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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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할렘 브룬틀란 | ← | 이종욱 | → | 마거릿 챈 |
1945년 4월 12일 출생 ~ 2006년 5월 22일 뇌출혈로 급서. 향년 61세.
전 WHO 제6대 사무총장.
서울 경복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며, 미 하와이 주립대 대학원 졸업.
평생을 의료봉사에 몸바친 위인. 의대 재학시절부터 경기 안양시 나자로 마을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봉사를 하였으며 부인인 일본인 레이코 여사와는 여기서 만나 결혼했다고 한다. 1976년 대학졸업후 부부가 함께 태평양 피지로 가 빈곤환자에 대한 봉사활동을 시작, 1983년에 WHO 남태평양지역 사무처 나병퇴치팀장으로 근무하면서부터 WHO와의 인연을 맺게 된다. 이때의 봉사로 '아시아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을 얻기도.
이후 WHO 남태평양지역 사무처 질병예방관리국장, 예방백신사업국장, 정보화담당팀장 등을 거쳐 결핵관리국장으로 있으면서 2003년 1월말 7차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끝에 마침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제6대 WHO 사무총장 자리에 취임하게 된다.
취임당시 연설은 아래와 같다.
"We must do the right thingsWe must do them in the right places
And we must do them right ways"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올바른 장소에서 해야 하며
올바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참고로 예방백신 사업국장 시절 소아마비 유병률을 세계인구 1만명당 1명 이하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올려 ‘백신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취임당시 그의 공약은 300만명의 에이즈 환자에게 치료제를 보급하는 거였는데, 주변은 실현되지 못할 거라고 우려했는데 그에 대한 그의 답변은 이러했다.
"안된다고 생각하면 수많은 이유가 있고 그럴듯한 핑계가 생기지. 시작하기도 전에 고민만 하다간 아무것도 못해. 옳은 일만 하면 다들 도와주고 지원하기 마련이란 걸 명심하라고."
결국은 우려대로 100만명에게만 보급하고 나머지 200만명에게는 보급하지 못 했다고 한다. 그렇게 실패한 후 그의 말은 이러했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며, 재정지원도 늘어나지 않아.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지.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 실패는 훨씬 큰 결과를 남기는 법이야.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거야."
이러한 사건을 통해 그는 'man of action'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이 일을 통해 아프리카 에이즈 환자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완전한 실패는 아닌 듯하다.
연 30만km를 비행하며 150일을 출장다녔지만 비행기는 항상 2등석 이용에 수행원은 2명만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자기 집도 없었으며 전용차는토요타 프리우스 2세대였다고..차에 대한 말은 이랬다.
"세계인의 건강을 책임지는 WHO사무총장이 환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잖아. 그리고 스위스나 유럽에서는 내가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타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 사무총장이나 직원 누구라도 차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능력으로 승부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렇게 빈한한 생활을 한거에 대한 대답은 이러했다고 한다.
"우리가 쓰는 돈은 가난한 나라 분담금도 섞여 있다. 그 돈으로 호강할 수 없다."
2004년 AI확산방지, 소아마비와 결핵예방, 흡연규제 등 탁월한 업적을 인정받아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꿈이 있고 열정이 있는 젊은이를 좋아했던 그는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화려한 외교관을 상상하지 마라. 그리고 편협한 인종주의와 속좁은 애국심같은 것으로는 국제기구에서 견디기 힘들다. 더군다나 열정없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죄악이다."
비교적 짧은 생애가 아쉬운 인물로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세계인의 건강에 공헌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생애는 지식채널ⓔ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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