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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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한자陽明學
표준중국어阳明学(yángmíngxué)
일본어ようめいがく(陽明学)
태국어ปรัชญาจีนสาขาหนึ่ง
영어Yangmingism/the doctrins of Wang Yangming
스페인어filosofía de Wang Yangming
러시아어субъективный идеализм Ван Ян-мина

1 개요

중국 명나라의 학자인 왕수인(王守仁, 1472 ~ 1528)[1][2]이 세운 유학의 한 학파로 주관적 실천 철학에 해당한다. 양명학이란 이름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에 확립된 것으로, 그 이전에는 왕수인의 성을 따 왕학(王學)왕 되려고 배우는 학문인가 혹은 육왕학(陸王學)이라고 하였다. 육왕학이라고 불린 이유는 심즉리(心卽理)를 중시했던 남송의 사상가 육구연(陸九淵, 1139년~1192)의 사상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왕학' 앞에 육구연의 성이 붙은 것이다.

2 사상

양명학의 사상은 <전습록>, <주자만년정록> 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양명학의 3강령이다.

2.1 심즉리(心卽理)

양명학의 윤리학적 측면. 말 그대로 마음(心)이 곧(卽) 이치(理)라는 거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순수한 선성인 성(性)과 마음의 움직임인 정(情)을 대면시킨 것이다.

2.2 치양지(致良知)

양명학의 방법론적 측면. 양지, 즉 좋은(良) 지혜(知)에 이른다(致)는 말인데, 양지에 따르는 한 그 행동은 선이 되고, 양지에 근거하는 행동은 외적인 규범에 속박 되지 않는다. 마음은 선악을 넘어서지만, 뜻에서는 선악이 태어나므로, 그 선악을 헤아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양지를 키워 선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양명학의 주장이다.

2.3 지행합일(知行合一)

주희(朱熹)에게 있어서 앎(知)과 행위(行)의 문제는 서로 구분되어 있다. 《주자어류》에서 주희와 제자의 문답을 살펴보면 “선후(先後)를 논하자면 앎이 먼저이지만, 경중(輕重)을 논하자면 실천(行)이 중하다.”고 한 대목이 있다. 주희가 격물(格物)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도 객관적인 이치를 체득한 이후에야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고, 선(善)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왕양명의 경우에는 앎과 행위의 문제가 이원적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왕양명은 ‘양지(良知)’가 이미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말했는데, 여기서의 양지는 주희가 말하는 ‘리(理)’와 다르다. 주희의 리개념이 존재론적인 실체라고 한다면, 왕양명이 말하는 양지는 지식을 체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왕양명에게 있어서 마음(心)은 도덕적 품성을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게 아니라 ‘도덕적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앎은 대상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성취’될 수 있다. 《전습록》을 보면 ‘마음 밖에 사태와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산의 꽃은 스스로 피고 지는 것 아닌가?’ 하고 물어보는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가 이 꽃을 아직 보지 않았을 때 이 꽃과 자네의 마음은 모두 적막하였다. 하지만 자네가 이 꽃을 보자마자 이 꽃의 모습이 일시에 드러났다.” 주희의 입장이라면 이미 ‘꽃’은 외재적 대상으로서 실재하는 것이지만, 왕양명의 경우에는 꽃이라는 대상이 실재하는지 아닌지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왕양명에게는 꽃이라는 대상을 지각함으로써 ‘꽃이 핀다’고 하는 지식이 완성되었고 내 마음 안의 형상으로 각인되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였다.

이와 같은 왕양명의 지식론을 살펴볼 때,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명제도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행위와 분리할 수 없다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야지, 행위와 지식의 경계를 구분하고 도덕적 실천이 도덕적 지식을 보장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왕양명이 말하는 '지행합일'이란 나의 어떤 경험적 체험이 곧 지식의 형성 과정과 일체를 이룬다는 뜻이다.

2.4 기타 사상

  • 사상마련(事上磨鍊) 일상에서 양지를 닦아야 한다는 뜻. 즉, 실제로 일(행동)을 하면서 정신을 단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또한 개념을 통한 정신단련을 강조하는 주자학과 상반된다.
  • 격물(格物) 격(格)은 정(正)이고, 물(物)은 사(事)이니 곧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 역시 주자가 격물에 대해 '사물에 임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는 즉물궁리(卽物窮理)'라 한 것과 상충된다. 전습록에 "격물하고자 며칠 동안 대나무를 바라보았더니 정신만 혼미해지더라"라는 내용의 글이 있다.
  • 욕구 사람의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사람의 욕구를 없애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욕구를 잘 다스리려고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 붕우(朋友) 인간 관계를 중시한다. 이는 붕우유신(朋友有信)을 중시하는 성리학과 비슷한 듯 하지만, 양명학은 인간 관계를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해 성리학의 부부유별(夫婦有別)과 장유유서(長幼有序)등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한국에서의 양명학

조선에서는 왕수인이 학파를 세운지 얼마되지 않아 소개되었으나 퇴계 이황이 저서인 '전습록변'에서 양명학에 대해 매우 체계적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것을 시작으로 류성룡과 같은 성리학자들의 이단 취급을 받게 되어서 한동안 주요한 학파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당대의 대 학자였던 소재 노수신 같은 경우[3] 양명학에 관심을 두고 연구해 성취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같은 학자들의 날선 공격과 그 역시 정여립의 난에 얽혀 후학을 양성할 틈도 없이 정계와 학회에서 사라졌고, 양명학을 이단시 하는 영남학파의 견제로 그의 이름은 이황이나 조헌 같은 학자만큼 알려지진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정확히는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에 의해 관념론적 이기론이 발달하면서) 장유, 최명길 등이 양명학에 대해 다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세기 초, 소론 측에 있던 정제두가 노론에 의해 축출되고 강화도로 낙향하여 양명학을 가르치면서 강화학파를 창시하였다. 이들은 주로 소론이였으며, 양명학뿐 아니라 역사학, 국어학, 서학, 문학 등도 연구하였고 실학자들과도 교류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강화학파로는 이광사와 그의 제자 이광두, 이건창 등이 있다. 박은식정인보 또한 양명학에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양명학은 청나라고증학이 발전하며 본고장에서 쇠퇴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에서도 쇠퇴하며 현재 대한민국에서 양명학은 성리학이나 실학보다 인지도가 낮게 되었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한국양명학회'에서 양명학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
  1. 당시 역법에 따르면 성화(成化) 8년 ~ 가정(嘉靖) 7년
  2. 호는 양명(陽明). 양명학이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3. 당시엔 퇴계 이황과 어깨를 견주던 대 학자였다. 주일론을 지지 했으나 주리론도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고 판단 했으며 고승들과의 교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