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elle Wingshan Kwan. 关颖珊. 미국의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터. 별명은 'Kwan the Kween'.[1]
목차
1 소개
미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피겨 스케이터. 1995년부터 2005년까지의 기간인 10여년[2] 동안 군림한 미국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의 최강자. 토냐 하딩 사건으로 급속도로 식어가고 쓰러지던 피겨 스케이팅의 인기를 되살린 주요 영웅 중 한 사람.
세계선수권 5회 제패, 전미 선수권 9회 제패(8연패), 5회의 월드 우승, 2개의 동계 올림픽 메달[3]을 포함, 무려 43회 우승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4]을 쥐고 있는 굇수 챔피언 중 챔피언. 또한 피겨 스케이팅 역사와 전세계의 선수를 순위를 꼽으면 반드시 순위권에 지명되는 선수. 여자 싱글의 레전드라고 한다면 꼭 카타리나 비트와 미셸 콴을 든다(물론 비트는 미국에서 저평가 받고 콴은 유럽에서 저평가 받는다). 그리고 김연아.
현역 선수 생활을 은퇴한 뒤에는 아이스 쇼보다는 학업에 집중하고 있다. 2010년에 명예 박사 학위를 받으며 졸업했다. 은퇴한 지 3년 만에 프로 복귀를 했는데, 이 복귀 쇼가 김연아 선수의 09 세계선수권대회 직후 한국에서의 아이스 쇼였다. 김연아가 2009 세계선수권에서의 활약으로 빙상의 여왕으로 인정받은 직후라, 사람들의 반응은 前 피겨 스케이팅 여왕과 現 피겨 스케이팅 여왕이 만난다고 두근거리는 상황이었다. 물 건너 옆나라 빼고
이런 훌륭한 삶과 강인한 정신력, 그리고 아름답고도 압도적인 예술적 스케이팅 스타일으로 인하여 많은 피겨 스케이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우상이 되었다.
피겨 스케이팅 유명해진 지 겨우 3~4년(2011년 기준) 정도밖에 되지 않은 한국의 대부분 신규 팬들에게는 김연아 선수의 우상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 김연아 이전에도 대표적인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터로서 이름 정도는 알려져 있었다.[5]
1.1 프로필, 경력
생일: 1980년 7월 7일에 출신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국 국적: 미국 신장: 157cm 체중: 48kg 가족: 아버지, 어머니, 언니, 오빠 現 스케이팅 클럽: LA FSC 자신만의 철학: 열심히 일하자. 나답게 행동하자. 재미있게 살자! |
파일:Attachment/uploadfile/kwanmedal.jpg
- 1998년 여성 스포츠재단 선정 여성 스포츠 선수상
- 2001년 셜리번 미국 최고의 아마추어 운동 선수상
- 2002 틴(Teen) 초이스 최고의 여성 스포츠 선수상
- 2002년 올해의 코스모스 걸 상
- 2002년 피플지 선청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 입상
- 2002~3년 키즈 초이스 최고의 여성선수상
- 2003년 미국올림픽위원회 선정 올해의 여성 스포츠 선수상
- 2003년 전미 7번째의 올해의 피겨 스케이터 상 수상자이자 2번 복수 수상[6]
- 이중 꽤 다수가 김연아가 수상한 상들이기도 하다.
2 프로그램
콴의 가장 유명한 프로그램 중 하나인 세헤라자데.
시즌 | 쇼트 프로그램(SP) | 프리 스케이팅(FS) | 갈라(EX) |
1993–1994 | 송 오브 인디아 | 에덴의 동쪽 | 해당 없음 |
1994–1995 | 황하협주곡(黃河協奏曲) | 론도 카프리치오소 | 푸른 옷소매 환상곡/에덴의 동쪽 |
1995–1996 | Romanza | 살로메 | 에덴의 동쪽/Just Around the Riverbend |
1996–1997 | 관현악 모음곡 3번(Orchestral Suite No. 3) | Gyulistan Bayati Shiraz | 윈터 |
1997–1998[7] | 라흐마니노프 피협 3번 | Lyra Angelica | On My Own/단테의 기도 |
1998–1999 | 카르멘 | Ariane | Kissing You |
1999–2000 | A Day In The Life | The Red Violin | The World Is Not Enough/Hands |
2000–2001(1) | 에덴의 동쪽 | Song of the Black Swan | Beautiful World |
2000–2001(2) | Rush | The Miraculous Mandarin | This Time Around |
2001–2002 | 에덴의 동쪽/라흐마니노프 피협 3번 | 세헤라자데 | Field of Gold |
2002–2003 | The Feeling Begins | 아랑훼즈 | Field of Gold |
2003–2004 | The Feeling Begins | 토스카 | Fallin' |
2004–2005 | 아다지오 | 볼레로 | You Raise Me Up/This Used To Be My Playbround |
2005–2006 | Totentanz[8] | Prelude in C Sharp Minor Op. 18 | A Song for You |
이 외에 더 놓친 게 있으면 추가바람.
3 미국의 가장 사랑받는 피겨 스케이터
보다시피 미셸 콴은 순수 서양인이 아니고 중국계 미국인이다. 축구 선수이던 홍콩 이민자 대니 콴(Danny Kwan)과 그의 아내 에스텔라 콴(Estella Kwan)의 셋째로 태어났다. 오빠는 하키를 하고, 2살 위의 언니 캐런과 같이 만 5세 때부터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 다음해부터 전문 수업을 받고 각종 지역 대회에서 우승하게 된다. 8세 때 프랭크 캐롤[9] 코치를 만난다. 이때 캐럴의 평가는 "기운만 세고 섬세하지도 않고 예술성도 없는 말괄량이" 랬다. 흠좀무.
그 성격을 증명이라도 하듯 콴은 빨리 시니어로 나가고 싶어했지만, 캐롤 코치는 참을 인(忍)을 길러라! 좀 더 기술과 예술성 모두 콴 자체를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질세라 콴은 훈련 시간을 2배로 늘려 학교를 다니면서 하루 3시간 훈련을 하기 시작한다. 콴은 하루 4시간을 훈련하게 해달라고 부모에게 졸랐지만, 성장기이던 콴의 몸을 걱정한 부모는 거절했다. 그리고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공부도 뒤쳐지지 않게 만든다. 하라는 공부를 해라!
그리고 겨우 1년 뒤에 불과 만 12세로(…) 1993년 내셔녈을 통해 시니어 데뷔, 6위를 차지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전문가들은 이때부터 미셸 콴을 살펴 보기 시작한다.[10] 그 해 7월 만 13세가 된 콴은 올림픽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우승한다. 이 대회에서 대회 역사상 최연소 우승이었던 데다 6개의 트리플 점프를 성공시켜 관중과 전문가들을 경악시킨다. 이때 떨리지 않냐고 물었던 한 인터뷰의 대답이 대단하다. "저의 기분이 어떻건, 관중이 많건 적건 저는 예정된 프로그램을 해야 합니다". 과연 어렸을 때부터 대장부 기질이 보였다.
부모가 착실하게 공부도 시켰지만 잘 가르쳐서 정신력이 무척 강인하다. 콴의 아버지가 말하길, 콴이 운 것은 1991년 미국 주니어 내셔널에서 9위를 했을 때 뿐이라고…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했고,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도 같은 미국 동료 선수인 세라 휴스(Sarah Hughes)가 금메달을 차지한 가운데 동메달을 차지했다. 그리고 휴스는 평생 얻어먹을 욕을 그때 다 먹었다. 최근까지도 세계구 급으로 까였다. 그러나 이 분이 등장하며 드디어 저주가 풀리는 듯.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도 출전할 계획이었으나, 부상으로 인하여 불참하게 되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미셸 콴이 불참한 국대 자리에는 세라 휴스의 동생 에밀리 휴스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후 2008년 현역 은퇴를 하고 아이스 쇼로 돈을 벌며, 프로 생활을 하기보단 학업에 정진한다. 학업을 완전히 마쳐 졸업하고는 아이스 쇼도 참가하기 시작한다. 김연아의 한국에서의 아이스 쇼는 그녀의 첫 복귀 이후로 매년 참가하고 있고, 덩달아 콴의 팬들도 방한 주기가 잦아지고 있다(…)
3.1 스케이팅 스타일
그야말로 우아함과 압도감을 동시에 지닌 천재. 차세대 피겨 스케이터들이 표준으로 삼아야 할 정도라고들 한다.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콴은 피겨 스케이터의 몸매치곤 굴곡이 예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8등신도 아닌, 속히 말해 예쁘지 못한 몸매이지만 그녀의 스케이팅 실력은 관객을 장악할 만한 압도력이 엄청나게 있다.
43회 우승이라는 먼치킨이기도 하지만, 구 채점제 시대에서 만점이었던 6.0점을 무려 57번 받았고 이것은 구 채점 제도시대의 최다 만점 기록이다(지금은 채점 제도가 바뀌였지만 대단한 기록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1998년의 전미 선수권 때는 18명의 심판들 중 15명이 만점 6.0을 주기도 했다.
3.2 인연 없는 동계 올림픽
유난히도 동계 올림픽 금메달과는 인연이 없다. 아주 웬수 진 거 같다. 콩라인? 근데 놓친 건 동계 올림픽 금메달뿐이라서 사실상 콩라인이라 하기엔 무리다. 애초에 미셸 콴이 거의 굇수 킹왕짱 레전드 전설의 선수 중 하나라. 그리고 미국인들은 콴이 동계 올림픽 금메달 못 딴 거 아쉬워 하긴 하지만, 사실상 그딴 거 신경 안 쓴다. 왜냐면 미셸 콴 자체를 좋아해서(…)
처음 동계 올림픽과의 악연(?)은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대표 선발전이기도 한 1994 미국 내셔널로부터 시작한다. 프리 스케이팅에서 2위를 해서 결과적으론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선수가 될 수는 있었지만, 미국 빙상 연맹의 규정 중 하나던 "연맹은 올림픽 선발전에 참가하지 않은 선수를 선발할 수도 있다" 가 작용, 당시 우승자이던 토냐 하딩과 연맹 국제위원회 투표에 따라 그 당시 최고의 피겨 스케이터였지만 불의의 사고로 출전하지 못했던 낸시 캐리건이 출전하게 되었다. 이렇기에 콴은 대타 후보로 지정되었고 노르웨이까지 날아가 경기 시작일이던 2월 23까지 대기 상태에 있게 된다.
사실 이때 콴은 거의 참가가 가능했다. 하지만 상황이 꼬일 대로 꼬여서 마치 될 듯 말 듯 싶었다. 2월 1일 토냐 하딩이 유죄를 시인했고, 그에 따라 연맹은 징계 절차에 들어갔다. 하지만 10일 하딩 측이 미국 연맹에 2천만 달러 손해 배상 소송을 접수하고, 막후 협상 끝에 12일 연맹은 토냐가 올림픽에 가는 것을 승인하며 올림픽 후 징계 절차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론 헛고생 못 나가게 되었다. 또 노르웨이에서 토냐는 발목을 접질러버렸지만 의사가 OK 사인을 내버려서 결국 진짜 헛고생. 지못미 콴.
그래도 94년도 월드는 올림픽 출전 두 선수 모두 아웃[11]되어서 나가게 된다. 이때 쇼트에서 실수가 많아 11위가 되었지만 프리가 6위로 되어 종합 8위가 된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피겨 스케이팅 역대 최연소[12] 금메달리스트인 타라 리핀스키가 당시 랭크 1위였던 콴을 누름으로서 결국 은메달을 차지했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는 뜻 아닌 팀킬을 당했다.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콴, 그리고 이번이 2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13] 마지막 찬스란 사실에 엄청난 부담감에 억눌리던 콴은, 결국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프리에서 2번의 실수를 했고, 같은 미국 동료 선수인 세라 휴스가 금메달을 차지한 가운데 콴은 결국 동메달을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참가할 수도 있던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도 출전할 계획이었으나, 2005 월드 이후의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엔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오랜 전부터 앓고 있던 고관절염증이 심해졌다. 토리노 올림픽까지 가서 개회식에 참석했으나, 그것이 무리가 되어 다음날 연습에 여러차례 넘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올림픽 프레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은퇴를 밝혔다. 그리고 그대로 현역 은퇴. 미셸 콴 그녀 자체에게나 그녀의 팬들에게나 많이 아쉬웠던 순간이었다.[14] 여담으로 이 올림픽 프로그램이 될 '뻔' 한 프리 프로그램에 대해 재밌는 일화가 있다. 밑의 '프로그램에 대한 비화' 에서 서술.
3.3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생긴 일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미셸 콴은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부문에 미국 대표로 출전한다. 같이 출전한 동료 선수는 듣보잡(!) 세라 휴스[15]와 이 땐 아직 풋풋한 신인급이었던 사샤 코헨.
모든 미국인의 사랑을 받는 미셸 콴, 그리고 미셸 콴의 라이벌이자 모든 러시아인의 사랑을 받는 이리나 슬루츠카야는 금메달을 얻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쇼트 프로그램이 끝났을 때 순위는 미셀 콴-이리나 슬루츠카야-사샤 코헨-세라 휴스였다.
그 다음으로 치러진 미셸 콴의 롱 프로그램이 끝났을 때, 미셸 콴은 선두를 유지했다. 미셸 콴이 1위, 세라 휴스가 2위, 사샤 코헨이 3위였고 이제 이리나 슬루츠카야의 연기만 끝나면 순위가 가려지는 상황이었다. 상식적으로는 여기서 이리나 슬루츠카야가 1위를 하더라도 콴은 최소한 은메달을 거머쥘 수 있었는데.
롱 프로그램이 끝나자 세계는 경악했다. 최종 순위가 세라 휴스-이리나 슬루츠카야-미셸 콴- 사샤 코헨이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우리 미셸이 세라 휴스를 이겼는데 왜 3위로 떨어지는 거냐?"라며 멘붕했는데, 이리나 슬루츠카야의 경기를 포함시켰다는 이유만으로 순위가 뒤엎어졌으니 그럴 만도 하다(…) 러시아인들도 "미셸 콴을 이긴 우리 이리나 짜응이 왜 2위라는 거냐?"라며 멘붕했는데, 미셸 콴을 이겼으면 당연히 1위인데도 불구하고 원래대로라면 3위였어야 할 세라 휴스와 같은 점수를 받았고, 프리 프로그램에서 세라 휴스의 점수가 높았다는 이유로 금메달을 빼앗겼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후 세라 휴스는 전세계적으로 까였고, 이후 출전한 세계 선수권에서 6위를 기록함으로서 스스로의 실력이 듣보잡임을 증명한 후 조용히 은퇴했다.
3.3.1 왜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
위와 같은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적용된 구채점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전 버전에서는 구채점제의 '모순'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런 표현이 꼭 적당한 것은 아니다.
당시 적용된 구채점제의 기본은 많이 알려진 대로 기술점과 예술점을 각각 6.0 만점으로 채점하여 두 점수를 합산하는 것. 그런데 이 점수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점수를 토대로 각 심판이 쇼트 프로그램과 프리 프로그램의 순위를 결정하는 근거가 될 뿐이다. 그리고 최종 순위 결정은 일종의 심판간 투표제로 이루어져서, 우선 1위표 과반수를 얻은 선수를 1위로 결정한 다음 그 다음 순서를 결정해 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이런 방식으로 쇼트 프로그램과 프리 프로그램의 순위를 결정한 다음, 쇼트 프로그램의 순위에는 0.5를 곱한 것이 최종 점수가 되고, 프리 프로그램에서는 순위 그 자체가 최종 점수가 된다. 두 프로그램의 최종 점수를 합하여, 점수가 낮은 순서대로 최종 순위를 결정하게 된다(그래서 구채점제 시절의 피겨 스케이팅 결과를 보도할 때는 종종 '석차 얼마얼마'란 표현을 썼었다.)
당시 쇼트 프로그램 이후의 순위가 미셀 콴-이리나 슬루츠카야-사샤 코헨-세라 휴스였으므로, 쇼트 프로그램 이후 점수는 다음과 같게 된다.
콴(0.5) - 슬루츠카야 (1) - 코헨 (1.5) - 휴스 (2)
이리나 슬루츠카야가 연기하기 직전, 프리 프로그램의 순위는 세라 휴스 - 미셸 콴 - 사샤 코헨 순이었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의 점수는 휴스(1) - 콴(2) - 코헨 (3).
따라서 합계 점수는 콴(2.5) - 휴스 (3) - 코헨(4.5)이다.
이리나 슬루츠카야가 자기 실력만 100% 발휘했다면[16] 세라 휴스의 점수가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17] 충분히 1위가 될 수 있었고, 그러면 1점만 더하면 되기 때문에 총점 2점으로 콴을 제치고 금메달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리나 슬루츠카야 역시 3-3 점프를 완전히 뛰지 못하는 등 두어 번의 실수가 있었다.
그래서 채점 결과, 이리나 슬루츠카야가 프리에서도 2위가 되었다. 심판 9명의 투표 결과 5-4로 밀린 것이다. 그 결과에 따라 프리 점수는 휴스(1) - 슬루츠카야(2) - 콴(3) - 코헨(4)
최종 합계 점수는 이에 따라, 휴스/슬루츠카야(3) 동점 - 콴(3.5) - 코헨(5.5)이 되어 버린 것이다.
동점 때는 프리 우선이라는 것이 이 당시의 규정(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이었으므로 결론은 휴스 1위, 슬루츠카야 2위.
그런데 슬루츠카야가 프리에서 2위를 하게 된 것에 대해서 판정에 의구심이 제기되었다. 우선 휴스의 점프가 회전 부족이었는데도 그것을 잡아내지 않았다는[18] 비판이 제기되었다. 또한, 슬루츠카야의 프리 프로그램이 대체로 예술성에서 5.8 전후의 평가를 받아 왔는데, 이 당시에는 예술성에 5.6을 준 심판이 2명 있었다. 만약 5.6을 준 심판 2명 중 1명이 예술성에 0.1점만 더 주었어도 프리 순위가 역전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채점을 두고, 슬루츠카야를 도저히 콴 밑의 순위로는 둘 수 없으니[19] 점수를 억눌러 휴스 밑으로 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글 참조. 슬루츠카야는 이후 인터뷰에서 자신이 2002 올림픽에서 우승했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을 살펴 보면 구채점제의 모순이란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위 단락에서 서술한 것과 같은 순위의 변화가 '모순'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며, 심판들이 보인 행태를 비판하는 데에 적당한 말일 것이다.
3.3.2 판정 이후
일반인들은 세라 휴스의 우승에 크게 반발했다. 미셸 콴과 세라 휴스의 우열이 이미 가려졌는데, 그들과 무관한 이리나 슬루츠카야의 경기 때문에 우열이 뒤집히는 것은 안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에 나오는 무관한 선택대상으로부터의 독립(Independence of Irrelevant Alternatives)이라는 원칙에 따른 것으로, 설명은 복잡해 보이지만 일반인에게는 아주 익숙한 개념이다. 학교 시험에서 당신이 90점을 맞고 반 친구 A가 80점을 맞았는데, 다른 친구 B가 추가시험을 치른 것만으로 당신의 점수가 깎여서 A보다 순위가 뒤쳐지는 일이 생기지 않는 것도 시험의 규칙이 이 원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겨 스케이팅의 구채점제는 이 원칙을 부정했으므로 일반인들은 판정에 대해 크게 반발했다. 피겨 스케이팅 전문가들에게는 구채점제가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었을지 몰라도, 전문가의 설명을 들은 일반인들은 구채점제를 납득하기보다는 "구채점제의 모순이 드러났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모순'에 힘입어 금메달을 차지한 세라 휴스를 깠다.[20]
피겨 스케이팅 전문가들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세라 휴스의 우승을 주장하는 측과 미셸 콴의 우승을 주장하는 측[21] , 그리고 이리나 슬루츠카야의 우승을 주장하는 측으로 나뉜 것이다. 전문가들도 세라 휴스의 우승에 의견일치를 못 볼 정도로 판정논란이 심하다면, 세라 휴스를 진정한 금메달리스트로 인정할 리가 없다. 러시아에서는 이리나 슬루츠카야에게 금메달을 만들어서 선사할 정도였으니(…)그리고 이리나 슬루츠카야는 인터뷰에서 "2002년 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는 자신이라고 평생 생각하면서 살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라 휴스의 실력이 돋보잡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올림픽 이전에 큰 대회에서 입상한 경력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사라휴즈는 올림픽 전 월드에서도 3위에 입상한적이 있다. 또한 올림픽 전 시즌과 올림픽 시즌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3위 였으며 그때 포디움에는 이리나 슬루츠카야와 미쉘 콴도 있었다. 즉 올림픽 시즌때도 이리나 슬루츠카야 미쉘콴과 함께 올림픽 포디움 후보였으며 가능성이 적지만 금메달 후보이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휴즈가 금메달리스트가 되자 사람들은(특히 미쉘콴의 팬들) "세라 휴스가 부당하게 금메달을 땄다"고 의심하게 되고, 세라 휴스가 2003년에 출전한 미국 선수권에서 2위, 세계 선수권에서 6위에 그치자 "본래의 실력이 드러났다"며 그녀를 마구 깠다. 쿨타임 끝났다 까자 이후 세라 휴스는 은퇴했고, 미셸 콴과 이리나 슬루츠카야의 팬들은 지금까지도 세라 휴스를 까고 있고, 앞으로도 깔 예정이다. 특히 유럽 피겨계에서는 세라 치티드 휴스라고 불린다고.... 세라 휴스가 2010년 미국 피겨 명예의 전당[22]에 헌액되었을때 미셸 콴의 팬들은 "솔트레이크에서 심판들이 이리나 슬루츠카야의 경기를 제대로 채점했다면 휴스가 미국 피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23] 라고 불평했을 정도이다. 미셸 콴의 라이벌이었던 이리나 슬루츠카야의 편을 들 정도이면 콴의 팬들이 휴스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수 있다.
그 후 세라 휴스는 잊혀졌고, 피겨 스케이팅에서 편파 판정으로 문제가 일어날 때만 언급된다(…) 왜들 이러시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4 그 외
돈이 지독하게 들기로 유명한 피겨 스케이팅을 했기 때문에 가족이 희생을 많이 했다. 1993년에 콴과 카렌의 피겨 스케이팅 교습비로만 5만 달러.[24] 자금 마련을 위해 아버지는 살던 집을 팔고 할아버지의 집으로 가족 전부가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미셸의 아버지는 전혀 그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딸들에게 피겨 스케이팅을 선물해줘서 자신은 기뻤다 한다. 오오 아버지…
언니인 카렌도 같이 피겨 스케이팅을 했다. 1997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은퇴, 보스턴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이후 콴 가족 소유의 링크에서 안무가로 진로를 바꿨다. 또한 디자이너 베라 왕에게 인턴을 한 탓에 피겨 스케이팅 의상도 디자인하기도 한다.[25] 후에 1988 올림픽 페어 동메달리스트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브라이언 오서 다음으로 김연아선수의 2010~2011시즌 코치였던 피터 오피가드.
콴들의 팬은 흰 부츠를 선호하는데, 이유는 콴이 선수 시절 흰 부츠를 내놓았기 때문.[26]
한국에 아이스 쇼 때문에 방문했을 때, 한국인들이 자신을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게에서 자신을 김연아 선수가 존경하던 모델이라고 알아봤다고 얼떨결에 사인도 해주고 사진도 찍었다며 엄청 놀라워했다(…)
4.1 현역 은퇴 후의 상황 겸 학업과 기부
은퇴 후 대학에 들어가 학업에 신경쓴다. 대학은 다른 곳도 아니고 아이비 리그와 스탠퍼드 대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27](그야말로 엄친딸) 고향인 캘리포니아 주 토랜스 시가 있는 LA지역의 UCLA에 1년간 다니다 훈련지인 콜로라도 주의 덴버 대학교로 편입했다. 이유는 1998 올림픽의 은메달이 아쉬워 다음 올림픽을 노렸기 때문. 2008년 11월에 덴버 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으며, 보스턴의 명문 터프츠 대학의 플레처 스쿨에서 국제관계학 석사과정을 이수하다가 2010년 2년제 사립대학인 사우스 버몬트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으며 졸업, 졸업식에서 축사를 전했다. 상당히 감명 깊은 연설로, 기회가 되면 한 번 들어볼 것을 추천.
스포츠계를 위한 일도 상당히 했다. 2006년 11월 미국 국무부장관으로부터 최초의 공공외교사절로 임명, 전세계를 누비며 젊은이들과 리더십에 대해 논하고 사회와 교육을 주제로 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국에도 방문한 적 있다!
2009년 1월에는 일상체육활동을 통한 미국인의 건강증진방안에 대해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체력단련 및 스포츠 자문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2012년 세계 피겨 스케이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선수 생활을 2006년에야 마감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빨리 헌액된 셈.[28]
2013년 1월 19일 백악관 국가안전보장위원회에서 일하는 클레이 펠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2013년 11월 남편 클레이 펠이 로드 아일랜드 주 민주당 주지사 후보에 도전을 검토 중이란 뉴스가 떴다. 장래의 영부인 미셸 콴
기부나 재단에 관해서는 추가바람.
4.2 프로그램에 대한 비화
워낙 유명한 프로그램이 많다.
김연아의 08~09 LP 프로그램인 세헤라자데는 콴의 세헤라자데에 대한 일종의 오마쥬이다. 김연아는 초등학생 시절, 미셸 콴의 세헤라자데를 비디오로 녹화해두고 여러 번 돌려보았다고. 김연아는 보통 프로그램에 쓸 음악을 데이비드 윌슨이 가져온 곡들 중에서 선곡하는 편이었는데, 세헤라자데 만큼은 그녀가 하고 싶다고 먼저 말한 곡이기도 하다.
실제로 김연아의 세헤라자데가 처음으로 발표되자, 복장과 피니쉬 포즈 등이 어느 정도 콴의 세헤라제드를 떠올리게 하여 팬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시었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콴의 가장 유명한 프로그램 중 하나인 이 세헤라자데를 김연아는 09 시즌 LA 세계선수권에서 그 누구도 아닌 콴의 눈앞에서 연기를 펼치게 된다. 평가야 뭐 우왕ㅋ굳ㅋ.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이때 미셸 콴은 트리플 점프도 연습 중이라며 나름 긍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다가, 프리 프로그램 끝나고 답변을 하겠다고 미뤘다. 프리 프로그램 종료 후 김연아 칭찬을 자자하게 늘어놓던 미셸 콴에게 다시 컴백설에 관해 물으니 미셸 콴의 대답은 "김연아의 경기를 보고 나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고.</ref>[29]
아사다 마오의 09~10 시즌이자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LP이던 라흐마니노프의 모스크바의 종을 미셸 콴도 탈 뻔했다. 2006 올림픽 프리 프로그램 주제곡이었고 당시의 안무가가 바로 아사다 마오의 09~10 시즌 코치이자 안무가이던 타티아나 타라소바였다![30]
그러나 결국 콴은 부상 때문에 이 프로그램을 보일 수 없게 되었다.[31] 2006 SP인 리스트의 Totentanz는 그나마 2005년 12월 TV 프로그램을 통해 선보였었지만 그 직후 부상이 심하게 도져버려 결국 올림픽 선발전인 내셔널에 나오지 못했다. 그나마 그동안 그녀의 업적을 봐 미국빙상연맹의 특별혜택으로 5명의 심사위원 앞에서 비공개로 2006년 1월 27일 이전에 콴의 건강 상태와 프로그램 연기를 선보이는 것을 조건으로 올림픽 행을 미국 연맹은 승인한다. 콴은 쇼트와 프리 모두를 선보여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재차 부상으로 결국 그대로 물 건너가게 되었다.
참고로 아사다 마오의 종을 본 콴들의 팬들은 '미셸이 안하길 잘했다' 라는 반응이었다 한다. 지못미 마오. 그렇지만 동시에 '저 선수가 저랬을 뿐이지 우리 미셸이 했다면 상황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반응도 대수.- ↑ Q와 K 둘 다 ㅋ 발음을 이용한 것. 현 피겨 스케이팅 여왕 김연아의 Queen-Yuna가 외국 방송에서마저 사용하는 것처럼 공개적인 별명.
- ↑ 피겨 스케이팅 항목에 써 있지만, 피겨 스케이팅은 결코 오래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도 여자 싱글에서!
- ↑ 아쉽게도 금메달을 따지 못해서 무관의 제왕이란 별명이 붙었다.
- ↑ 미국의 피겨 스케이팅 역사 100년간 남녀 선수를 통틀어 이처럼 많은 세계 선수권 타이틀과 전미 선수권 타이틀, 동계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선수는 없다.
- ↑ 이전 서술에 "남나리가 1999년 전미 선수권 2위를 했을 때 1위가 미셸 콴이었고, 이것이 한국에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고 적혀 있었는데, 물론 경기 결과는 맞지만 남나리가 2위를 해서 1위인 미셸 콴이 알려졌다기보다는 그 미셸 콴에 이어서 2위를 한 대단한 선수로 남나리가 알려졌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
- ↑ 이때문에 트로피 이름이 "미셸 콴 트로피" 로 바뀌었다(…)
- ↑ 올림픽 프로그램.
- ↑ 재미있게도 이때 콴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이리나 슬루츠카야 역시 같은 곡을 사용했다. 프란츠 리스트 작곡 <죽음의 무도> . 단, 김연아의 카미유 생상스 작곡 <죽음의 무도>와는 다른 것.
- ↑ 2009년부터 일본계 미국인 피겨 스케이터인 미라이 나가수의 코치를 맡았으나, 2012년에 미라이와 결별했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거리상의 문제' 를 들었지만, 미라이와의 관계가 그리 돈독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자세한 것은 미라이 나가수 항목을 참조. 현재는 미국 여자 싱글의 새로운 간판스타 그레이시 골드의 코치.
- ↑ 참고로 이때의 프로그램은 '미스 사이공'.
- ↑ 토냐는 예정된 대로 올림픽 후에 징계 먹었고 낸시는 부상 때문에 결국 은퇴
- ↑
쇼트트랙 강국인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ISU에서는 1996년부터 연령 하한선을 설정했다. 시즌 개막일인 7월 1일 기준으로 만 15세 이상만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출전이 가능하다. 리핀스키의 경우는 연령 제한을 겨우 20일 넘겨서 출전했다. - ↑ 위에서도 서술되어 있지만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터는 오래 할 수 있는 운동이 결코 아니다. 대부분 여싱들에게 2번 올림픽 참가하면 그것이 많은 거고, 3번 참가하면 메달은 기대도 안하고 마무리 기념이라 생각한다.
- ↑ 뱀발로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의 여싱 우승자는 일본의 아라카와 시즈카.
- ↑ 2000년 미국 선수권 3위에 2001년 세계 선수권에서 3위를 차지했다.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냐고? 그랑프리 시리즈에서 한 번 우승했지만 세계선수권 등의 큰 대회에서는 그런 거 없다.
- ↑ 이리나 슬루츠카야는 김연아의 3-3 점프보다도 더 어려운 트리플 러츠-트리플 룹 점프를 주무기로 삼던 선수였다. 다만 김연아가 2번의 올림픽, 4번의 연기에서 3-3 점프를 모두 성공한 반면, 이리나 슬루츠카야는 그러지 못했다.
- ↑ 기술성, 예술성 모두 5.8이 최고점이었다.
- ↑ 회전 부족은 이 당시에도 잡히면 감점이었다. 오히려 지금은 그냥 하나의 요소에 대한 감점일 뿐이지만 이 때는 프로그램 전체 점수에서의 감점이기 때문에 그 효과는 더 컸다.
실제로 실행이 잘 안 되어서 그렇지 - ↑ 슬루츠카야가 콴 밑으로 갔다면 휴스와 콴의 점수가 변동되지 않으므로 콴 금메달/휴스 은메달이 된다.
- ↑ 정확히 말하면 구채점제에서 최종 순위 결정에 반영되는 것은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이미 결과가 나온 '점수'가 아니라 그 점수에 따라 결정되는 '순위'이니, 전원이 동시에 경기를 치르지 못하고 1명씩 순차적으로 경기를 치르는 이상에는 순위 변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애시당초 '무관한 선택대상으로부터의 독립'이 적용되지 않는 셈. 그러나 일반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정보는 그러한 순위가 아니라 5.7, 5.8, 5.9 등으로 표시되는 '점수'이고 그 점수가 변동될 일은 없으니, 다른 선수가 경기를 치루었다고 해서 순위 변동이 생긴다는 것이 이해가 가기 힘든 것도 당연한 일이긴 하다. 우선하여 전달되는 정보와 실제 판정의 핵심 요소 간의 괴리 때문에 일어난 현상인 셈이다.
- ↑ 다만 콴은 경기에서 실수를 몇 번 했기 때문에 이리나 슬루츠카야가 클린할 경우 금메달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 ↑ 세계 피겨 명예의 전당과는 다르다.
- ↑ 사실 올림픽 금메달을 제외한 세라 휴스의 커리어는 별 볼일 없다. 세계 선수권 동메달과 스케이트 캐나다 1위 기록은 있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미국 피겨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기에는 빈약한 수준이다.
- ↑ 그 당시 최고 수준의 대학을 졸업한 MBA가 받는 연봉이다!
- ↑ 참고로 베라 왕은 콴의 프로그램 코스츔을 꽤 자주 담당했다.
- ↑ 이건 일종의 취향. 몇몇은 콴처럼 부츠를 내놓는 데 반해, 몇몇은 스타킹으로 부츠를 전부 덮는다.
- ↑ 미국 대학이라고 한국 대학이랑 많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학교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 유명인과 그 자제들을 일류대학에서 거의 모셔가려는 것은 도리어 한국보다 심하기도 하다.
- ↑ 예를 들어 선수 생활을 2003년에 마감한 알렉세이 야구딘이 아직도 헌액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 ↑ 대회가 끝난 후 김연아와 마주쳤을 때, 김연아가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있더란다. 콴이 "Hi Yuna, Nice to meet you!" 라고 인사를 건네도 아무 소리 못하더라고…
- ↑ 타라소바의 "빙상의 신은 아사다 마오를 사랑하신다" 라는 대사는 원래 "God loves Michelle(빙상의 신은 미셸을 선택하셨다)" 라는 미셸에 대한 칭찬이었다. 일종의 오마쥬?
- ↑ 정확히는 2005 월드 4위 이후 한 번도 대회에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