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 ||||||||
안드로니코스 1세 | ← | 이사키오스 2세 | → | 알렉시오스 3세 | → | 이사키오스 2세(복위) | → | 알렉시오스 4세 |
콤니노스 왕조 | 앙겔로스 왕조 | 앙겔로스 왕조 | 앙겔로스 왕조 | 앙겔로스 왕조 |
생애 : 1156 ~ 1195
재위 : 1185 ~ 1195, 1203~1204
1 즉위 이전의 생애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앙겔로스 가문은 이사키오스의 조부인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가 알렉시오스 1세의 사녀인 테오도라와 결혼하면서 두각을 드러낸 가문으로, 과거에는 소아시아 서부의 군사귀족이었다. 마케도니아 왕조 시절 대표적인 귀족이었던 스클리로스 가문이 콤니노스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지 못하고 차차 사라진것을 생각하면 앙겔로스 가문은 알렉시오스 1세 때 실시 된 족벌주의의 덕을 많이 본 가문이랄 수 있겠다.
이사키오스는 폭군 안드로니코스 1세의 치세 때 부터 이름을 전한다. 정통성이 부족한 찬탈자인 안드로니코스는 반란에 직면한 상황이었는데, 이사키오스는 안드로니코스를 피해서 반란을 일으킨 도시 중 하나이던 니케아로 피신한 상황이었다.
당시 제국군은 콤네노스 조 100년을 거치면서 재건되고 강화되면서 지중해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 중 하나였으나, 니케아의 성벽은 도시가 쌓아올린 역사에 비견할 만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던 관계로 쉽사리 함락되고있지 않았다.[1]
그러나 농성 와중에 니케아의 정신적 지주이던 테오도로스 칸타쿠지노스가 사고로 죽는 일이 발생하자 도시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저항을 이어가고자 했던 시민들은 그나마 유력인사이던 이사키오스에게 뒤를 이을 것을 바랐다. 그러나 황제가 될 욕심도, 저항세력의 대표자가 될 용기도 없던 이사키오스는 이를 거절하였고, 구심점이 사라진 니케아는 곧 항복하게 된다. 반란에 가담했었기에 처벌을 기다렸던 이사키오스였지만, 저항파의 대표직을 거절했던 일 때문인지 목숨을 부지한 이사키오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의 위협은 다시 찾아왔다. 1195년 시칠리아 왕국의 침략이 닥친 상황에서도 안드로니코스는 공포 정치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의 살생부에 과거 반란에 가담했던 이사키오스의 이름이 올라간 것이었다.
결국 이사키오스는 공포에 질려 자신을 잡으러온 황제의 심복을 죽이게 되었고, 하기아 소피아로 도망가 교회의 보호를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시민들에게는 의기있는 것으로 비추어졌는지 폭정에 불만을 갖고있던 시민들은 이를 기회삼아 폭동을 일으켰고, 이를 통제하지 못한 안드로니코스 1세는 폐위되어 처참하게 죽게되었다. 그리고 '용기있는 의사' 이사키오스는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2 준비되지 않은 황제...맞아?
3 는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4 제위를 찬탈당하는 중입니다
5 암흑속의 복위
8년여간 반폐인으로 지냈으나, 아들인 알렉시오스 4세가 제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십자군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였고, 덕분에 그해 1203년 8월 1일 공동황제로서 복위되었다. 그러나 기력이 다했는지 다음해 1월 그는 사망했다. 다행히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몰락하는 것을 없는 눈으로 목도하기 전에 말이다.- ↑ 여러모로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에 제국은 니케아의 방어력에 굉장히 신경을 썼다. 서쪽에는 호수가 있어서 접근이 매우 힘들었고, 수백개의 망루에 수킬로미터에 달하는 성벽을 가진 니케아는 제1차 십자군 원정 때도 십자군을 난감케 했다. 그리고 한번 빼앗겼다 수복을 하고 난 이후 방어력은 더욱 강해져서 요안니스 2세-마누일 1세의 치세를 거친 니케아는 2중 성벽을 가지고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있었다. 이러한 요새로서의 방어력에 니케아 제국이 주목하여 주요한 거점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