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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동계올림픽 (Citius, Altius, Fortius) | ||||
18회 | → | 19회 | → | 20회 |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 → |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 → |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
XIX Olympic Winter Games | ||
대회기간 | 2002년 2월 8일 ~ 2월 24일[1] | |
개최국가/도시 | 미국/유타 솔트레이크시티 | |
대회 이념 | Light The Fire Within (내면의 불꽃을 지피세) | |
공식 주제가 | (추가바람) | |
마스코트 | Powder, Copper & Coal | |
참가국 | 78개국 | |
참가선수 | 2,399명 (남자: 1,513명, 여자: 886명) | |
경기종목 | 15개 종목, 78개 세부 종목 | |
개회 선언자 | 조지 W. 부시 | |
선수 선서 | 지미 시어 | |
심판 선서 | 알렌 철치 | |
성화 점화 | 1980년 아이스하키 선수단[2] 마이크 에루지온 | |
주경기장 | 라이스-에클레스 스타디움 |
1980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 대회 이후 22년만에 미국이 개최한 제19회 동계올림픽. 그리고 미국은, 이 대회를 끝으로 동하계 불문하고 모든 올림픽 유치전에서 광탈(…)을 당할 정도로 악영향을 끼쳤다. 그 정도로 온갖 논란이 많은 대회이며, 근대 올림픽 역사상 가장 막장인 대회를 꼽으라면 단연 톱을 다투는 대회. 우리나라에서도 오노가 김동성에게 헐리우드 액션을 한 올림픽으로 유명하다.
1 유치과정
1995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IOC 총회, 즉 1998 동계올림픽 유치전에서 최종투표 끝에 고배를 마신 솔트레이크시티는 이번에야 말로 유치하겠다는 각오로 전력을 다했다. 경쟁후보로는 스웨덴의 외스테르순드, 스위스의 시옹, 캐나다의 퀘벡이 있었으며 이 셋 후보 중에서 스위스가 가장 경쟁력이 없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의 쟁쟁한 경합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잊었겠지만 스웨덴의 6수였다..
이에 미국은 지난 대회에서 아쉽게 떨어진 솔트레이크시티에 기회를 달라는 동정론과 함께 천조국의 돈GR(…)을 유감없이 발휘했는데, 영향력이 큰 일부 IOC 위원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며 표를 다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였다. 여기에 뇌물로 안통하는 위원들에게는 가족들에게 미국 영주권이 제공되는 일자리를 알선(…)하여 환심을 샀다. 대표적인게 한국의 김운용 당시 IOC 위원. 차기 IOC 위원장 후보 중 하나였으나 이 사건이 들통나서 IOC 위원장 선거에서 광탈하고 이후 국제스포츠계에서 사실상 퇴출을 당했다.
결국 투표에서 스웨덴, 스위스가 각 14표, 캐나다가 7표를 얻는데 그친 반면 미국은 54표를 단번에 쓸어담으며 단 1번의 투표로 개최지가 결정되었다. 스웨덴과 스위스의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의 성적 저조도 한 몫 했다.
불과 3년 만인 1998년 미국의 로비 사실이 폭로되었고, 관련된 IOC 위원들이 다 사퇴하거나 한직으로 물러나는 등 대대적인 정화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미국에서도 뇌물을 준 당사자들을 구속하는 대사건이 벌어졌다. 여담이지만 이때 체포된 미국측 인사는 "돈은 줬지만, 뇌물이 아니라 올림픽 비즈니스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또한, 미국의 지나친 올림픽 개최 또한 독선과 독식문제가 대두되기도 하였다. 1976년에는 덴버 동계올림픽을 한다더니 자체 반납을 해버렸고, 바로 4년 뒤인 1980년에는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을 열었으며, 바로 4년 후인 1984년에는 LA 하계올림픽을 열었고, 12년 후인 1996년에는 애틀랜타 하계올림픽을 열었다. 그리고 이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은 6년 만에 미국에서 열렸던 올림픽이었으니, 정말 잦은 올림픽이었다. 그리고 그 벌로 미국은 향후 20년간 올림픽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2015년 미국은 FIFA 비리를 막네 나섰으나 러시아와 카타르에게 2002년 이 올림픽을 돈먹이고 따낸 주제에 누가 할 소리냐? 역으로 까이고 있다.
2 진행상 문제점
2.1 정치적 올림픽
원래는 그럴 생각 전혀 없었지만, 올림픽 개최 몇 달 전에 터진 대형사고 때문에 미국의 애국주의가 대폭발하는 대회가 되었다.
9.11 테러로 열받은 미국은 올림픽에서 자국의 애국주의를 극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며, 올림픽에 정치적인 요소를 팍팍 개입하기 시작을 한 것이다. 원래 올림픽에 정치성이 개입되는 거야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이미 있었지만, 애시당초 나치같은 막장하고 비교가 되는 짓거리를 했다는 의견이 있다.
개막식 중에 미국은 9.11 테러 당시 건물잔해에서 건진 찢어진 성조기를 9.11 당시 구조작업에 나선 소방대원과 경찰들이 게양하는 세리머니를 했다. 이게 슈퍼볼 같은 미국 국내대회였다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올림픽이었다는 것이다. 찢어진 성조기는 사실상 복수에 대한 의지의 천명이자 미국의 단결을 주장하는 것으로,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었다. 거기다 개막식 와중에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이던 미군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 가지가지한다? 올림픽이 미국만의 대회가 아닌 전세계인의 축제인 만큼 자국의 정치적인 의사를 대회에 반영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리고 이 올림픽이 열린지 1년 후인 2003년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의 이라크를 공습하게 된다.
2.2 판정 문제
대표적인 판정 문제가 피겨 스케이팅과 쇼트트랙에서 나왔다.
피겨 스케이팅에서는 심판들이 경기 도중 실수가 있었지만 높은 난이도의 연기를 한 러시아 선수에 금메달을, 난이도는 낮았지만 문제없이 깨끗한 경기를 한 캐나다 선수에 은메달을 주는 사건이 있었다.자세한 내용은 2002 동계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스캔들을 참고할 것.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북미 측의 항의로 채점표를 확인한 결과, 프랑스 심판이 서유럽 출신임에도 유일하게 러시아를 뽑았다는 이유로 편파판정을 했다고 지목된다. 그리고 그 프랑스 심판은 "러시아가 프랑스 빙상연맹에 로비를 벌였고, 프랑스 빙상연맹 회장은 올림픽에 파견간 자국 심판에게 편파판정을 강요했다." 라고 자백한다. 이게 올림픽이야? 동네 체육대회야? 결국 판정이 정정되어 공동금메달(…)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3] 또한, 프랑스 빙상연맹 회장과 판정을 주도한 프랑스 심판은 자격이 정지되었다. 사실 묻혔지만 가장불쌍한건 러시아 페어 선수들이다. 경기 중 실수가 있긴 했지만 충분히 금메달 경합이 가능하고, 못해도 은메달이라는 것이 공론이었는데 모국의 로비때문에 돈으로 금메달 땄다고 까였다.
사건의 열기가 사그라든 후 당시 징계받았던 프랑스 심판은 "당시 자신은 미국, 캐나다 관계자들의 압력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부정판정을 시인했고 자신은 지금도 러시아 팀이 진정한 승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는 요지의 친필 성명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미 주어진 메달을 또 바꿀 수도 없고 이미 사람들의 관심은 여기서 떠났고 엎질러진 물.
이렇듯 강대국들이 올림픽 판정에 깊숙히 관여할 수 있다는 사례가 나오자, ISU는 채점 방식을 익명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리고 12년 후...
쇼트트랙의 편파판정은… 김동성과 아폴로 안톤 오노Oh no!, 제임스 휴이시개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해당 항목에 아주 자세하게 잘 나와있다.
2.3 도핑 문제
약물 복용으로 인한 문제가 유난히 거론되었던 대회여서 약물 올림픽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종전까지 동계올림픽에서 도핑테스트에서 양성반응으로 메달이 취소된 사례는 동메달 한 개 밖에 없었으나, 이 대회에서는 금메달 6개,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가 박탈되고 그 다음 순위를 기록한 선수에게 메달이 넘어갔다. 특히 스페인의 크로스컨트리 선수 요한 뮐레크(Johann Mühlegg)[4]는 금메달 3개를 따며 스페인에 30년만의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준 영웅으로 떠올랐으나 약물 복용 사실이 밝혀지면서 명예를 모두 잃게 되었다. 그외에 러시아의 크로스컨트리 여왕으로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각각 3관왕과 2관왕의 자리에 오른 라리사 라주티나(Larisa Lazutina)와 올가 다닐로바(Olga Danilova)가 금메달을 박탈당했다. 알파인스키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여, 영국에서 최초로 동계올림픽 스키 종목에서 메달을 딴 앨런 백스터(Alain Baxter)도 양성 반응으로 메달을 취소당했다. 이와같이 각국에서 중량감 있는 메달 획득 선수들이 메달을 취소당하면서, 1988 서울 올림픽에서 벤 존슨이 육상 100m에서 금메달을 박탈당한 것 못지않은 약물 파동을 겪었다.
3 기타
- 미국이 개최한 4번째의 동계올림픽인데, 미국 국가 원수인 대통령이 직접 개회선언을 한 것은 최초이다.[5]
- 1948 대회 이후 정식종목에서 제외된 스켈레톤이 이 대회서부터 다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 대회 개최 5개월 전 일어난 9.11 테러로 테러에 대한 우려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태였다. 이에 따라 주최측은 보안에 엄청난 신경을 썼다. 보안비용이 급증한 것은 뻔한 일. 이 대회부터 시작된 보안비용의 급증은 이후 올림픽들의 적자문제 중 하나로 떠오르게 된다.[6]
- 대회 조직위원장은 밋 롬니였다. 2012년 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인 바로 그분.....
- 타이와 홍콩, 카메룬, 네팔, 타지키스탄이 동계올림픽 무대에 데뷔했다.
- 오스트레일리아가 남반구 국가로는 최초로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2개씩이나 획득하는 쾌거를 이룬 대회였다.[7] 쇼트트랙 선수 스티븐 브래드버리는 동계올림픽 역사상 남반구 국가 출신 첫 금메달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 과정은 항목 참조. 뒤이어 프리스타일 스키 선수 앨리사 캠플린이 금메달을 땄다.
- 대한민국에 밀려 쇼트트랙에서 늘 콩라인에 오르던 중화인민공화국이 동계올림픽에서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2개 획득하였다. 반면, 전대회에서 개최국 버프로 금메달을 5개나 땄던 일본은 이 대회에서는 은메달 1개와 동메달 1개에 그쳐 부진했다.
- 대한민국은 1992년, 1994년, 1998년 동계올림픽에 이어 종합순위 10위(이하 금메달 수 기준 메달순위)이내를 목표로 했으나, 남자 쇼트트랙에서 악재가 겹치면서 기대했던 만큼의 메달 획득은 하지 못했다. 또한 스피드스케이팅에서도 메달을 노렸으나, 메달을 따지 못했다. 결국 남자 선수는 메달을 따지 못했고, 여자 선수만 쇼트트랙에서 금메달 2개, 은메달 2개로 종합 14위를 기록, 목표로 했던 종합 10위 이내 달성은 하지 못했다.
- 아폴로 안톤 오노 때문에 묻혀서 그렇지, 당시 한국 스포츠, 특히 동계 스포츠의 외화내빈을 여실히 보여준 대회였다. 재수 옴 붙었다 치부할 수 있는 남자 쇼트트랙은 그렇다손 쳐도, 스피드 스케이팅은 예상외로 부진했다. 이규혁이 한국 신기록을 깨긴 했으나 전 부문에서 5위권 이하로 처졌고[8], 나머지 선수들도 기존 성적에 비해 부진한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상황도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9] 게다가 여자팀은 세계 수준에 많이 떨어져 있었다.[10]
- 후에 영화 국가대표(영화)로 유명해지는 대한민국의 스키점프 대표팀이 단체전에서 8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동계올림픽 출전 사상 스키종목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 약물 복용으로 여러 개의 메달이 취소되고, 그 다음 순위를 기록한 선수에게 메달이 넘어갔는데, 이 작업이 대회가 끝난 후에 진행되면서 메달 최종순위가 대회 직후와 차이가 나게 되었다. 대한민국도 처음에는 종합 15위라 하였으나, 스페인 선수가 획득한 금메달이 모두 취소되면서 순위가 1계단 올라, 최종적으로 종합 14위가 되었다. 본래 독일이 종합 1위라 하였으나,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들의 금메달 취소로 은메달을 땄던 노르웨이 선수들이 금메달을 추가하면서 대회 후에 종합 1위는 노르웨이로 바뀌었다. 종합 1위를 노렸던 미국은 종합 3위[11]를 하였다.
- 1996 애틀랜타 올림픽과 함께 미국이 IOC에서 배척받게 된 원인을 제공하게 된 대회 중 하나다.
- 북한은 이 올림픽에 불참하였기 때문에 2000년 하계올림픽 때 성사되었던 남북동시입장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대신 4년 후 2006년 동계올림픽에서 성사되었다. 그 당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주장했던 바로 그 분이기는 한데, 그 때문에 불참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북한은 이 대회에서 단 한 명만 출전권을 확보했는데, 결국 대회 직전에 선수단 파견을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참가해봐야 실익도 없을 것이니 그냥 포기한듯.... 동계스포츠는 국제대회에 꾸준히 참가해 경기력을 유지해야 올림픽에도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라도 얻을 것인데, 1990년대를 거치면서 극히 악화된 북한의 경제사정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빌 클린턴 행정부 때인 1996년 하계올림픽 때는 공식으로 참가하였다. 사실 하계는 1972년에 참가하기 시작한 뒤로 로스앤젤레스와 서울 대회만 빼고는 빠짐없이 참가했다. 그런데 동계는 중간중간 불참한 대회가 꽤 된다. 하계야 IOC 회원국이면 보이코트 하는 것이 아니면 거의 참가하지만, 동계는 출전권을 얻는 것도 힘들고 규모도 작다보니 참가를 포기하는 국가가 상당히 많다.
- ↑ 현지 시간 기준
- ↑ 레이크플래시드의 기적의 하키 선수단.
- ↑ 12년 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도 여자 알파인 스키 활강부문에서 공동금메달이 나왔는데 이쪽은 첨단 장비로도 두 선수의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어 저런 결과가 나왔다.
- ↑ 독일 선수였는데, 스페인으로 귀화했다
- ↑ 1932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 때는 동계 올림픽이 열린 뉴욕 주지사(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주지사)가, 1960년 스쿼밸리 동계올림픽과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 때는 부통령이 개회선언을 했다.
- ↑ 사실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 이후 1976 몬트리올 올림픽부터 막대한 테러방지비용과 대회 적자는 국제스포츠 대회의 고질병이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의 성공과 냉전종식 이후 국제적인 화해 분위기 그리고 가속화되는 상업화 바람 속에서 '올림픽으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분위기가 되다가 다시 꼬라박기 시작한 것이다.
- ↑ 2014년 동계 올림픽 직전까지도 오스트레일리아 외의 남반구 국가는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따지 못하고 있다. 역대 동계올림픽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외의 남반구 국가 중에는 뉴질랜드가 은메달 한 번 딴 것이 전부일 정도로 남반구 국가들은 동계올림픽에서 거의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 ↑ 그래도 500미터는 5위, 1000미터는 8위를 했다. 500은 배기태와 함께 가장 좋은 성적이었고 1000미터는 김윤만에 이은 두번째 성적
- ↑ 빙질이 너무 좋아 대다수 선수들이 자기 실력 이상 해냈다
- ↑ 여자팀은 이상화의 등장 이전까지 10위권에 드는 것도 어려웠다
- ↑ 미국에서 말하는 총메달 수 기준으로는 종합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