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 영화

1 반공 영화의 시작

반공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반일과 함께 적극 권장되어 홍보용 영화도 많이 만들어졌는데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반공을 국시로 하여 대거 양산되었고 당연히 괴작도 만들어졌다. 초기 반공영화 중에는 한형모의 운명의 손이 있다. 이건 한국영상자료원에서도 DVD로 만들어줬다.

1.1 특징

  • 우리편은 좋은 사람.
  • 대신 적은 굉장히 악랄해서 검열삭제는 기본이고 고어에 스플레터,하드고어가 넘쳐흐른다.
  • 예쁜 적은 갱생하지만 죽을 수도 있다. 아주 예쁘면 안 죽고 덜 예쁘면 죽는다. 이건 정말이다.
  • 우리편은 적에게 자비를 베풀다가 끔살당하여 시청자들의 분노를 이끈다.
  • 어린이는 죽지...않는 게 아니고 오히려 끔살시킨다. 가깝고도 먼 길이 그 예이다.
  • 어린이는 심심하면 북한군에게 학살당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애들이 북한군을 몰살시키는 영화도 있다. 울지 않으리가 그 예이다.
  • 마지막은 대한민국 만세!로 끝난다. <울지 않으리>에서도 북한군이 패배하니까 마을사람들은 스탈린, 김일성 사진을 떼어내 밟아버리고 만년 공산당 앞잡이 이일웅은 목매달아 자살하면서(심의상 잘 보여주지 않는다) "아들아, 너는 자유대한의 아들로 살라"고 한다.
  • 우리 주인공은 상황이 끝나면 나쁜 사람도 받아준다. 위의 <울지 않으리>에서도 이일웅 아내와 그 아들이 학교로 오자, 우린 친구라며 받아준다.

2 리즈시절

잘나갈때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영화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웬만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만큼 국가에서 탱크와 총기를 지원해서 실감나는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몇몇 반공영화/드라마에선 사실감을 살린다고 실탄 사격도 했다! 아무리 기술이 낮은 시대였어도 그렇지. 물론 사람에게 직접 한건 아니고 사격훈련 장면같은 것에서 사용했다고 하지만, 빨간 마후라에서는 주인공 기체의 캐노피가 적탄에 깨지는 장면을 찍기 위해 실제 군 저격수가 실탄으로 캐노피를 깨트리는 위험한 촬영을 하기도 했었다.

이승만때부터 반공예술인단이 있었다. 이 단체의 단장은 바로 악명높은 임화수. 이들은 반공정신을 고취시키고 국위선양을 한다는 명목으로 설립되었지만, 그런거 없고 그냥 사실상 이승만 정권의 나팔수이자 조선청년전위대 역할을 했다. 일단 대장부터가[1] 이들은 "시민 위안의 밤"이라는것을 열어놓고 이승만이기붕이 당선되도록 시민들을 선동했다. 이들을 주축으로 꽤 많은 반공영화가 제작되곤 했다. 아니, 당시에는 그냥 별 생각없이 다들 반공영화 한두편은 찍던 시대였기때문에(...).

반공영화는 당시 상당히 표현에 있어서 자유로웠다. 상기한 운명의 손은 한국 최초의 키스신이 등장한 영화였고, 의외로 다른 영화보다 반공영화는 검열삭제에 대한 묘사가 조금 더 열려있었다고 한다. 공산당은 이렇게 부도덕한 인간말종들이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멸분으로 성교 장면이나 성고문 장면을 넣을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요즘 시대에 비하면 탈레반 수준 하지만 반공영화가 피해갈 수 없는 검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데올로기. 이만희감독은 반공영화 "7인의 여포로"를 만들었지만 오히려 용공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다. 높으신 분들의 생각보다 반공의 묘사가 약했고 표현이 애매모호 했다나... # 같은 방식의 용공논쟁은 신성일 주연의[2] 피아골에도 가해졌다. 인민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데에서 꼬투리를 잡힌 것.

아무튼 이러한 문제로 반공영화는 점점 더 북한군을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살인마로 그려야 했고, 반대급부로 폭력이나 성 묘사는 더더욱 노골적이 되어갔다. 그래서 훗날 반공영화를 보고 모방범죄가 일어나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자세한 사항은 이승복어린이 항목의 내용을 참조. 그리고 당시 성애 묘사에 관대하지 않았던 한국영화의 사정상, 반공영화는 성묘사에 제법 관대했는데, 문제는 간혹 청소년들이 이러한 영화를 보는것을 권장했다는 것이다.[3] 그래서 신문지상에서는 "반공영화는 벗기기 영화냐"라는 비판이 간혹 실리곤 했다. 심지어는 당시 국민학교에 돈을 받고(300원 정도) 학교에서 반공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는데 사람 손가락 자르기나 온갖 고문같은 장면이 적나라하게 나오는 묘사가 그대로 나왔다.

과거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반공영화를 단체 관람하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 편이 적군을 격퇴하는 장면이 나오면 자동적으로 우뢰와 같은 박수가 나왔다고 한다(...). 1960~197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전후 베이비붐 세대 어른들께 여쭤보면 이런 경험을 한 적이 한 두 번쯤은 있다고 말씀하신다.

심지어 대종상에 반공영화부문이 떡하니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966년 처음 제정된 "우수반공영화상"과 "반공영화 각본상"이 있었다. 그러나 반공영화는 늘 대부분의 계몽영화가 그렇듯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영화제작자들은 반공영화를 장사가 안 된다는 이유로 만들기 꺼려했다. 결국 정부는 반공영화 제작 촉진을 위해 "반공영화 중 우수작으로 선정이 되면 해외 영화 수입 쿼터에서 우선적으로 배정을 해 주는 제도를 만들어 버린다.[4] 그러나 이 제도는 1980년대에 폐지되어 버린다. 그러자 반공영화가 1편도 제작이 안 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

대종상의 반공영화부문은 1987년 6월 항쟁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폐지되었다.# 사실 안그래도 제작편수가 줄고 사람들이 외면해서 점점 사장되는 장르였다(...).[5] 이후 반공영화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

3 몰락

사실 반공영화 자체가, 국가주도로 의도적으로 제작이 된 점이 있다. 물론 초기의 반공영화들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처럼 전쟁의 아픔에 반공을 잘 녹여낸 수작들로 출발했지만, 가면 갈수록 한정된 소재와 검열로 인해 반공영화는 그 한계가 뚜렷해서 발전을 못 했다. 한국 영화계의 양판소 게다가 국가 주도로 반공영화기금을 조성하거나, 앞서 말한것과 같이 반공영화를 제작하여 상을 받으면 해외영화 수입 쿼터에서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게 하는 등 국가주도의 문화정책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사실, 자유주의 국가에서 대중선동을 위해 의도적으로 선전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식으로 대중동원을 하여[6] 국가의 입맛대로 국가의 사상을 강요하는건 사실 파시즘적 행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공영화는 90년대 이후로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90년대에도 가뭄에 콩나듯 간혹가다 제작이 되긴 했으나, 일단 너무도 재미가 없었다... 소재도 뻔했고, 세트장이나 특수효과도 그럭저럭이었고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너무 떨어졌었다. 90년대에는 차인표 주연의 알바트로스같은 작품이 등장하긴 했으나 이것도 시망. 사실 알바트로스의 경우는 당시 차인표, 이휘재가 군복무 중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놈의 강제동원 좀 안하면 덧나나 아 그럼 영화를 못 만들지[7]

현재는 고전적인 반공영화는 등장하지 않고 크로싱같은 탈북 난민들에 대한 영화나 북한의 수용소의 실상을 고발한 작품들에서 반공적 색채가 조금씩 나오고 있는 편이다. 현재 "북한 인권영화제"라는 곳에서 이런 영화들을 모아서 상영하고 있다고 한다.[8]

4 작품성 있는 영화

이건 감독을 봐야 한다. 임권택이나 한형모, 이만희 등등. 절대로 배우를 보면 안 된다. 그 시절에는 신성일도 1년에 영화 100편을 찍는 시절이기 때문에 배우로 작품의 질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5 목록

  1. 임화수는 반공예술인단장으로서 한국연예주식회사 사장,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 서울특별시극장협회 부회장, 한국무대예술원 최고심사위원 등의 직함도 가졌다.
  2. 신성일이 피아골에 출연했다는 정보도 확인되지 않고 신성일의 데뷔연도(1960년)와 피아골의 제작연도(1955년)도 맞지 않는다.
  3. 북한과 이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것이, 작곡가 윤이상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님을위한 교향시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온다. 이 영화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당시 광주의 상황을 황석영의 르포집을 토대로 재현했다. 이 르포집에 나와있던 내용 중 "군인이 술을 마시고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여대생들의 웃통을 벗겼다"라는 내용을 그대로 재현했다. 아마도 북한 영화중에 브라자가 나오는 유일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4. 당시에는 돈이 있다고 해서 외국 영화를 맘대로 수입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자국 영화산업의 보호라고 쓰고 검열이라 읽는다를 명목으로 외화 수입편수를 제한했고, 각 영화사마다 해외영화 수입 쿼터가 정해져있었다. 이러면 공산주의 국가랑 별로 다를바가 없잖아...
  5. 1988년에는 전체 제작편수의 5퍼센트도 안되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상을 주는게 더 웃기는 일이다. #
  6. 제작지원+국가검열+관객동원이라는 방식이 비일비재했다.
  7. 심지어 당시에는 이 영화를 보고 입장권을 제출하면 예비군 훈련의 일부를 면제해주기도 했다. # 무슨 지거리야!
  8. 그런데 이 곳에서는 위에서 말한 알바트로스를 상영한다고 한다(...)#
  9. 임권택 감독 영화. 하지만 임권택 감독이 마구잡이 찍어내기 영화를 마감하고 서서히 자기 색깔을 내던 1970년대 말엽에 만들면서 당시 온갖 시달림을 겪어야 했다. 삭제 및 편집같은 강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