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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李濟馬
1837(1838?)~1900
허준, 사암도인과 더불어 조선 3대 의성(醫聖)중 한명.
호는 동무(東武). 본관은 전주, 즉 왕실의 종친이지만, 서자다. 출생지는 함흥.[1]
사상의학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참고로 그는 태양인이었다고. 그래서 태양인 이제마라는 드라마도 만들어졌다.
젊은 시절에는 서자라는 출생과 부모 및 조부모의 사망으로 인해 방황하였다. 때문인지 10대에 향시(동네 시험)에서 장원했다는 기록 이후 36세까지 생의 기록이 없다고 한다.(당시에 한반도 북부 일대는 물론이요 만주나 연해주까지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다고 하는 소문이 있다.)
학문에 있어서는 30세 전후에 객사에서 발견한 한석지의 저서인 '명선록'의 영향을 받아 양명학 계열의 학풍을 띤다. 방황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36세에 무과 급제. 50세에 진해현감이 되었다 곧 사직하고, 이후 60세가 다 되어 최문환의 난을 진압하고 고원군수로 임명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다음 해 사직하였다. 이후 의술에 전념하여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한 후 곧 세상을 떠났다(향년 64세).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내가 죽고 100년이 지나면 사상의학이 세상을 풍미할 것이다"었다. 저서에 <격치고>, <동의수세보원> 등이 있다.
학문적으로는 대표적인 유의(유학자 의사)로서 유교적 세계관과 동의보감의 의학지식을 토대로 사상의학의 토대를 수립하였기에 한의학계에서는 위대한 의사로 보고 있다. 다만 그의 사상의학은 과학적 근거가 희박하다 현세에 알려져있다. 하지만 시대를 풍미했었다는 건 모두 이유가 있는 법이고, 서구화되있는게 옳은 이 세상에서 동양의 의학과 철학을 판단내리긴 이르다. (외국의 양의사들도 그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는 경우가 있다. 순전히 '과학적' 깨달음을 위해. 이유가 있을것이다.)
대체역사소설 한제국 건국사에서는 본래 무과에 급제했다는 점을 반영해 무인으로 신미전쟁에 참전한다. 현대에서 넘어간 민국인들은 그가 사상의학의 창시자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보니, 이제마가 기침만 해도 "그러게 자네는 의원이 되어야 하는데..."라고 말해, 이제마는 속으로 '민국인들은 다 좋은데 가끔 실없는 소리를 한다. 무반을 목표로 산 나보고 의원이 되라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 이제마는 자신의 지병 때문에 의술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므로 민국인들의 지적은 꽤 적절한 셈.
약 200년 후 성을 바꾸고 유럽에서 축구스타가 되었다. 용서받지 못할 드립이다
2 이제마 프로젝트
이제마의 사상의학의 객관적 근거를 마련하여 '과학화'를 이루겠다는 취지의 연구 프로젝트가 2006년부터 2015년까지의 기간 동안 1000억원의 국가예산 지원을 받아 진행되었다. 일명 이제마 프로젝트.- ↑ 사실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의 둘째아들 안원대군 이진의 후손이다. 같은 전주이씨이긴 하지만 태조의 증조부대에 갈려나와 사실상 일반 양반들과 별반 다를게 없는 상황이었다. 참고로 조선은 대군의 4세손, 군의 3세손, 공주와 옹주와 결혼한 부마와 그 자녀들 까지를 왕족으로 인정해 작위를 하사했으며 군-령-부령-정-도정-수-부수 같은 작위를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