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희(영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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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영화 감독

(1931 ~ 1975)
그 유명한 휴일, 돌아오지 않는 해병, 쇠사슬을 끊어라, 암살자,삼포 가는 길 등의 영화를 만든 거장감독.

1962년생 배우 이혜영의 아버지. 마지막 연인은 문숙.

이만희 감독은 돈을 많이 쓰기로 유명했는데, 주로 파티를 많이 열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자 배우,스텝들을 위해 연 파티였다.

2 영화

한마디로 팔방미인, 어떤 장르도 평균 이상의 물건을 뽑아내는 신의 손이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63년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고 늘 그렇듯이 이 작품을 연출하기 위해 수만명의 해병대를 군에서 지원받았다.당시에 전쟁영화 지원을 위해서 안전조치를 허술하게 하면서도 실탄을 사용해서 촬영했다고 한다. 사실 당시 한국 영화계에 안전 대책이 미흡했던 건 꽤 흔한 일이기도 했고 영화 제작 기술 부족이란 이유도 있었다.

이후 1965년작인 7인의 여포로에서 북한군을 미화시켰다고 검열에 걸려 영화감독 최초로 반공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다. 실은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신나게 처맞았다고 한다. 정작 이 영화는 북한군이 '자유 대한'으로 귀순하는 반공 영화였다. 미화시켰다는 것도 코미디에 가까웠다. 북한군이 국군 부상병을 사살하자 국군 간호장교 포로가 '인민군은 제네바 협정을 교육하지 않습니까?'라며 항의하는데 이를 두고 검열 당국에선 '북괴를 정상적인 국가 및 교전단체로 설정했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여포로를 강간하려던 중공군을 북한군 장교가 제지하자 '장교님은 참 훌륭하신 분이에요'라고 칭찬하고 이후 이 장교가 포로들과 합세해서 중공군과 교전하고 귀순하는 장면을 '괴뢰군이 중공군에 예속되지 아니하고 민족적 자주성이 강해서 공산주의보다 민족애를 앞세우는 용맹스러운 군인같이 조작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영화 휴일은 아예 개봉도 못하고 있다가 2005년에야 필름이 발견되면서 공개되었다. 개봉을 못한 이유는 영화 분위기가 너무 암담해서. 실제로 원래 시나리오에선 신성일이 사체로 발견되면서 얘기가 시작되는데 감독도 작가도 너무 암담하다며 촬영은 하지 않았고, 검열 후 군대에 가는걸로 수정하면 개봉 시켜주겠다고 제시했으나, 감독이 그걸 거부해서 영화 개봉이 거부당했다(...)

그의 영화는 상당수가 필름이 유실되거나 복원되지 않았는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컬렉션 4편을 복원해 2010년에 DVD로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만추를 비롯한 몇몇 영화는 포스터나 스틸컷만 약간 남아있을 뿐 필름조차 남아있지 않다.[1]

인터뷰365의 자료에 의하면, 안전을 등한시 했다. 신영균은 지각을 해서 급하게 오다가,차가 추락할뻔했다. 그외에도 뇌관을 묻어놓고 폭발시켜야 하는데, 신인 전양자를 나무에 묶어놓고 사격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레디고를 외치며 진짜로 실탄을 쏴버렸다.[2]

그 밖에 엑스트라 한 사람은 그만 진짜 폭발에 휘말려 다리를 하나 잃기까지 했다. 보상으로 어느 땅 농지를 한가득 사서 주었는데 그 땅이 ......바로 강남이었다고......
그런데 이렇게 안전을 등한시하는 모습과는 참 모순되게도 굉장히 신사적인 사람이었다고(...) 같이 일을 했던 스텝들과 배우들이 모두 하나같이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지도도 상당히 부드럽고 자상하게 해주던 감독'이라고 평한다. 당시 작업했던 배우들이 방송에 나와서 그가 다른 감독들이랑 다르게 매우 부드러운 사람이었다고 회고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으며 실제로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도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능력은 참 뛰어나서,영화 암살자의 DVD 코멘터리에 의하면 1969년도에는 영화를 열편이나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감독료는 한편당 50만원. 일반 감독료는 20만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것이다. 그런데 여러 문제때문에 70년대에는 1년에 한편밖에 못 만드는데 그게 바로 유작인 삼포 가는 길이다. 그걸 마지막으로 마흔 다섯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승승장구에서 딸인 이혜영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죽기전에 자식들에게 '너희들에게 물려줄게 없구나. 나에겐 내 이름 석 자와 내 작품들 뿐이야'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불꽃 그 자체였고 영화가 전부였으며 수많은 명작을 남기고 명감독이 되었다. 그런 아버지가 멋있었다'고 말하며 아버지를 존경하는 모습을 보였다. 딱 한 번 따라갔던 촬영 현장도 아직도 있지 못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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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많은 한국영화들, 심지어 1990년대 초반 영화까지도 필름을 재활용하거나 수거하여 녹여 은단을 만들거나(?!) 밀짚모자 틀을 만드는데 썼기 때문에 필름이 남아있지 않은게 많다.
  2. 총알은 주위 나무에 박히긴 했다고..흠좀무.. 뭐 일본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똑같이 실제 화살을 미후네 토시로에게 확실히 벽에 박히게 공기압축장치를 써서 여러발을 쐈던 것이 똑같다(...) 참고로 미후네 토시로는 촬영 당시에는 그냥 넘어갔으나 나중에 회식에서 술에 취하자 "구로자와 이 색햐, 날 죽이려고 했지? 그래, 이 자리에서 끝을 보자."고 방방 날뜄는데 전영자는 그러지도 않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