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국회 서울 양천구갑 국회의원에 대해서는 황희(정치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경상북도 상주에 있는 옥동서원 소장 영정을 모사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정. 황희가 62세 되었을 때(1424) 그린 원본을 베껴 그린 것으로, 당대에 얼굴을 그린 초상화이기 때문에 표준영정이 필요없는 몇 안되는 위인이기도 하다. | 그러나 표준영정이 있다는게 유머. 이것은 위의 원본을 1844년에 옮겨 그린 진안 화산서원 소장본인데, 원본이 아닌 이 영정을 문화재청에서 표준영정으로 지정해 버렸다. 단종대 이전까지 조선의 관복에는 흉배가 없었기 때문에 최소한 쌍학흉배가 저런 양식으로 묘사되는 18세기 이후에 그려진 초상임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고, 게다가 황희가 관복에 흉배를 부착하는 사안에 대하여 '사치하는 풍조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는 실록의 기사를 생각해본다면 완전히 고증오류로 범벅이 된 영정이다. 그나마 20세기에 그려진 상상도보다는 낫겠지만 |
국적 | 고려→조선 | |
이름 | 황희(黃喜) | |
생몰 | 음력 | 1363년(고려 공민왕 12년) 2월 22일 ~ 1452년(조선 문종 2년) 2월 8일 |
양력 | 1363년 3월 8일 ~ 1452년 2월 28일 | |
본관 | 장수황씨 | |
자 | 구부(懼夫) | |
호 | 방촌(厖村) | |
초명 | 도야지(都耶只)/수로(壽老)[1] | |
시호 | 익성(翼成) |
조선의 역대 영의정 | ||||||
구종길 | ← | 황희 | → | 하연 |
목차
1 개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치가.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상. 영의정에 18년, 우의정 1년, 좌의정 5년까지 합치면 총 24년간 정승의 자리에 있었다.[2]
세종 시대라는 태평성대를 이끌었고 그 시대의 주역으로 활약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기도 한 훌륭한 정치가이자 능력있는 공직자였지만, 반면 청탁 때문에 수차례 사직 권고를 받고, 뇌물을 좋아하는 등 도덕성에 흠이 있던 인물.
2 일생
황희일대기를 다룬 힛갤 만화 다만 두문동 전설같은 야사나 지어낸 이야기들도 마치 사실인것처럼 포함되어 있으니 그 점을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2.1 정승이 되기까지
본관은 장수(長水). 군호는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1363년 개성에서 고려왕조 자헌대부 황군서과 용궁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황군서의 얼자, 즉 천민 첩의 자식이다.[3]
고려 말에 음서로 14살(!)에 녹사[4]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다가 같이 은거한 고려 신하들로부터 "우리야 절개를 지켜도 백성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아직 젊고 앞길이 창창한 황희 너는 나가서 일해라." 고 설득당해서 다시 출사했다는 설이 있으나[5] 이는 낭설이다. 이에 관해서는 내용이 긴 관계로 밑에 별도 단락으로 설명.
정종 시대에는 자신이 볼 때 "이건 아니다."고 생각한 문제는 임금의 명령이라도 거부하는 완고함 때문에 여러 번 벼슬에서 파직당하는 등, 그렇게 관직 생활이 평탄하지 못했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하자 태종의 지신사(도승지)였던 박석명의 천거를 받아, 박석명의 후임으로 태종의 지신사를 지내게 되면서 관직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태종은 황희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4년 동안 지신사 직에 붙잡아 두어 크게 중용했다. 지신사는 임금에게 가장 가까운 직책으로 보통 자리가 아니다.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던 태종에게 이 정도로 중용받을 정도면 그 능력은 입증된 셈. 문제는, 지신사 직이 왕의 직속인 만큼, 당시에 무지막지하게 빡센 직책이었다. 더군다나 그 유명한 태종의 지신사라면... 이후 6조 판서직을 주욱 역임했는데, 글자 그대로 이조, 호조, 예조, 형조, 병조, 공조판서직을 모두 역임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행정자치부, 산업통상자원부, 국방부, 외교부, 교육부, 국토교통부,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역임했다고도 할수 있겠지만 이 당시는 지금같은 20개 가까이 되는 장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딱 6개였다. 이조가 행정자치부도 되지만 나라 인사에 관한 모든 행정 업무를 말했다. 호조의 경우 산업통상자원부를 한정지을것이 아니라 재무부 경제기획원 세무청 등등 나라의 돈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담당했다. 기타 등등 예조의 경우도 교육과 외교의 모든 업무를 담당하였고 형조의 경우도 모든 형벌사항에 관하여 담당하며 지금으로 치면 법무부 검찰청 등등이며 병조 공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국방과 치안유지의 모든 업무, 건설과 산업에 관한 모든 업무를 담당하였다. 결론적으로 6부 판서를 지냈다는 이야기는 현대로 따지면 정부 장관을 모두 역임하고 청와대 비서실장과 국무총리까지 지냈다는 소리가 된다.[6] ㅎㄷㄷ 그 정도로 국정 전반에 대해 훤히 꿰고 있었다는 소리. 태종은 이런 말로 황희에 대한 신뢰를 표현했다고 한다.
"이 일은 나와 경(황희)만이 홀로 알고 있으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곧 내가 한 짓이다." -<문종실록> 문종 2년 2월 8일 황희의 졸기(卒記)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태종에게 신임받았으나, 폐세자 건이 나왔을 때 양녕대군을 두둔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파직되고 만다. 태종이 말하길 "너 민씨들에게 미움 산거 만회하려고 세자 편 들었지?"라고 꾸짖었고 황희가 그런 것이 아니라 세자가 너무 가여워서 그랬다고 변명하자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대만은 날 따라 죽겠다고 할 정도로 널 믿었는데 이럴 수가 있냐? 시골에 가서 노모나 모시고 살아라!"라고 내쫓아 버린다. 그러나 황희를 아끼고 높이 평가한 태종은 세종대왕이 즉위하자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민씨들에게 미움산거 만회하려고" 라는 말은, 실록에 의하면 민무구 민무질 등을 죽인 것은 지신사 시절의 황희가 주모했다고 하였다. 즉, 태종과 쿵짝쿵짝했겠지만, 당시 조정에서는 민씨 집안을 박살낸 장본인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러한 극비 정치적 사안을 함께 의논할 정도로 태종의 신임을 받았던 것이다.
2.2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리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후 세종에게도 중용되어 강원도의 기근을 해결하는 데 공을 세웠고 이 때의 행정 능력을 인정받아 마침내 좌의정에 오르는 것으로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 1431년 69세 때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조선의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이후 1449년 87세(!)에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기까지 18년 간 영의정에 있으면서 세종을 훌륭히 보좌하여 농업, 예법, 군사, 법령 등 각종 국정에서 세종의 정치고문이자 명재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 명성을 떨쳤다. 벼슬살이만 73년을 했다.
이 시대는 황희와 맹사성의 투톱 체제로 유명한데, 황희는 보수적이고 강직한 스타일로,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나간 면이 있었던 세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대국을 보는 시각이 뛰어났고 당대에 알아주는 대인배로 범죄 사건에도 너그러움을 위주로 처리했다. 이를 보여주는 좋은 사건이 관노였던 장영실을 관직에 올려 일을 시키고자 세종이 논의를 하였을 때 다른 중신들은 모두 반대하였지만 당시 이조판서에 있던 황희만이 찬성했다는 것도 그의 대인배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강직, 분명, 정확한 스타일의 인물로 주로 추진력과 결단력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다(정사) 그 강한 결단력, 추진력과 6조 판서직을 모두 수행하면서 축적된 노하우가 결합되어 정책 회의 때마다 주목할 만한 의견을 자주 냈고, 복잡한 토론을 거쳐도 결국 황희의 안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7]
그리고 원만한 성품의 동료 정승 맹사성은 황희의 이런 강직함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고, 주로 융통성과 센스가 필요한 일처리에 능한 편이었다.
2.3 흑역사
이렇게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대쪽같고 강직한 성품 답지 않게 의외로 사적인 일이 관련되면 사고도 자주 쳐 구설에 종종 올라 곤욕을 치뤘던 흑역사가 많다.
사위인 서달이 시골을 지나다 아전이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하지 않고 바삐 지나가자 건방지다고 잡아 두들겨팼고 그의 동료 아전이 항의하자 같이 팼는데 너무 많이 맞은 아전이 걷지도 못하자 "저놈이 낮술을 했구나! 버르장머리를 고쳐줘라!" 라고 더 때리는 바람에 시름시름 앓던 아전은 그대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지방 관아에서 사건의 전말을 조사했는데 어렵지 않게 정황이 밝혀졌으나 문제는 서달의 장인은 당시 좌의정인 황희, 거기에 서달의 아버지도 병조판서였다. 수령은 중앙이 아닌 황희에게 먼저 보고를 올렸고 황희는 사위를 구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작에 나서게 된다.
이 때의 행각을 보면 매우 심각했다. 피해자의 처를 협박하고 뇌물을 써서 그 친족을 회유하거나 일의 처결을 맡은 지역 수령을 맹사성과 힘을 합쳐서 동향이라는 연고를 내세워 압력을 가하고 급기야는 사건의 전말을 왕에게 올리는 상주문을 도중에 짜고 가로채는 짓까지 저질렀다. 그리고 주변과 입을 맞춰 사건 내용을 조작했는데, 이에 연루되어 조작에 가담한 관리가 수십명에 달한다. 원래대로라면 이들의 계획대로 사건이 조작되어 황희의 사위는 별일 없이 넘어갔겠지만, 그들의 상대는 세종대왕이었다.
세종은 조작되어 올라온 상주문을 읽어보고 이상한 점을 깨닫고 의금부에 조사를 명하였고, 결과 진상이 백일하에 밝혀졌다. 이 때 황희와 맹사성 뿐만 아니라 이 때 관련된 주변 벼슬아치들은 곤장크리와 유배크리를 맞는 등 장난이 아니었다. 윗사람 뒷처리하다가 아랫 사람들도 덩달아 피본 셈. 그리고 뇌물 사건과 청탁 혐의로 종종 탄핵당하기도 했다. 또한 처남들의 위법 행위를 감싸주기 위해 다소 구차한 변명으로 세종에게 호소해 이들을 구해준 적도 있고, 관청에서 몰수한 아들 황치신의 과전을 돌려주려고 세종에게 개인적으로 글을 올린 적도 있다. 이런 행적을 보면 자식과 친인척에 관련된 일에는 물불을 안 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서자 황중생이 세자궁에서 일할 때 금잔 등을 훔치다가 적발된 다음 조사 과정에서 차남 황보신은 더 많이 훔쳤다는 것이 걸렸으며, 황보신의 땅이 압수되는 과정에서 황치신이 황보신의 기름진 밭을 자신의 돌밭으로 바꾸려다 또 걸리는 등 집안이 제대로 개망신을 당하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자기 아들이 아니라며 황중생의 성을 조씨로 바꿔버리기도 했다. 이건 대인배라는 평가에 걸맞지 않은 행동. 그래놓고 황희는 더 많은 잘못을 저지른 황보신은 그냥 냅두고 황중생만 화풀이하듯 족보에서 파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 황희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자세한 사건의 전개를 보면, 황중생의 경우는 황희와 절의 여종 사이에 태어난 서자인데 워낙에 무능해서 그냥 놀고 먹었다[8]. 결국 황희라는 아버지 이름값으로 문종이 기거하는 동궁전에 세자 친구 격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다른 것도 아니고 궁중의 창고의 물건을 훔쳐서 집에 가져간 것이 발각된 것이다. 그리고 이걸 적자인 둘째 황보신에게 줬다고 해서 일이 커졌다. 황보신의 경우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수사한 결과 드러난 것인데, 황보신의 죄목은 공금 횡령. 이유는 첩 선물용. 결국 삭탈관직에 직첩 떨어지고 과전이 나가 떨어진다. 게다가 이게 겨우 수습 국면에 들어가는데, 둘째 황보신의 과전이 반납되는 과정에서 적자 3형제의 장남 황치신이 끼어든다. 몰수되는 동생의 과전을 자기가 먹고 대신 자기의 척박한 과전을 대신 반납해버리는 짓거리를 한 것이다.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9] 결국 황희 커버해주던 세종도 도저히 못견뎠는지 황치신까지 파면 당한다. 그야말로 적자 서자 할 것 없이 비리 콤보 3연타가 줄줄이 터졌고, 그 시작이 서자 황중생의 궁중창고 절도 사건이었으니 황희도 분노가 몰린 것은 당연한거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되지 않은 적자 3형제의 막내가 황수신인데, 황희 가문도 있어서 영의정까지 오르는 등 가장 크게 되었다. 다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사람도 음서 출신[10]이라 가문빨이 컸다. 그리고 친한 사이라고 부정 인사를 저질러서 관직 삭탈, 아산 전체를 농장으로 바꿔버리는[11] 등의 치부를 해서 탄핵 등 아주 모범적이고 전형적인 조선시대 치부의 모습을 보여줬다.[12]
한편으론 황희의 악행이 부풀려진것도 있는데, 이호문이라는 사관은 황희가 박포의 처와 간통을 했다는 등[13], 그의 악행이나 비리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왜곡된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이 때문에 훗날 실록을 편찬할 때 정인지나 성삼문 같은 이들이 이 사건을 부정하며 "완전 근거 없는 악플 아냐?", "이호문이란 놈이 좀 병진임"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 삭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나, 실록을 고친 전례를 남길 수 없다는 이유로 결국 이 글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안습
즉, 위의 글들을 짧게 요약하자면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 이였다.
2.4 말년
파일:Attachment/황희/retirement.jpg
출처. 가슴 만지게 해주세요의 패러디이다.
- 세종 13년 (1431년) 9월 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 세종 14년 4월 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 세종 14년 12월 7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 세종 17년 3월 29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 세종 18년 6월 2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나 윤허하지 아니하다
- 세종 20년 11월 19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하니 허락치 않다
- 세종 21년 6월 11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 세종 21년 6월 12일 황희의 사직을 반대하다
- 세종 22년 12월 21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자신의 파면을 아뢰다
- 세종 25년 12월 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다
- 세종 31년 (1449년) 10월 5일
- 문종 2년 (1452년) 2월 8일 영의정부사 황희의 졸기(卒記/사망)
세종대왕 자신이 황희를 거의 죽기 직전까지 부려먹었다. 황희가 최종적으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난 세종 31년은 1449년으로, 세종대왕 승하하기 딱 4개월 전이었다. 심지어 황희가 모친상을 당해 사직을 요청하자 세종이 직접 손을 써서 복직시키고, '환갑 지나면 상중이라도 고기를 먹을 수 있는데, 좌상이 풀만 먹다가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고기를 먹으라'고 명령을 내린 바 있다. 결국 황희는 눈물을 흘리며(…) 고기 반찬을 먹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14]
건강 문제로 사직을 청하면 아예 재택근무 하라고 한 달에 두 번만 조회에 참석하라 했다던가, 서류업무는 집에서 관료들을 불러 누워서(...) 처리하라고 하는 등 아주 열심히 부려먹으면서도, 그러면서도 퍼지지 않게 세심하게 관리해주는 면이 돋보인다.
그만큼 일을 많이 했는데도 평소에 건강관리에 힘썼다. 평소에 양 눈을 번갈아 감았다 떴다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자기 나름대로의 시력 관리법이었다고 하며 나이가 들어서도 백발 홍안의 신선 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또한 초상화를 보면 어쩐지 눈매가 매서운데 실제로 야사에는 황희가 째려보면 사람이고 어린아이고 동물이고 다 쫄게 만들어서 심지어는 죽어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비록 야사 기록이지만 황희가 실록에서는 대단히 강직한 스타일로 묘사되는 것이나 6진 개척과 여진 정벌에서 활약한 김종서도 황희를 무서워해서 그 앞에서는 항상 각잡고 있었다는 일화를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이야기. 다만 말년에 은퇴하고 삽살개와 눈싸움을 했는데, 이 개가 가만히 있자 "나도 갈 때가 되었구나"라고 한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1452년에 만 89세, 즉 90세라는 당시 사람으로써는 경이적인 장수를 누리고 생을 마감했다.[15] 익성(翼成)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그리고 세종대왕은 그의 장수를 이용해 참으로 많이도 부려먹었다.(...) 물론 관직 내내 이렇게 업무 혹사에 시달리면서도 과로로 쓰러지기는 커녕 별탈없이 소화한 황희의 건강함과 장수도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지만. 황희가 나이들었다고 사직서 낼 때마다 가마까지 내려가며 열심히 인적자원으로 쥐어짠 세종도 대단하다.(...)[16]
여담으로 황희의 장남인 황치신(1397~1484)도 88세까지 장수했다. 생몰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공교롭게도 세종대왕과 동갑이다.
2.5 이야깃거리
- 한 때 김종서를 자신의 뒤를 이을 만한 차세대 인물로 인정했을 때, 급한 성품을 고쳐 준다는 이유로 일부러 김종서를 심하게 갈궜다는 일화도 있다. 하루는 북방에서 조정으로 복귀한 김종서가 황희가 들어왔음에도 모른 척 비뚤어진 자세로 있다가 저놈 의자다리가 한 쪽 망가진 모양이니 고쳐줘라라는 한 마디에 바로 정좌했다카더라.
- 임진왜란 직전 통신정사로 파견된 우송당 황윤길은 그의 5세손이다.
-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2.6 일화
황익성공(黃翼成公 황희(黃喜))은 도량이 넓어서 조그만한 일에 거리끼지 아니하고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스스로 겸손하여, 나이 90여 세인데도 한 방에 앉아서 종일 말 없이 두 눈을 번갈아 뜨면서 책을 읽을 뿐이었다. 방 밖의 서리맞은 복숭아가 잘 익었는데 이웃 아이들이 와서 함부로 따니, 느린 소리로, “나도 맛보고 싶으니 다 따가지는 말라.” 하였으나, 조금 있다가 나가보니 한 나무의 열매가 모두 없어졌었다. 아침저녁 식사를 할 때마다 아이들이 모여들면 밥을 덜어주며, 떠들썩하게 서로 먹으려고 다투더라도 공은 웃을 따름이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도량에 탄복하였다. 재상된 지 20년 동안 조정은 공을 의지하고 중히 여겼으니 개국 이후 재상을 논하는 자는 모두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ㅡ 용재총화
- 세종 시대 뿐 아니라 조선시대 전체를 대표하는 재상의 위치에 있는 인물로 지금까지도 흔히 "황희 정승"이라고 불릴 만큼 정승이라는 말과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승의 대명사가 되었다. 18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지낸[17] 대기록 때문인지 야사에도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대표적인 이야기로는 계란유골의 고사, "어느 소가 일 더 잘해요?" 얘기라든지, 무엇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네가 옳다. 너도 옳다. 부인 말도 옳소." 등의 이야기가 있다.
- 황희 정승의 딸은 입을 속곳(속옷)이 한 벌뿐이었으니 딸을 결혼시킬 돈도 없었다. 헌데 하루는 세종과 신하들과 여러 백성들이 보는 자리에서 광대들이 신나게 줄타기를 하는데 어느 광대가 줄타기를 하면서 "어허, 이 줄타기 춤은 황정승 속곳춤이올쎄." 라고 외치는 거 아닌가? 이 말을 들은 어느 대신이 "이놈, 감히 영상대감을 모욕하는 거냐? 죽고 싶은 게로구나!" 분노하였지만 그 광대는 아랑곳하지않고, 계속 줄타기를 하며 말을 계속 했다. "보통들 황정승 나리의 하나뿐인 따님에게 속곳을 달랑 한 벌 남겨두고 살아가는 것을 청렴결백이라고 추앙하지만, 천한 것인 이 몸에겐 쓸데없는 짓거리로만 보일뿐이옵니다. 혼례가 뭐 대충 치르는 겁니까? 어디 이 속곳춤을 따지실려면 그 황정승 속곳춤의 유래를 과연 옳다고 보실 수 있는지요. 그 따님의 삶은 생각도 하지 않으시는 거 아니온지요.[18]이래도 이 광대놈의 춤과 말이 싫으시다면 사정없이 목을 베시지요."라고 말하면서 살판나게 춤을 추었고 그 대신도 주변 인물들도 뭐라고 반론하지 못하고, 황희를 쳐다봤다. 결국 그 눈길을 견디지 못한 황희는 그 자리에서 뛰쳐나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야사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청백리라 하긴 힘든 인물이지만[19] 야사에서는 왠지 청렴한 관리로 남았는데, 실제 행적을 두고 보면 청백리로 언급되는 것은 죄다 야사일 가능성이 높다. 황희의 청백리 이야기와 관련되어 유명한 것이 계란유골의 고사인데, 이것 역시 정식 사서가 아니라 조선 후기에 나온 송남잡지에 실려있던 일화이며 시기상의 차이와 실제 행적을 볼 때 이 쪽도 빼도 박도 못하는 야사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새서 방 안에 그릇을 놓아두고 우산을 쓰고 있었다는건 당연히 거짓말. 여느 벼슬아치들과 다를 바 없이 크고 아름다운 기왓집이었다. 다만 실록에서도 잘 나타나는 그 온화하고 관대한 성품은 야사에서도 잘 나타나며 노비의 아이가 수염을 잡아 당겨도 혼내지 않고 그저 허허 웃어 "허허 정승"이라는 별명이 있었다나.
- 다른 야사로 노비를 출세시킨 이야기가 있다. 평소 자신이 거느리던 노비가 매우 현명한 머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자, 황희는 밤에 몰래 불러선 노비 문서를 건네주며 글공부를 해서 성공하라며 떠나보냈다. 이후 세월이 흘러 황희가 과거 시험관을 맡았는데 그 시험에서 급제한 인물 중 한명이 그 노비였다는 야사.
- 또한 황희가 청년일 때 어느 농부가 두 소를 가지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황희는 "이 두 소 중에 어느 소가 일을 잘합니까?"라고 물었더니 그 농부는 황희에게 가까이 다가와 "누런 소가 검정 소보다 일을 잘한답니다"라고 귓속말로 대답했다. 황희는 황당해하며 "그냥 있는 곳에서 말하지 왜 굳이 귓속말로 대답합니까?"라고 물어보았더니 농부는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일 못한다는 험담을 들으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 일로 황희는 앞으로 말조심을 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다른 인물의 이야기, 명재상 상진의 일화가 이 인물 일화로 와전된 거로 보인다.
2.6.1 출사에 관한 야사에 대해
황희가 조선 개창에 반대해 은둔한 선비들 중의 일원이었고, 이런저런 간청에 못 이겨 조선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는 일화(두문동 72현 전설)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황희 등이 숨어 살았다고 전해지는 두문동이라는 지명은 영조 때 급격히 부각되었고, 수많은 전설들이 탄생했다. 황희에 관한 것도 이런 두문동에 관한 전설 중 하나다. 애초에 두문동에 관한 전설 대부분은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다. 예를 들어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두문동 때문에 나왔다고 하는데, 사실은 두문불출이라는 말 때문에 두문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또 두문(杜門)이라는 말 자체가 '문을 닫아건다'는 뜻으로, 두문불출이라는 말은 가깝게는 이규보의 편지글, 계속 올라가다보면 사마천 의 사기 까지 나온다.
두문동 72현이라고 하는데, 두문동이 언급된 영조대에 확인된 사람은 2명, 정조 대에는 원래 2명 합쳐서 3명이었는데, 점점 숫자가 늘어나면서 결국 공자의 제자인 72명에서 숫자만 맞혔다. 때문에 발표한 곳마다 명단도 다르다. 이러니 영조대에 밝혀진 임선미, 조의생을 제외하면 관련된 인물 전원이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다. 황희 당대의 기록에는 전혀 그런 이야기가 없고, 태조 대에 이미 6품 관직에 임명되어 세자가 자문도 구하기도 하는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에 절의를 지킨 쪽은 분명히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고려를 무너뜨리는 데 공헌한 건국세력이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만약 조선 개창에 공을 세웠다면 개국공신에 녹훈되었을텐데, 그렇다면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고작 6품관에 머무를 리가 없다. 아직 젊은 나이여서인지 딱히 한쪽 편을 들지 않고 그냥저냥 하급 벼슬살이를 해 간 것에 가까운 편.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도 관여한 정황이 없다.
2.7 대중매체에서의 황희
사극에서도 몇 번 등장 했는데 용의 눈물에서는 박진성 씨가, 대왕 세종에서는 김갑수 씨가 열연했다. 용의 눈물의 박진성 씨는 태종 대 지신사 시절의 황희로 태종의 충실한 비서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문제는 나레이터가 황희가 처음 등장할 때 '청백리'라고 소개해버렸다... 후에 폐세자될 위기에 처한 양녕을 홀로 옹호하다 파직되고 유배에 처해진 뒤, 세종 대 복귀하는 모습까지 나왔다. 대왕 세종의 김갑수 씨는 다소 안 어울린다는 말도 있었지만 워낙 이 분의 연기 내공이야 말할 필요가 없으니…. 사실 지금 남아있는 초상과 닮았던 사람은 오히려 박은 역을 맡은 박영지 씨였다. 그러니까 박은보다는 황희. 대왕세종에서의 황희는 재해석을 상당히 많이 했다. 초반부부터 왕세자 양녕대군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고, 그의 자리를 지켜주기 위해 정치 싸움에 능수능란하게 대응하는 정치가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양녕대군을 마지막까지 변호하다 파직당하고, 세종이 즉위한 뒤 복귀하는 형태. 다만 초반부 고려부흥세력과의 갈등을 위해 그를 야사의 두문동 이야기와 연결시켰다.
장영실에서는 사극은 처음으로 찍는 정한용 씨가 맡았는데, 무척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로 나오며, 장영실 일행의 역법 연구를 입다물어주는 등, 대인배로 나온다.
뿌리깊은 나무에도 등장하는데, 스토리상 비중은 크지 않지만 문자 창제에 대한 반대 여론이 강해질 때 세종에게 "만들긴 만드셨습니까?"라 물어 세종이 은밀한 비밀인 문자 창제의 뜻을 은밀히 밝혔을 정도로 신뢰하는 원로대신의 면모를 보였으며, 세종이 이신적에게 "황희가 사직 상소를 올렸다"라 말하니 "그건 매년 있는 일 아닙니까?"란 반문이 나와 노인 학대도 표현되었다.(...) 프리퀄인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권시현 씨가 연기했으며, 포은을 죽이고 두문동을 파괴한 이방원에 대한 복수를 위해 관직에 나선 것으로 하였다.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는 백윤식 씨가 황희 역으로 출연하였는데[20] 시작부터 충녕의 세자 지위를 놓고 충녕을 까다가 태종에게 말 그대로 쥐어 터진다(!!!)[21] 작중 중반부터 파직된 모습으로 나오는데 충녕인거 뻔히 알면서 대놓고 '내가 너랑 똑같이 생긴 어떤 놈을 알고 있는데 말이야.'라는 식으로 깐다던지. 양식을 구하려고 대놓고 기와집 담장을 넘고 쌀 두가마니를 들고 오는 충격적인 모습을 선보인다.
3 황희선생 유적지
경기도 파주 문산읍 사목리에 있는 황희 정승의 업적을 기리는 유적지로 유적지 안에 반구정과 방촌 영당, 방촌 기념관 등이 있다. 방촌유적지라고도 한다.
황희의 묘소는 이 곳에 없고 대신 파주 탄현면에 그의 묘소가 따로있다.
3.1 반구정(伴鷗亭)
1449년 황희가 87세의 나이로 정승에서 물러난 후 경기도 파주에 머물렀을 때 임진강변에 지어놓은 목조 정자로 임진강에 날아온 갈매기와 벗삼아 나누는 정자라는 뜻으로 지어졌다.
황희가 말년의 대부분을 보내게 된 정자로 그가 89세를 일기로 운명한 이후 유림들과 사림들이 황희를 추모하는 정자로 칭송을 받았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남침 및 임진강 도강(導江) 때 파괴되어 멸실되었다가 1967년 황희 후손들이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임진강을 바라보는 운치가 있는 곳이었지만 지리적으로 북한 개성 및 개풍군 지역과 근접해 있는 지역이라 임진강 주변에 철책선이 있고 육군 경계초소가 있어서 군사적인 긴장감을 더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대낮에만 풍경을 볼 수 있는 편으로 밤에는 아쉽게도 풍경을 직접 볼 수 없다. 이 때는 초소 초병들이 경계목적으로 서게 되기 때문에 민간인들은 일몰 및 저녁 이후에는 반구정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편.[22]
- ↑ 한자 그대로 오래오래 살라는 뜻으로 어린 시절 몸이 약하여 양친이 장수를 기원하며 지어준 이름의 덕을 받았는지 실제로 오래 살았다.
- ↑ 물론 항목을 읽다보면 알겠지만 자신이 원한게 아니다. 본격 강제 복무
- ↑ 흔히 말하는 서얼은 양반과 양민 사이의 자식인 서자와 양반과 천민 사이의 자식인 얼자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 ↑ 8~9품의 실무를 맡은 서리(胥吏) 직책이다.
- ↑ 그런데 두문동에 은거한 인물인 임선미, 조의생 등은 황희와 거의 비슷한 연배였으며 고려의 유신들이 두문동에 들어간 계기는 조선 조정이 실시한 과거시험을 거부하면서였기에 젊은 학자들이 많이 포함되었으니 황희만 찍어서 관직에 나가라고 하는건 개연성이 없다는 점이고 당시 황희의 나이는 30세로 젊다고 보긴 힘든 나이였다.
- ↑ 걍 각 부처 장관 다 해먹었다고 치면 된다.
- ↑ 신하가 사망하면 사관은 실록에 '졸기(卒記)'를 남기는데, 사관은 황희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다.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즉 보수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였던 셈.
- ↑ 어차피 황희의 적자 3형제도 죄다 음서로 관직에 나섰다.
- ↑ 현대 대한민국은 국가의 행정작용의 연원이 국민들이 위임한 권력에서 나오지만,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행정작용의 연원이 왕에게서 나왔다. 따라서 현대법에서 국가적 법익에 대한 죄로 해석되는 죄들은, 조선시대에서는 왕을 능멸한 죄가 된다. 더군다나 유교 문화권에서는 왕에게 진심어린 충성을 바치지 않는 모든 행위가 반역으로 취급되었다!
- ↑ 황수신이 사마시를 보러 갔을 때 시험관이 답안을 보고는 대놓고 시험보러 왔냐 놀러 왔냐라고 할 정도로 모욕을 줬다고 한다, 그래서 황수신은 이후 각고의 노력을 하며 공부를 한 끝에…음서로 관직에 나간 것이다.
- ↑ 사실 이건 일반적인 수준의 치부가 아니다. 저 아산 지역은 국유지이고, 일 시켜 먹은 사람은 공노비다.
- ↑ 덧붙여서 이 황희의 아들 셋중에서 두명은 계유정난후 세조에게 붙었다.
- ↑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박포의 처가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도망친 것을 황희가 모처에 숨겨주었고 이것이 와전되어 황희가 정치적인 타격을 입은 것으로 묘사한다.
- ↑ 세종 9년(1427) 11월 27일(신해) 2번째 기사.
- ↑ 당대로서는 조선 말고도 중국이나 일본, 아니 전세계적으로도 잘먹고 잘사는 왕조차도 50줄을 넘기기가 힘들었고, 서민들은 30~40대가 평균 수명이었다. 2016년 현재도 남자는 80줄 넘기기가 매우 힘드니 남자가 90세까지 살면 그야말로 1%는 과언이 아닐 정도.역대 영의정 최장수 생존 기록. 현대로 따지면 거의 110세 정도까지 산 것이다. 사실 이건 %로 본 것이고 그냥 그 시대 시점으로써는 거의 2세대(200년)를 산 사람이다. 평균 40-50대인 수명에서 90세를 살았으니 말이다.
- ↑ 조선왕조실록에는 황희보다 더 오래 산 사람들의 기록이 더러 남아있는데, 이구원(1579~1675/ 97세), 조선 효종의 서녀 숙정옹주의 남편 박필성(1652~1747/ 96세), 지중추부사를 지낸 성직(1586~1680/ 95세), 동지돈녕부사를 지낸 홍수렴(1642~1736/95세), 좌의정을 지낸 이귀령(1345~1439/ 95세), 소설 최척전 작가로 알려졌고 공조 참판이었던 현곡 조위한(1558~1649/ 92세) , 효령대군(91세)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일찍 왕위를 포기하고 장수하는 길을 선택한(…) 효령대군을 제외한 이구원, 이귀령이 관직 생활을 하면서 저지른 졸렬한 처신으로 사망 기사인 졸기에서조차 당대 사관들로부터 비판받는 기사가 남은 데 비하면 황희의 졸기는 세종의 옆에서 배향될 만한 명신으로서 남긴 치적을 많이 남겼다. 다만 조위한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아 싸우기도 하고 정묘호란 때도 일흔 나이에 의병을 모으고자 힘을 다하던 인물이며, 천성으로 타고난 효자요,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고 남에게 잘 우대하고 성격이 좋아 평판이 자자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위독했을 때 약에 쓸 똥과 오줌 맛을 직접 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어머니 입에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면서도 강직하고 완고해 아첨을 하지 않아 벼슬은 최대 공조 참판으로 그쳤다. 그리고 광해군을 비난하다가 파직당했다가 인조반정 이후 재등용되었지만 일흔 넘어 벼슬 그만두고 낙향해 자연 속으로 들어가 살며 글로 늘그막을 지냈다.
- ↑ 조선 역사를 통틀어 최장기간 영의정 재임이다. 덧붙여 가장 많이 임명된 인물은 숙종 때의 최석정으로 무려 9번이나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소론이었기에 사직을 반복.. (병자호란 때 주화파의 대표였던 최명길의 손자.)
- ↑ 한마디로 "속곳도 제대로 못 입고 결혼도 못하고 어렵게 어렵게 살고 있는 황정승네 따님을 도와주진 못할 망정, 남 일이라고 뒷짐지고 서서 청렴하네 뭐네 위선이나 떠는구나. 참 잘나셨다."
- ↑ 청탁때문에 탄핵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오히려 뇌물을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 ↑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뿌나에서는 백윤식이 태종 역으로 나온다! 충공깽.
- ↑ 이 작품의 태종이 워낙 한 터프하다. 시작부터 면전에서 땡깡부리는 양녕에게 이단옆차기를 날리질 않나(...) 옆에다 철봉 두고 턱걸이를 하면서 정무를 보질 않나(...)
- ↑ 사실은 황희선생 유적지라는 곳에 반구정이 있는데 유료 입장인데다가 겨울철 17시 이후(여름철에는 18시 이후)에는 문을 닫기 때문에 이쪽이 더 신빙성이 있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