Ири́на Эдуа́рдовна Слу́цкая
Irina Eduardovna Slutskaya
러시아의 전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 선수. 1979년 2월 9일생.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여자 싱글 금메달 은메달리스트.
목차
1 소개
지금까지 여자 싱글 선수가 뛴 가장 어려운 3-3 점프인 트리플 러츠-트리플 룹 점프를 최초로 성공시킨 선수로서, 이러한 기술 능력과 이에 기반한 나름의 예술성을 바탕으로 1990년대 최후반부터 2000년대 전반까지 라이벌 미셸 콴과 함께 여자 싱글의 양강으로 군림했다. 또한 국내 라이벌이었던 마리아 부트르스카야[1]와 함께, 피겨 스케이팅의 다른 종목에서는 이미 초강국의 위상을 갖고 있던 러시아를 여자 싱글에서도 강국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러한 실력을 갖고도 올림픽에서는 석연치 않은 판정과 자신의 실수 등이 겹치며 역시 라이벌인 콴과 마찬가지로 은메달 한 번, 동메달 한 번을 획득하는 데 그쳤다.
1.1 ISU 공인 최고 점수
쇼트 | 70.22 (2005 컵 오브 차이나) |
프리 | 130.48 (2005 컵 오브 러시아) |
합계 | 198.06 (2005 컵 오브 러시아) |
합계 성적은 2014년 유럽 선수권에서 율리아 리프니츠카야와 아델리나 소트니코바가 200점을 돌파하기 전까지 유럽 선수 역대 최고의 성적이었다.
1.2 주요 대회 성적
올림픽 | 은 1, 동 1 |
세계 선수권 | 금 2, 은 3, 동 1 |
유럽 선수권 | 금 7[2], 은 2 |
그랑프리 파이널 | 금 4(3연패 포함)[3], 은 3, 동 2 |
국제 대회 총 31회 우승으로 여자 싱글 선수 최다 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
2 선수 경력
1994년 주니어 세계 선수권 동메달[4], 1995년 주니어 세계 선수권 우승 및 시니어 세계 선수권 7위를 하면서 국제 무대에 등장했다. 이듬해인 1996년 러시아 여자 싱글 선수로는 최초로 유럽 선수권에서 우승하고 챔피언 시리즈 파이널(그랑프리 파이널의 당시 명칭) 2위, 세계 선수권 동메달 등을 기록하며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했다. 그 후에도 1997년 유럽 선수권 2연패, 1998년 세계 선수권 은메달[5] 등의 성적을 올리면서 정상권 선수로의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1998~1999 시즌에는 어머니 병 간호와 자신의 병 때문에 유럽 선수권과 세계 선수권 출전을 하지 못하면서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2.1 미셸 콴과의 라이벌 관계의 시작
이 정도의 경력을 갖고 있던 이리나의 위상을 확 바꿔놓는 계기가 된 경기가 1999년 그랑프리 파이널이었다. 이 해와 이 다음 해의 그랑프리 파이널에는 수퍼 파이널이라는 경기 방식이 도입되었는데, 쉽게 말하면 1-2위 선수들끼리의 최종 일대일 경기이다. 다른 대회처럼 쇼트와 프리를 치러 일단 1위부터 6위까지 순위를 결정한 후, 1-2위 선수들이 다른 프로그램으로 프리 경기를 한 번 더 해서 그 경기의 승자가 우승자가 되는 방식이었다(3-4위, 5-6위 선수들도 같은 방식으로 순위 결정전을 치렀다).
이리나는 쇼트 2위, 프리 2위(1위는 모두 미셸 콴)로 이 수퍼 파이널에 진출해 수퍼 파이널에서 여자 싱글 선수 역사상 처음으로 트리플 러츠-트리플 룹 점프를 성공시킨다. 판정 결과 만장일치로 이리나의 승리한다. 그리하여 이 대회는 정상권 선수이긴 했어도 최정상과는 거리가 있었던 선수인 이리나가, 올림픽 금메달만이 없던, 시대의 최강자 미셸 콴의 라이벌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세계 선수권에서는 미셸 콴이 승리하고 이리나가 2위를 했다.
이 다음 시즌인 2000~2001 시즌에서는 이리나의 기세가 더 강해져 수퍼 파이널로 진행된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다시 한 번 미셸 콴을 이긴 것은 물론 유럽 선수권까지, 그 시즌에 출전한 모든 대회를 석권한 상태에서 세계 선수권을 맞았다. 쇼트에서 1위를 차지한 이리나는 프리에서도 여자 싱글 선수 사상 처음으로 트리플 살코-트리플 룹-더블 토룹 점프를 성공시켰으나 역시 처음으로 시도한 트리플 러츠-트리플 룹-더블 토룹 점프의 두 번째 점프에서 스텝아웃을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결국 콴의 구성점 우위를 자신의 기술점 우위로 극복하는 데 실패하면서 다시 한 번 2위에 그쳤다.
이렇게 두 시즌을 치른 후 이리나는 미셸 콴의 완벽한 라이벌이 되었다.
2.2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라이벌 구도가 정립된 상태에서 맞은 올림픽 시즌에서는 막상 이리나와 미셀 콴 둘 다 아주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못하고 다른 선수에게 패배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콴은 그의 오랜 코치였던 프랭크 캐롤과도 결별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리나는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다시 한 번 콴을 격파하고 3연패를 달성했으며 이 시즌에도 계속 콴에게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올림픽은 콴의 홈그라운드인 미국에서 열릴 것이었기 때문에 그 점을 감안하면 승부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 지는 예측 불허였던 상황이다.
그런데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대형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러시아 애들이 프랑스 심판에게 뇌물 먹여서 캐나다의 금메달을 강탈하고 대신 아이스댄스는 프랑스에게 줬다" 는 식의 편향된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그 와중에도 남자 싱글에서 누가 딸 거냐가 문제였지 러시아 선수가 딸 것임엔 틀림없었던 금메달을 가져간 데다, 아이스댄싱 금메달 조의 여자 선수도 러시아에서 귀화한 선수였다. 말하자면 나쁜 짓을 해놓고도 챙겨갈 건 다 챙긴 나라라는 게 여자 싱글 경기 직전 러시아의 이미지였던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맞이한 쇼트 경기에서는 콴과 이리나가 나란히 1, 2위에 올랐다. 심판 투표는 5-4로 한 끗 차이였고 기술 점수와 구성 점수 평가는 기술의 이리나, 예술의 콴이라는 말 그대로 거의 나눠 가졌다. 3위는 당시 신인급인 사샤 코헨이었으며 4위는 문제의 인물(?)인 사라 휴즈였다.
프리 경기 직전 러시아가 선수단 철수까지 논의했었던 상황[6]에, 프리 경기에서 사라 휴즈는 두 개의 3-3 점프가 포함된 프로그램을 실수 없이 수행해냈으나 그 3-3 점프들이 회전 부족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그리고 미셸 콴이 두 차례의 실수를 저지르며 사라 휴즈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사라 휴즈는 쇼트 4위였기 때문에 쇼트 순위는 반만 반영하고 프리 순위는 모두 반영하여 합산한 결과가 적은 순으로 최종 순위를 매기는 당시의 구채점제 규정상 프리 순위가 휴즈 1위, 콴 2위(즉 이리나가 3위 이하)로만 확정된다면 콴이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이리나 역시 프리에서 자신의 주무기인 트리플 러츠-트리플 룹 점프를 구사하는 데 실패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지만 기술 평가에서는 거의 모든 심판에게 사라 휴즈와 동일하거나 그 이상의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구성 평가에서 심판진의 의견이 확실히 갈렸고, 낮은 평가를 한 심판들은 휴즈나 콴과의 뚜렷한 차등을 두었으며 그 중 2명은 5.6이라는, 정상급 선수의 구성 점수라고 하기 힘든 수준의 점수를 주었다. 5.6을 준 심판 중 1명이 0.1점만 올려주었어도 판정이 바뀌는 상황이었다. 이리나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예술성 점수가 5.6이라면 자신은 예술성이 없는 선수라는 뜻이 아니겠냐' 고 했다. 그러나 이리나는 기술적인 면에 비해 구성적인 면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종종 있었고, 실수 없는 경기를 중요시하는 구채점제의 특성상 실수를 두 번 한 이리나의 프리 스케이팅이 좋은 인상을 남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프리 순위는 어느 정도 정당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쇼트 프로그램 순위가 의문이었다. 1위가 콴, 2위가 이리나였는데, 이리나의 기술 난이도가 더 높고 수행도 잘했기 때문에 그가 1위였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때 채점 결과가 조금만 달라졌다면 그는 금메달리스트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프리 결과는 1위 사라 휴즈, 2위 이리나, 3위 콴이었다. 최종 점수는 사라 휴즈와 이리나가 동점이었지만 동점인 경우 프리 순위를 우선한다는 규정에 따라 금메달은 사라 휴즈의 것이 되었다. 러시아는 공식 항의 서한을 제출했으나 당연히(?) 기각되었다. 이리나는 이후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2002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평생 생각하며 살 것' 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2.3 그 이후
올림픽에서 이런 일을 겪은 직후에 열린 2002년 세계 선수권에서 이리나는 콴을 2위로 밀어내고 처음으로 세계 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 그와 함께 이 시즌에서는 콴에게 전승했다.
그 후 2002~2003 시즌과 2003~2004 시즌에서 이리나는 어머니의 병환과 자신의 부상 등이 겹치며 많이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이 두 시즌에 이리나의 주요 성적은 유럽 선수권 1회 우승이 전부이며 세계 선수권에서는 기권 1회, 9위 1회를 기록했다. 한편 미셸 콴은 이 무렵부터 그랑프리 시리즈는 거의 불참하고 미국 선수권과 세계 선수권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2003년 세계 선수권에서는 우승을 했으나 2004년에는 3위에 그쳤다. 이 무렵부터 미국의 새로운 주자로 떠오른 선수가 2002년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이리나를 꺾고 우승한 사샤 코헨이다.[7]
그러나 신채점제가 전면화된[8] 2004~2005 시즌에 이리나는 부상에서 복귀하여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그랑프리 시리즈 2개, 그랑프리 파이널, 유럽 선수권, 세계 선수권에서 모두 우승했다. 세계 선수권 두 번째 우승이며 시즌 전 대회 석권이었다. 신채점제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이 대회에서 4위를 차지한 미셸 콴을 제치고 명실상부한 최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시즌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올림픽 금메달 후보 1순위가 되었고 그 위상에 걸맞게 그랑프리 시리즈 2개와 유럽 선수권에서 모두 190점대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 해 유럽 선수권 우승으로 유럽 선수권 7회 우승자가 되면서 여자 싱글 선수 최다 우승 기록을 달성했다.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자신이 20점 차로 꺾은 적이 있는 아사다 마오에게 도리어 10점 가까운 차이로 우승을 내주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우승 후보 1순위의 위상은 변함이 없었다.
막상 올림픽에서는 또다시 자신의 주무기들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 쇼트 2위, 프리 3위로 밀리며 아라카와 시즈카, 사샤 코헨에 이어 동메달을 차지했다. 라이벌 미셸 콴이 밟았던 "은메달 이후 동메달"의 행보를 그대로 따라간 셈이었다.
3 이야깃거리
- 그랑프리 파이널 3연패를 달성한 유일한 여자 싱글 선수이다.
- 비엘만 스핀이 장기이다. 비엘만 스핀은 한쪽 다리로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다리를 바꿔서 양쪽 다리 모두로 비엘만 스핀을 성공시킨 첫 번째 선수이다.
- 매우 어린 나이에 결혼하였다. 은퇴까지 심각하게 고려했던 1998~1999 시즌을 끝낸 뒤 운동 트레이너인 남자 친구와 결혼하여 선수 은퇴 후 1남 1녀를 두었다. 결혼 후 기량이 꽃 피었으며, 미셸 콴과의 라이벌 관계도 결혼 이후에 시작되었다.
- 라이벌 미셸 콴과는 의외로 상당힌 친분을 가졌다. 오히려 국내 선배이자 라이벌이기도 했던 마리아 부트르스카야[9]와 으르렁거렸다고 한다. 콴 역시 사라 휴즈나 사샤 코헨과 그다지 좋은 사이는 아니었으니 이 점에서도 둘이 비슷한 셈이다.
- 아버지가 유대인이다. 2009년 국제 유대인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