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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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浚 (1539-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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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영정은 현대에 그려진 상상화다.]

1 개요

조선 역사에 길이 남을 명의.
한국 한의학 발전의 지대한 공헌자.

조선 중기의 명의. 자는 청원(淸源)이고 호는 구암(亀巌)이다. 본관은 양천으로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2동)에서 출생한 걸로 알려져 있었으나 현재 서지학계(서지학자 이양재씨 주장)를 중심으로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현재 파주시)에서 출생했다는 학설이 등장해 논란 중에 있다.
양천허씨 시조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우수사를 지낸 허곤(許琨)이며 아버지는 용천부사를 지낸 허륜(許碖)이다. 어머니는 허론의 소실 영광 김씨다. 이복형으로 허옥(許沃)이 있으며, 바로 아랫동생인 허징(許澂)[1]은 같은 어머니가 낳은 동복형제로, 허준은 허륜의 차남이다.

소설에서는 그가 서자라 설움받고 가난하게 지내며 경상도의 명의 유의태에게 의학을 배웠다고 나오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상의 이야기일 뿐이다.[2] 허준이 어디서 어떻게 의학을 배웠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할아버지, 아버지의 관직과 동생의 혼인관계, 후술할 내의원에 들어가게 된 경위등을 고려하면 실력과 별개로 탄탄대로 금수저였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서얼이 사회적 불평등은 제쳐두고 집안에서 어떻게 대우받는지는 지역, 아버지와 집안의 성향 등에 따라 좌우되는데 아버지가 차별을 두지 않으면 홍길동전은 다른 세상 이야기가 되는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전직 영의정 딸과의 혼인이 개인의 능력만가지고 될 거 같은가? 허준집안은 서자라고 특별히 차별을 두지 않는 가풍이였을 것 이다. 심지어 족보가 잘못된 거고 허준은 서자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선조대의 관료이자 학자인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의하면 1569년에 유희춘 자신이 허준을 이조판서 홍담에게 내의원에 천거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이 있고 1573년에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것으로 보아 1569년에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보여진다.

태어난 해도 90년대만 해도 1546년으로 알려지기도 하다가 수정되어 1539년생으로 보통 표기를 하고 있다.

1575년부터 선조를 진료하는 의원이 되었고 1578년에는 내의원 첨정에 올랐으며 1587년에는 어의 양예수와 함께 선조를 치료하여 호피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1590년에는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하여 그 이듬해에 당상관에까지 오르게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고 모셔서 전후 호성공신 3등에 제수되었다.[3] 드라마 등에서 의료기록을 빼내서 늦게 선조에게 도착한 탓에 선조가 삐쳤다는 내용은 창작이라 보면 된다.

1596년에는 광해군의 천연두를 고쳐 종2품의 가의대부에 제수되었다.

이 때부터 선조의 명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발발로 중단했다가 1600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편찬을 할수 있게 되었다. 1606년에는 양평군에 제수되고 정1품 품계인 보국숭록대부까지 오르게 되었지만 중인에게 너무 높은 직책이라는 대간들의 반발로 제수가 잠시 보류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품서용 원칙이 적용되는 잡과 급제자는 정3품 당하관이 승진의 끝이다. 게다가 허준을 제외하면 잡과 출신으로 정1품까지 승진한 사람은 조선시대 500년을 통틀어 역관 출신인 오경석이 유일하다.

게다가 오경석은 개화기 직전의 사람이다. 즉 선조, 광해군(1500년대 말 1600년대 초)때 활약한 허준이 최초가 된다. 어찌 되었든 중인의 몸으로 정1품에 오르는 것이 논의될 정도이면 허준이 엄청 대단한 것이 맞다. 아무리 지체 높은 명문가의 자제라고 해도 정1품에 오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능력과 처세, 심지어 운까지도 겸비되어야 하고, 그조차도 바늘구멍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중인이 그 자리까지 오르는 것이 얼마나 극악의 난이도일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4] 현대로 비유하자면 9급 공무원 출신이 총리까지 승진하는 수준.

당시에도 백성들 사이에서 허준의 입지전적인 출세 스토리는 굉장한 화제가 되었다고 하며, 이것이 백성들 사이에 계속 회자되면서 허준 설화가 전국 곳곳에서 전해지는 계기가 된다. 이런 허준과 관련한 설화 혹은 전설들이 우리가 아는 소설과 드라마의 소재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1608년에 선조가 사망하면서 어의인 그는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원래 왕이 승하하면 책임을 맡았던 어의는 형식적으로 귀양을 갔다가 곧 풀려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곧바로 풀려나서 광해군의 어의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1610년에 "동의보감"의 편찬을 완료했다. "동의보감"은 당시의 조선과 중국의 모든 의서를 참고하고 허준의 연구가 더해져서 완성된 의학백과사전으로 나오자마자 조선, , 일본에서 엄청난 히트를 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마다 북경의 서점에서 "동의보감"이 팔리고 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다.

이후 각종 의서 편찬에 매진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나라의 재건을 위한 의학자로서의 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615년에 77세로 사망하여 생전에 보류되었던 정1품 양평부원군 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되었다. 허준의 직계 자손들은 현재 북한에 거의 남아 있어서 자세한 파악이 되어 있지 않다.

참고로 동의보감과 다른 한 권을 제외하면 전부 전염병 관련 저작이다. 드라마에서는 침술의 달인으로 곧잘 나오지만 실제로는 역병의 예방 및 치료가 주 분야였다. 실제로 실록에서도 허준 본인이 선조에게 직접 소신은 침 놓는 법을 모르옵니다라고 폭탄 발언(?)을 한 기록도 있다.

이 이르기를 "침을 놓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허준(許浚)이 아뢰기를,

"증세가 긴급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 차례 침을 맞으시는 것이 미안한 듯하기는 합니다마는, 침의(針醫)들은 항상 말하기를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熱氣)를 해소시킨 다음에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소신(小臣)은 침 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마는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허임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經脈)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阿是穴)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하였다. - <선조실록> 선조 37년(1604년) 9월 23일

물론 침의가 따로 있으니 겸양의 의미겠지만 주 전공은 아니었던 것. 굳이 현대 의학으로 비유하자면, 실력있는 내과 전문의가 외과 수술 실력은 부족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당시의 침술이 현대의 외과 수술과 같은 것은 아니니 주의.

허준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에 위치해 있다. 아쉽게도 이곳은 민통선 지역이라서 방문하기는 쉽지 않다.

2009년, 동의보감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다만 등재이후 '의서로서는 세계최초'같은 보도기사가 나왔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타밀 의료기록 모음집과 디오스쿠리드 필사본 등의 의학서적이 이미 199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만 해도 광영인데 괜히 사족을 붙였다가 찬물을 끼얹는 케이스. 물론 이것이 동의보감의 역사적 가치를 깎지는 않는다.

다만 명심해야 할 것은 위에 나와있듯이 동의보감은 선조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편찬되었으며 허준의 단독저작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공동 작업으로 당대의 여러 명의들이 왕실 서고와 민간에 떠돌던 수많은 의서들을 참고하여 제대로 된 것을 추려내고 자신의 의학관과 경험을 첨가하여 작업한 것이다. 오늘날 허준의 단독저작인냥 취급받는 것은 전란으로 어의들이 모두 흩어지며 중지된 작업을 전쟁 후 허준이 마무리 한 덕이다.

2 허준 선서

한국 한의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니만큼 전국 한의과대학에서 본과진입식이나 졸업을 할 때 이 허준 선서를 외우게 된다. 서양의학의 시조 히포크라테스의 이름을 딴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비슷하다.

1.나는 나의 한평생을 보람있게 살겠으며 한방 의료의 직무를 충실하게 이행 할 것을 하늘에 맹세 하겠나이다.

2.나는 타인에게 해가 되는 행위는 일체 하지 않겠나이다.
3.나는 한의학의 학문 및 임상을 크게 향상시키기 위해 나의 전력을 다하겠나이다.
4.나는 나의 환자의 비밀을 굳게 지키겠나이다.
5.나는 의사로서 인류를 위해 성실히 봉사하겠나이다.
6.나는 나의 동료들과 선배 스승들과 상호 친밀 협조로서 어상의 질서를 지키겠나이다.
7.나는 환자의 몸을 내 몸과 같이 여겨 생명이 다 할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여 치료하겠나이다.
8.나는 한의사로서의 긍지와 인격을 지니겠나이다.

3 문화계의 허준 해석

4 역대 허준 드라마

  • 1976년 MBC 드라마 집념 : 故 김무생, 이순재 주연. 최초의 허준 드라마로 이은성 원작의 "소설 동의보감"의 모태가 된 작품. 故 김무생 씨가 허준 역이었고 이 때 이미 이순재씨가 스승 유의태역이었다. 뒤에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는데 이번엔 드라마에서 허준의 스승 유의태로 나왔던 이순재 옹이 허준 역이었다.
MBC 월화 드라마
내 마음은 호수동의보감약속
  • 1991년 MBC 드라마 "동의보감" : 서인석, 이순재, 이응경 주연. MBC 창사 30주년 기념 특집드라마로 14부작으로 방송되었다.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에 기반한 작품으로, 원작소설이 3/4 직전 시점에서 완결되지 못하여(작가 타계) 후반부(임진왜란 중엽부터)는 드라마의 오리지널 전개로 이루어졌다. 허준의 귀양과 동의보감의 완성으로 마무리되었다.
MBC 월화 드라마
국희허준뜨거운 것이 좋아
MBC 일일 사극 드라마
없음구암 허준제왕의 딸 수백향
  • 김재철 사장의 언급에 의하면 2013년 방영을 목표로 허준2가 준비중이었다고 한다. 초기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후속작이 아닌 리메이크로 일일 사극 드라마로 방영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정식 명칭은 구암 허준으로 기존의 허준 드라마에서는 볼수 없었던 허준의 어린시절부터 시작하는 리메이크 드라마가 될 것이라고...계백을 연출한 김근홍 PD[5]와 이전에 허준을 집필했던 최완규 작가가 나설 것이라고 한다. 허준 역에는 김주혁, 유의태 역에는 국내 최고의 스승 백윤식이 확정되었다.
  1. 이쪽도 형 못지 않게 비범한 인물이다. 일단 허준이나 허징은 족보에는 서자로 표기되어 있다. 그럼에도 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시절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의 딸과 결혼까지 한다.
  2. 애초 에 유의태 라는 사람은 가공인물 이고 그 모델이 될듯한 유이태라는 인물은 한참~(150년뒤 숙종대)후 의 인물이다.
  3. 흔히 선조를 하나하나 다 끄집어내어 어거지 까지 동원해서 까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밥! 인 호성공신 항목 에서도 허준 만은 안건드리는 경우도 있다. 전부다 싫지만 이거 하나는 인정! 의 느낌 이랄까?..
  4. 박문수이순신 도 살아서는 정1품 이 되지 못했다.
  5. 허준 때 조연출을 담당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