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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건 개요
42년 전 군대에서 벌어졌던 세월호 참사
1974년 2월 22일, 오전 11시 경상남도 통영(당시 충무) 앞바다에서 해군 항내 예인정(YTL)이 침몰해 해군과 해양경찰 전경(현 국민안전처 의무경찰) 훈련병 159명(해군 109명, 해경 50명)이 숨졌던 대참사. 대한민국 해군 역사상 최고의 수치이다. 참고로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전시가 아닌 평시 해난사고 중 세계 해군 사상 가장 많은 인명 손실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날 사고는 해군신병 159기와 해경 11기 훈련병 311명이 해군병 훈련의 8주차 훈련의 일환인 충무공 전적지 견학과 충렬사 참배를 하고 돌아가기 위해 YTL을 타고 모함인 전차상륙함 LST-815 '북한함'으로 이동하던 중, 갑자기 몰아닥친 파도를 피하기 위해 YTL이 급선회를 시도하다 균형을 잃고 전복, 침몰하면서 비롯되었다.
2 사고 원인
단순한 해양 사고로 보기엔 인재라고 볼 수 밖에 없는 부분이 많다.
- 당시 통영은 폭풍주의보가 내려진 상태였다.
- 그런데 밤톨만한 YTL을 타고 충렬사 참배를 강행한다[1]
- 게다가 그 YTL의 정원은 150명. 한 마디로 정원의 2배가 넘는 사람이 타고 간 것이다.
- 거기에 정장의 미숙한 조함운영이 더해져 사고로 이어진다.
- 훈련병들이 민무늬 전투복에 전투화 차림이었던 것도 사상자를 늘리는 데 한몫했다. 물에 빠지면 헤엄에 방해가 되는 신발을 신속히 벗어야 하는데, 목이 긴 전투화는 이것이 불가능했기 때문.
이를 통해 1974년 YTL 침몰 사고의 원인은 1993년 10월 10일 전북 부안군에서 일어난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의 원인과 대부분 유사하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40년 후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도 비슷하다.
3 사고 이후
사고 직후 당시 정부는 해군참모총장 김규섭 제독과 참모차장을 경질하고 진해 해군교육단장과 신병훈련소장을 직위 해제하는 한편 훈련소 대대장 등 인솔 책임자 3명을 구속,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여기까지는 정말 좋았으나...
사고의 특성[2] 때문에 당시 국방부 검열단 및 해군은 과다인원승선·태풍주의보 발생시의 훈련강행·조타사의 급회전 등의 과실부분은 숨기고 서둘러 유족들을 회유[3]해 국립묘지 안장과 약간의 군사원호를 지급하는 조건에서 봉합했다. 또한 당시 구속된 교육단장이나 신병훈련소장 등 핵심지휘부는 별다른 책임없이 풀려났고 훈련대장(중령)이하 중대장 소대장 조교 등 인솔책임자 역시 복직해 만기전역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사고친 사람은 책임없이 사라지고 159명이 어른의 사정에 의해 죽어간 것이다.
군사정권으로도, 해군으로서도 숨기고 싶은 흑역사이기 때문에, 지체없이 국가에서 위령제를 지내준 제2연평해전의 전사자와는 달리 근 30년간 유족들과 생존자들은 침묵 속에 자체적인 모임을 통한 위령제를 지내야 했다. 전자처럼 정치적으로 이용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이 국가와 대한민국 해군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은 군사정권이 작살나고도 10년이 더 흘러 1998년이며 그때부터 통영 해군 전우회와 함께 합동위령제를 주관해오고 있다. 또한 2004년, 사고에서 살아남은 동기생들이 주축이 되어 '해군 해경 159위 위령탑 건립위원회'가 발족하면서 통영시와 함께 사고 현장에서 1㎞ 떨어진 정량동 망일봉에 위령탑을 건립하게 된다.
이 사건 이후로 특히 한국 해군은 함정에서의 전투화 착용을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엄금하고 있으며, 신병 및 부사관 교육 과정의 마지막에 행하는 함정 견학도 훈련복이 아닌 근무복 및 해상병전투복 차림으로 행한다.
해군신병 159기에서 159명이 죽었다는 소름끼치는 우연의 일치로 더욱 잘 알려졌다. 해군 내에서는 159기는 실무에서 어떤 선임도 터치를 안 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전 봉은사 주지인 명진 스님의 동생이 이 사건으로 희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4 같이 보기
- ↑ 당시엔 신병 훈련과정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사고 후 폐지되었다. 현재는 부사관후보생과 장교 양성과정에만 남아있다.
- ↑ 당시 박정희 정권이 국민의 구심점으로 삼았던 충무공의 사당 충렬사를 참배하다가 일어난 사고인데다가 대자연의 장난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명확했던 인재인 점, 게다가 군 사고에 민감했던 군사정권 집권 시기에 일어난 사고
- ↑ 유가족들의 태도가 워낙 강경했던데다 언론을 통해 크게 알려져서 유가족들을 강압적으로 대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얼마나 흉흉했는지, 김규섭 제독의 후임으로 사태를 수습하던 중이었던 황정연 제독의 관용차가 거리에서 습격당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진해에서는 근무복 차림으로 출퇴근하다 시민들에게 봉변당하는 해군 장교들이 속출하는 바람에 한동안 사복 차림으로 출퇴근하라는 공문이 나오기도 했다. 인구의 반이 해군과 해군 가족들인 진해 분위기가 이 정도였으니, 대중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격월간으로 발간되는 해군지에 실린 관련 회고문에선 "진해가 무법천지가 됐다."는 언급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