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鍾南
1936년 9월 30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감사원장. 법무법인 세종의 창설자. 변호사와 공인회계사 자격을 모두 가진 사람으로서, 검사 시절에는 대한민국 '경제사건 수사'의 간판으로 꼽혔다.
2 생애
2.1 초년시절
1936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13대 직계 후손으로 태어났다. 덕수상업고등학교[1]를 나와 1957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고, 1961년에 졸업하였다.
1960년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이때 함께 합격한 사람이 김기춘, 박찬종이다.
2.2 검사시절
1964년부터 검사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사법시험만이 아니라 공인회계사 시험에도 합격할 정도로 법학, 회계학을 아우르는 지식을 갖추어 특히 경제범죄의 수사에 베테랑으로 활약했다.
1974년 통영지청장으로 근무할 때 통영 YTL 침몰 사건를 수습하였다. 그 외에도 검사 근무시절 대한민국 '탈세사건 수사'의 기틀을 잡은 것으로 유명했다.
이후 1982년 대검찰청에 초대 중앙수사부장으로 임명되었다. 대검 중수부장으로 있으면서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을 수사하였다. 그 후 박동명 (朴東明) 사건.여수 밀수사건.백화양조 탈세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을 매끄럽게 처리했다.
1985년 법무부차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1987년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축소 파문에 따라 서동권 검찰총장이 경질되자 후임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1988년까지 검찰총장으로 일하였다. 당시 국무총리,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등이 한꺼번에 바뀌어 어수선했던 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 조직을 추스리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2.3 검찰을 떠난 후
검찰총장직을 그만 둔 후, 1989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법과대학 객원교수가 되었다. 그러다가 1990년에는 법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변호사 개업을 하고 1995년부터 4년간 한국공인회계사회장을 함께 지냈다. 1995년에는 신영무 변호사 등과 함께 법무법인 세종을 창설하고, 4년간 법무법인 세종의 대표변호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권 때인 1999년 한승헌의 뒤를 이어 제18대 감사원장에 임명되었다. 공직을 떠난지 무려 8년만에 임명된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화제를 모았다. 그 후 2003년까지 무려 4년 동안이나 감사원장으로 일하였다. 특히 공기업에 대해 강도 높은 감사를 벌여, 김대중 정부의 공기업 개혁에 기여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현재는 법무법인 세종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3 트리비아
취미는 태권도. 대전지검에 평검사로 근무할 때 위장 치료를 위해 배웠는데 3단까지 땄다.
좌우명은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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