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

1 離職

고용주와 피고용자 간 고용관계가 끝나고 피고용자가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경력직 항목 참조.

2 李稷

1362년 ~ 1431년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문신이다. 자는 우정(虞庭)이고 호는 형재(亨齋)이다. 증조부는 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이고, 할아버지는 검교시중 이포(李褒)이며, 아버지는 이인민(李仁敏)이다.

1377년(우왕 3) 16세로 문과에 급제해 고려 조정에서 문신으로 활동하였다.

1392년 이성계 추대 및 조선 건국에 참여해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주)조선으로 이직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던 그때 정도전, 남은, 심효생, 장지화 등과 함께 모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안군 이방원이 이끄는 정변군의 습격을 받았다. 결국 정도전, 심효생, 장지화 등은 그자리에서 살해되었는데[1] 이직은 급히 하인의 복색으로 갈아입고 도주해 목숨을 건졌고 이후 정안군에게 용서받아 다시 관직생활을 하였다.

1415년 태종황희와 함께 충녕대군(세종대왕)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 성주에 안치되었고, 이어서 민무휼, 민무회 옥사사건에 연루[2]되어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직첩이 회수되었다. 이후 귀양지에서 오는 손님도 물리치고 조용히 책만 읽으면서 지냈고 1422년(세종 4년) 풀려 나와 1424년 영의정에 올랐다.

다음과 같은 시조(時調)가 유명하다. 조선 건국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2.1 미디어에서의 표현

용의 눈물에서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첫등장을 해서 궁문을 들어서다 정안군이 매복시킨 장사들이 휘두르는 철퇴에 맞아 사망했다.[3] 그런데 제작진이 이게 뒤늦게 역사왜곡임을 알고 이직을 다시 되살렸고 배우도 이우석으로 바꾸었다. 한국 사극 역사상 초유의 등장인물이 죽었다 살아난 헤프닝이라 할 수 있다. 이직은 이후에는 그냥 그럭저럭 등장하는 조정관료 정도의 역할로 나온다. 정승까지 오르긴 했지만 실제 역사대로 사위인 민무휼의 옥사에 연루되어버렸고, 사위들이 국문을 받는 현장에서 태종에게 삭탈관직 크리를 맞아 귀양길에 올랐다. 이후에는 실제 역사대로 세종 즉위후 관직을 돌려받아 한양으로 돌아와 영의정에 복귀한 것이 나레이션으로 나온다.

사실, 조영무가 태종의 궁녀를 취해버린 사건에 간접적으로(...) 한 껀한 전적이 있다. 당시 극중에서 하륜, 이직, 조영무 삼정승이 기방에 들러서 술 한잔 하던 중 조영무가 나이먹고 너무 무료하다고 하자 같이 술을 마시던 우의정 이직이 "그럼 첩을 한명 들여보는건 어떠시오?"라고 첩장가를 제안한 것. 문제는 그 때 그 제안을 듣고 실행한 조영무가 하필이면 모종의 이유로 궁밖에 잠시 나와 있던 태종을 시중들던 궁녀였던것. 결국 조영무는 태종이 비상 소집 훈련 후에 삼정승들과 모여 얘기 하던 중 태종에게 불호령을 들어야했다.
  1. 남은은 이때 도망치는데 성공했지만 이미 상황이 뒤집혀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걸 직감하고 다시 되돌아와 최후를 맞았다.
  2. 민무휼이 그의 사위였다.
  3. 이때 이직의 이름이 정안군이 만든 살생부에 올라 있었고 정안군이 이직의 죽음을 확인하고 이직의 이름에 사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