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시절.
치바 롯데 마린즈 No.6 | |
이구치 타다히토 (井口資仁) | |
생년월일 | 1974년 12월 4일 |
국적 | 일본 |
포지션 | 내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6년 드래프트 1순위 |
소속팀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7~2004) 시카고 화이트삭스 (2005~2007)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7)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8)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8) 치바 롯데 마린즈 (2009~) |
1 개요
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시절부터 대학 최고의 유격수로 이름을 날렸으며, 1996 애틀란타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은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6년 신인드래프트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1순위 지명을 받으며 프로 무대에 입성한다.
2.2 다이에 시절
프로 첫 해인 1997시즌, 시범경기에서 부상을 당한 이구치는 5월에야 데뷔전을 가졌는데, 첫번째 타석에서 프로 첫 안타를 때려냈고, 3번째 타석에서는 만루홈런을 때리며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데뷔전에서 만루홈런을 기록한 신인 선수가 된다. 하지만 이후 프로의 한계에 부딪치며 .203라는 영 좋지 않은 타율로 시즌을 마감했다. 1998시즌부터 본격적으로 팀의 주전 유격수로 뛰게 되는데, 타율과 출루율은 떨어지지만 일발장타를 앞세워 하위타순의 뇌관 역할을 맡았고 1999년 다이에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에는 어깨 수술을 받으며 시즌을 거의 날려버렸는데, 그 사이에 뛰어난 수비력을 가진 토리고에 유스케가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그 때까지도 내세울 거라고는 어쩌다가 터지는 일발장타 뿐, 타율과 출루율이 너무도 낮아서 「1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대형 유격수」라던 입단당시와의 평가와는 달리 하위타선의 공갈포의 길을 걸으면서 또 한명의 드래프트 1순위 먹튀로 전락하는 듯 했다.
결국 자기의 포지션이던 유격수를 도리고에에게 뺏기고 2001년 시즌부터 포지션을 2루수로 옮기게 된다. 그런데 포지션 변경이 본인에게 전환점이 되었는지 2루수로 자리로 옮긴 이구치는 대오각성하여 .261 30홈런 97타점 44도루(리그 1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며 3번타순에 자리잡았고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면서 입단당시 받았던 대형 내야수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시작한다. 이듬해인 2002년에는 부상의 영향으로 .259 18홈런 53타점 21도루로 다소 주춤하면서 2001년의 활약이 1년 반짝으로 끝나는가 했지만 2003년 .340 27홈런 109타점 42도루(리그 1위)라는 흠좀무한 성적을 거두며 완벽하게 타격에 눈을 뜬 모습을 보였고, 당시 역대 최강이었던 다이에 타선을 상징하는 100타점 4인방의 일각을 차지하며 다시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를 싹쓸이했다. 2004년에도 .333 24홈런 89타점 18도루로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며 또다시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 그리고 시즌이 끝난 뒤 이구치는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했고,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2년 470만 달러에 계약을 맺는다.
메이저리그 진출과정에서 잡음이 좀 있었는데 원래는 해외진출 자격이 없었지만 구단과의 이면계약으로 옵션을 충족하면 해외진출을 허용하는 조건이 계약서에 들어있었다. 호크스 팬들은 삽질하고 성적 나쁠 때 참고 기다려줬는데 이제 좀 쓸만해지려고 하니까 돌연 해외진출을 선언하면서 뒤통수를 쳤다면서 배신감을 느꼈다는 팬들도 있덨다고 한다.
2.3 메이저리그 시절
2005시즌 이구치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뛰게 된다. 포지션은 유격수였나 그나마 안정감이 더 있는 후안 유리베와 키스톤 콤비를 이루고 본인은 2루로 정착한 후 2번타자로 전향 뒤 한편 스캇 포세드닉과 함께 준수한 테이블 세터로 활약했고, 데뷔 첫 해에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손에 넣는 감격을 누린다. 시즌 성적은 .278 15홈런 71타점 15도루 OPS .780으로, 아메리칸리그 신인왕 투표 4위에 오르기도 했다.[1]
2006시즌에도 .281 18홈런 67타점으로 꾸준한 모습을 보였으나, 2007시즌에는 부상이 겹치며 지난 2년보다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고 있던 도중 체이스 어틀리의 부상으로 2루수 자리에 공백이 생긴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된다. 2007시즌 통합 성적은 .267 9홈런 43타점.
이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1년 계약을 맺었는데, 2008시즌 중반 주루 도중 어깨 부상을 당하며 메이저리그 입성 후 최초로 부상자 명단에 오르게 된다. 부상에서 돌아온 이후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며 결국 9월 초에 팀에서 방출되었고, 그 해 9월 5일 다시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계약을 맺으며 4경기를 뛰었다. 입단 시기가 늦은 바람에 포스트시즌 엔트리에는 포함되지 못했으나, 필리스가 그 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어쨌든 두번째 우승 반지를 손에 넣게 된다.
주전 3루수였던 페드로 펠리즈의 활약에 만족하지 못했던 필리스는 이구치와 재계약을 한 뒤 3루수로 쓰려 했으나, 2루 자리에 애착이 강했던 이구치는 치바 롯데 마린즈와 3년 계약을 맺으며 일본 무대로 돌아가게 된다. 강정호 이전까지 아시아 타자 중 포수 조지마 겐지(포수 18개)를 제외한 메이저 내야수 첫 해 진출 단일 최다 홈런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2015년 9월 10일 강정호가 신시내티 레즈전에서 만루홈런을 쳐내며 기어이 공동 2위로 올라왔다
2.4 치바 롯데 시절
NPB 복귀 첫 해 .281 19홈런 65타점 OPS .866으로 건재를 과시한 이구치는 2010년에는 .294 17홈런 103타점으로 맹활약하며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견인했다.
공인구의 영향으로 리그 전체가 투신타병이 되어버린 2011년과 2012년에는 각각 9홈런, 11홈런에 머물렀지만, 포지션을 1루수로 옮긴 2013년에는 .297 23홈런 83타점 OPS .902로 다시 부활했다. 특히 이 해 7월 26일 라쿠텐 골든이글스 전에서 다나카 마사히로를 상대로 홈런을 때려내며 미일 통산 2000안타 기록을 달성한다.
2014시즌에는 손가락 부상이 겹치며 .238 10홈런 49타점이라는 다소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3 기타
- NPB 시절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매우 강한 모습을 보였다.(타율 .365 3홈런) 다만 메이저리그 무대에서는 2타수 무안타 1볼넷을 기록했다.
- 애틀란타 올림픽 출전 당시 쿠바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고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꾸게 되었다고 한다.
- 현역 일본프로야구의 야수 중에서 최고령이 되었다. 퍼시픽리그 내국인 선수 중에서도 최고령이며, 양대리그의 투수를 포함해도 3번째로 나이가 많다. 그의 위로는 이와세 히토키가 있다.
- ↑ 이 해 AL 신인왕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마무리 투수 휴스턴 스트리트가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