조를 저버리고 이방원측에 가담한 원인이 정도전의 사병 혁파 시도 때문이다. 용의 눈물에서도 이 사건이 재연되었는데, 군관에게 하는 말이 "주군이 내게 그런 명을 내릴리가 없다!". 그러면서 주군의 명을 사칭했다며 군관의 곤장을 손수 쳐버린다.
  2. 《태종실록》 권22 11년 7월 29일 무자 2번째 기사.[1]
  3. 《태종실록》 권22 11년 윤12월 13일 1번째 기사.[2]
  4. 얼마나 신중하냐면 조영무가 물러나고 남재가 정승에 앉았는데 태종이 "남 정승은 매사에 신중하고 과감하지 못하지요."라고 했더니 하륜 왈 "과감하지 못하기로는 조 정승이 더 심했습니다. 신들이 뭐든지 하려고 하면 굳이 말려서 힘들었습니다."하고 했는데 더 압권인건 태종이 "조정승이 고지식한 탓이오"라고 했다.물러나니까 뒷다마 까는 하륜&태종
  5. 민씨 형제들 축출때 망언을 두번이나 하고 이색 비문 사건에도 관련되었고 심지어 선위 소동때에는 "그냥 받아들이자"라고 한적도 있다...
  6. 심지어 뇌물 시비에 한번도 말려들지 않았다. 정승쯤 되면 뇌물 받아먹는건 그 시대에 어찌보면 당연하고 또 왕인 태종 자체가 도덕적인 면에서는 본인도 도덕적이지 않아서일지도 모르지만 관대한걸 감안하면 흠좀무
  7. 사관들은 무관들에 대한 평이 박한데 조영무가 무관출신임을 감안하면 저정도면 꽤 호평이다.
  8. 《태종실록》 권8 4년 9월 23일 신유 1번째 기사. [3]
  9. 《세종실록》 권56 14년 6월 9일 병신 3번째 기사.[4]
  10. 물론 그렇다고 조영무가 마냥 끌려다니듯 공직생활을 한것은 아니다. 실록에 적혀 있듯이 의외로 필요할때는 바른말도 곧잘 하는 편이였고, 태종 재위기 중에 갑사들이 모욕을 받아 사헌부와 격돌했을 때는 갑사들의 편에 서서 원인을 제공한 범인을 처벌해 달라고 강하게 태종에게 간언을 하기도 했다.[5]
  11. 《태종실록》 권28 14년 윤9월 21일 신유 3번째 기사. [6]
  12. 《세종실록》 권2 즉위년 12월 12일 정해 3번째 기사.[7]
  13. 《태종실록》 권2 1년 11월 16일 경자 1번째 기사.[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