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6번째 올림픽이자 마지막 레이스.
1 개요
동계 올림픽 한정 무관의 제왕
대한민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영원한 레전드. 혁구 예능인 블랙넛닮았다
성공과 실패, 좌절과 도전의 연속이었던 그의 폭풍 감동 일대기. (인터랙티브 페이지. 크롬에서 잘 보인다.)
대한민국의 前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1978년 2월 8일(음력)생. 이상화, 모태범, 이승훈 같은 스타들이 나오기 시작한 2010년대 이전까지 국내에선 쇼트트랙에 비해 아웃 오브 안중 취급을 받았던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을 20년 가까이 떠받쳤던 선수이다.
중학생 시절부터 성인부의 김윤만, 제갈성렬 등 쟁쟁한 선배들과 대등, 또는 그 이상의 실력을 보이며 '차세대 유망주'로 불렸고, 1997년 1000m, 2001년 1500m 세계기록 수립을 비롯해 세계선수권 4회 우승, 올림픽 6회 참가로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전설이 된다.
세계 최정상급의 스프린터였으며 세계선수권을 비롯한 각종 대회에서 메달을 쓸어담았으나 오직 올림픽 메달만이 없어 비운의 선수라는 말을 들었다.
스피드 스케이팅의 종주국 네덜란드에서도 존경받는 세계구급 레전드지만 20년이 넘는 국가대표 활약 내내 올림픽 메달이 없어 상대적으로 국내에서 저평가 받아왔다. 그러나 2010년 밴쿠버 올림픽부터 그간의 활약과 불운, 포기를 모르는 도전이 조명받으면서 '국민 스케이터', '무관의 황제', '노메달의 영웅'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규혁 본인은 처음에는 부끄러웠으나 지금은 노메달 선수도 인정받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 같다고 감사한 수식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한국 선수 중에선 유일하게 20년 이상 국가대표로 활동한 선수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을 끝으로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하였다.
2 선수 생활
피겨 코치인 어머니의 뱃 속에서부터 얼음판을 지친 진짜 '모태 스케이터'. 4살부터 취미 수준으로 얼음을 타다가 초등학교 4학년 시절 교내 롤러스케이트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자타공인 '빙상 신동'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2살 터울 동생 이규현 씨도 스피드 스케이터였으나 형에게 밀려 콩 피겨로 전향.
중학생 때인 1992년에 처음으로 국가대표로서 주니어 대회에 출전했고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도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1996/97 시즌부터 시니어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1997년 12월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1000m에서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였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성적은 500m 8위, 1000m 13위. 2000/01 시즌에는 월드컵에서 한 차례 우승하고 세계선수권에서도 메달은 따지 못했으나 상위권의 성적을 내었다. 이런 성적을 바탕으로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유력한 메달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성적은 500m 5위, 1000m·1500m 8위로 노메달. 이후 2005년까지 깊은 슬럼프를 겪게 된다. 이 시기에 낸 가장 좋은 성적은 2003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2관왕이 된 것.
2005/06 시즌부터 부활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 다시 도전하였으나 1000m에서 3위와 0.05초 차이로 4위를 차지한다. 당시 이강석이 500m에서 동메달을 땄기 때문에 이 일은 사람들에게 별로 부각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이규혁은 이후 올림픽에서는 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 이 기록이 이규혁의 올림픽 도전사에서 최고의 기록이 되었다.
절치부심한 이규혁은 2007년부터 선수 생활의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에서 2007~2008, 2010~2011 각각 2연패를 하며 통산 4회 우승의 금자탑을 달성한다. 스피드 스케이팅의 레전드 선수들인 에릭 하이든, 제러미 워더스푼, 이고리 젤레좁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록이며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다.[1] [2]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참가할 때의 그는 32세로 은퇴를 고려하고 있을 때라 올림픽을 앞둔 인터뷰 등에서 마지막으로 참가하는 올림픽일 거라고 말했다. 세계랭킹도 높았던 만큼 유력한 우승 후보였지만 이규혁은 500m 15위, 1000m 9위를 기록하며 후배 모태범이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옆에서 응원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력한 우승 후보였고 당시 모태범과 이상화가 인터뷰에서 훈련 당시 그가 전수해준 노하우 등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에게 주목을 받았고 그에 대한 게 알려지면서 '무관의 챔피언' 이라 불렸다.
사실 30대 이상의 소규모 종목 현역 선수들의 경우는 후배들의 지도까지 담당하는 코치 겸 선수가 많다. 이규혁이 그런 케이스인데 현재 남녀 스피드스케이팅 메달리스트들은 이런 식으로 지도받은 적이 많았다. 다만 밴쿠버 동계올림픽 때 자신의 후배들이 승승장구할 때 축하해주면서도 정작 본인은 메달이 없어서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하며 주변에서 아무리 위로를 해줘도 마음이 우울했었다고 고백했다. 이때 했던 인터뷰가 "안되는걸 알면서도 계속 도전한다는게 너무 슬펐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2011년 때 성적이 좋아서인지 그는 예정을 바꿔 은퇴 시기를 뒤로 미뤘고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도 도전을 하게 된다. 올림픽 6회 연속 출전이며 하계와 동계를 통틀어 대한민국 스포츠 선수 중 최다 출전 기록이다. 사실 이미 예전보다 세계 랭킹이 많이 떨어져서 메달권과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팬들은 그에게 마지막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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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그의 현역 마지막 레이스인 1000m 경기가 끝난 직후의 사진).
500m 18위, 1000m 21위의 성적으로 그의 6번째이자 아름다운 마지막 도전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3 수상 성적
-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
금 2007 하마르 종합
금 2008 헤렌벤 종합
금 2010 오비히로 종합
금 2011 헤렌벤 종합
은 2012 캘거리 종합
- 세계 종목별 선수권
금 2011 인젤 500m
은 2008 나가노 500m
은 2009 리치먼드 500m
동 2007 솔트레이크시티 1000m
- 동계 아시안 게임
금 2003 아오모리 1000m
금 2003 아오모리 1500m
금 2007 창춘 1000m
금 2007 창춘 1500m
은 1999 강원 1000m
은 2007 창춘 500m
은 2011 아스타나-알마티 팀추월
동 2011 아스타나-알마티 1500m
4 기타
그의 아버지 이익환 씨는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출신으로 1968 그르노블 동계올림픽에 참가하였으며 어머니 이인숙 씨는 피겨 스케이팅 선수 출신으로 현재 전국스케이팅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동생 이규현 씨도 피겨 스케이트 국가대표 출신으로 피겨 코치로 일하고 있다. 온 가족이 빙상 국가대표 출신인 빙상 명문가다.
빙상계는 물론 연예계 인맥도 상당하다. 싸이가 그에게 무대를 헌정하기도 했다. 김연아의 키스 앤 크라이에도 출연했고, 과연 현역 스케이터 답게 피겨 스케이팅에도 빨리 적응해서 준수한 스케이팅 스킬을 보여줬다. 은퇴한 후 가끔 예능 프로에 출연하고 있다.
현역 시절 빙상 강국인 네덜란드에서 매우 좋은 경기를 펼쳐 현지에서의 인지도도 높은 편. 소치 올림픽 남자 500m 금메달리스트인 네덜란드의 미첼 뮐데르 선수가 올림픽 공식 선수 프로필에서 자신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이규혁 선수를 꼽았고 # 소치 올림픽 때 네덜란드 중계 방송에도 깜짝 출연했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이상화, 이정수와 같이 출연하였으나 최하위에 그쳤다.- ↑ 이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스프린트 선수권은 올림픽처럼 부문별로 메달을 주는 것이 아니라 500m의 기록과 1000m의 기록을 합산해 성적 우수자 세 명에게만 메달을 수여한다. 이런 빡빡한 기준에 세계 유수의 선수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4번 1위를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마지막 2011년 우승 때는 밴쿠버 동계올림픽 이후 체력 문제로 은퇴를 고려하던 가운데 따낸 금메달, 그리고 2012 시즌에는 당당히 은메달을 따냈다.
- ↑ 그런데 이걸 뒤집으면 그 어떤 종목에서도 최상위권은 아니라는 말도 된다. 애초 스프린터 선수권 자체가 어느 한 종목 최상위권이고 다른 종목이 상대적으로 쳐지는 선수보다 두 종목에서 고루고루 상위권인 선수가 유리한 대회이다. 그런데 올림픽에서는 어느 한 종목에 특화된 것이 더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걸 증명하는 것이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