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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륜(河崙).[1] 1347(충목왕조) ~ 1416(태종조).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진양 하씨 4대손이며 고려 현종 때의 문신, 무장이자 여요전쟁에서 활약했던 하공진[2]의 자손이다.
일흔까지 천수를 누리며 두 왕조의, 아홉 임금 시대를 살고, 일곱 임금을 섬긴 자.(...)역시 인생은 하륜처럼 2년만 더 살았다면 세종대왕 시대도 볼 수 있었다!그리고 죽었겠지[3]여담으로 정몽주보다는 열 살, 정도전보다는 다섯 살 어리나 이방원보다는 스무살이 많다.
2 기복이 심했던 관직 변천사
순흥 부사를 지낸 하윤린의 아들로 정도전, 정몽주같은 신진사대부들처럼 이색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360년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6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내직을 지내며 승승장구했지만 신돈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그 뒤 보문각 직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의 요직을 거치다가 이번에는 최영의 요동정벌에 반대하다가 양주로 추방되었고, 위화도 회군 직후에는 오히려 이색 계열로 몰려 이성계 일파의 눈 밖에 나서 추방당했다가 복직되기도 했다. 실제 온건개혁파이기도 했고 본인부터가 이인임의 조카사위[4]로서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5] 그래서 관직 변천사가 제법 파란만장하다.
이성계 세력과 정몽주 세력이 고려 조정에서 대립하던 공양왕 시절에는 전라도 순찰사로 나가 있었고 조선이 건국되자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태조가 개성에서 계룡산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기 시작하자 풍수학설을 근거로 계룡산 천도를 반대하고 무악 일대(지금의 신촌 근교)를 새 도읍지로 밀었으나 정도전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하륜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술수하는 자들의 말 따위는 믿을 수 없다며 하륜의 주장을 대차게 깠다. 오늘날의 경복궁 일대로 조정의 대세가 모아져도 끝까지 무악을 고집했으나 결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 태종의 킹메이커
재주도 있고 출세욕과 성취욕도 강했던 하륜이었지만 당시에는 워낙 정도전이 정계를 꽉 쥐고 있었고 사적으로도 한양 천도를 둘러싸고 벌였던 논쟁에서 정도전에게 거의 모욕을 당하다시피해서인지 기록으로는 알 수 없지만 정도전에 대해 원망을 품게 되었던 것 같다. 별거 아닌 말 같지만 '술수하는 자'라는 말은 유학자에게는 엄청난 패드립모욕이다. '음양술수 같은 괴력난신이나 논하는 소인배'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정도전과 하륜은 이색 휘하에서 같이 배운 동문이었는데 나중에 이색의 비문을 쓰다가 경을 칠뻔한 하륜과 달리 정도전은 조선개국 이후 스승과 동문들을 가혹하게 대우했으니 하륜 입장에선 정도전을 좋게 보기가 힘들었을것이다. 태조와 정도전 정권에서는 하륜이 스스로의 능력을 펼칠 기회도 없었고 정도전처럼 중앙에서 나라를 좌우하는 위치로 올라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륜은 태조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의 장인인 민제와 친구였는데 민제를 통해서 이방원과 친교를 맺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완전히 그의 사람이 되어 제1차 왕자의 난을 성공으로 이끌어 종국에는 태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하륜이 이 과정에서 한 일은 또다른 인재인 이숙번을 태종에게 추천하기도 했고, 사병이 혁파되는 상황에서 이숙번의 병력을 왕자의 난 때 동원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 당시 이숙번은 지안산군사, 즉 안산 군수였는데 정릉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어 사역군을 이끌고 상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숙번의 이 사역군이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기동 호위병력이 될 수 있었다.
야사 용재총화에 의하면 하륜과 이방원을 떼어 놓기 위해 정도전이 하륜을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보냈다. 이방원이 하륜을 불러 송별연을 가졌는데 하륜은 취한 척하고 이방원의 옷에 술을 쏟았다. 빡친 이방원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하륜은 사과한다는 핑계를 대고 이방원을 쫓아가 독대하게 되었고 이 자리에서 이방원에게 결정적인 책략을 진언했다고 한다. 실록에서는 이 무렵에 하륜이 올린 것으로 보이는 진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륜이 일찍이 임금(태종 이방원)의 잠저[6]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묻자 하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쳐서 이 무리를 없애는 것 뿐입니다."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륜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태조 이성계)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쩌겠습니까?"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년) 11월 6일 하륜의 졸기
어쨌든 하륜이 이숙번을 추천하면서 그 병사를 동원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하여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있던 움직임을 피해 반란을 성공시킬 수 있었고, 이후로도 이방원이 용상으로 향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으며 정종이 즉위했을 때 정사공신 1등으로 진산군에 봉해졌고, 마침내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그야말로 태종의 킹메이커.
4 불도저 재상
태종이 즉위한 후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재상의 반열에 오른 하륜은 왕권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아래서 성리학의 이상이 실현되는 조선을 꿈꾼 태종의 개혁정책을 계획, 집행하는 데 앞장섰다. 육조직계제의 도입이나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는 등의 정치개혁, 관제개혁에 직접 관여했고 태종이 실시했던 군제 개혁, 호패법 시행, 조세제도 정비 등에서도 하륜이 계획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또한 신문고 설치에도 일익을 담당했는데 신문고를 함부로 칠 우려가 있다는 반대 주장이나 실효성이 있느냐는 등의 비판이 제기되자 '이 제도는 백성이 신문고를 직접 치느냐 마느냐 하는 것보다 백성의 송사를 결단하는 관리들이 스스로 신중을 기하도록 하는 상징성에 더 의미가 있다'는 요지의 말로 이 비판들을 반박했다. 이 외에도 저화(화폐)를 유통시키고자 태종에게 건의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지만 당시 상품화폐경제의 미발달로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7]
조선초기의 법률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조선최초의 법전은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이었으나, 태조 6년 영의정 조준의 지휘로 경제육전을 새로 편찬하게 된다. 이 때는 한자와 이두를 혼용하였는데 이를 속칭해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해서 원육전 또는 중심인물인 조준의 이름을 따서 조준육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태종 7년에 이걸 하륜이 주도해서 순한문으로 만들면서 논란이 되던 모순적 부분을 다듬었는데 이를 속육전, 또는 하륜육전이라고 부른다. 이 속육전은 이후 세종 시기에 이직과 황희에 의해서 다시 손을 봤다가 다시 예종과 성종시기에 완성되는 경국대전의 바탕이 되어 조선시대 법률 체계의 원형이 된다.
또한 태종의 뜻에 따라 고려사와 동국사략 등의 역사서 편찬을 감독했으며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의 편찬 주체가 되어 이를 실행시켰다. 다른 신하들은 왕자의 난 등의 관련자가 살아 있는 사람이 많아서 이르다고 반박했지만 오히려 하륜은 노성한 신하가 살아 있을 때 마땅히 기록해야 되는거 아니냐며 얼굴을 붉혀가면서까지 실록 편찬을 실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태조실록은 태종과 하륜 등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집필되었으며 정도전은 간신이자 비굴한 인물로, 태조는 태종의 총명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정도전 같은 간신에게 휘둘린 인상으로 쓰고 있다.[8]
이렇게 보이듯이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정치 스타일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불도저 타입으로 일처리가 빠르고 거침없었다고 한다. 이 일처리 방식은 태종의 장인이자 친구인 민제까지 화나게 하여 민제가 "저러다가 정도전 꼴나지"라고 디스하자 오히려 "어차피 생사는 하늘이 정하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이라고 받아쳤다. 그리고 민씨가는 멸문지화를 당하고 하륜은 천수를 누렸다.
이렇듯 태종을 섬기며 정승 반열에도 올랐고 자신의 능력과 이상을 마음껏 펼치기는 했으나 결국 무악 천도는 태종 밑에서도 이루지 못했다. 태종이 종묘에 들어가 돈으로 점을 쳐서 한양의 궁궐터를 정했는데 무악이 한양보다 더 낮게 나오고 만 것.
그리고 운하 건설을 주장한 적이 있다. 그것도 두 번이나.[9] 하륜은 1412년에 충청도 안흥량에 운하를 팔 것을 건의했는데, 태종이 사람을 보내 주변을 확인하자 다녀온 이들은 운하를 파는 것이 어렵겠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하륜은 5천 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운하 건설을 강행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고, 이듬해에는 한강과 면해 있는 용산 포구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파자고 또 주장했지만 전 해에 운하 건설 시도가 처참히 발린 것을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태종이 나서서 이 의견을 기각했다.
5 탐욕과 실언(失言)
조선 초기의 개혁을 주도했던 인물이고 행정능력이나 정책 입안 능력은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단점도 만만치 않았다. 바로 탐욕스러운 인물이었다는 것.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도성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어 불편하다는 이유로 능 백 보까지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태종은 이를 받아들였고, 이에 하륜은 사위들까지 동원해서 가장 먼저 노른자위 땅들을 자기 것으로 하였다.
또한 친인척들과 함께 무단으로 백성들을 동원하여 간척을 제멋대로 하고는 그 땅을 사유화해서 탄핵당하기도 했고, 노비들에게까지 벼슬을 팔아먹는다는 비판도 받았다. 또한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을 받자 일도 제대로 모르는 관리들을 추천하여 태종에게 질책당하기도 했다고. 대간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지만 이런 비리에 관대했던 태종은 이를 막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개드립말실수를 자주 하여 태종에게 경고를 들은 적도 많았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처리할 때는 가볍게 벌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그건 옳지 못하다"는 태종의 지적에 기겁한 적도 있고 나중에 "세자도 아니고 겨우 왕자들 죽이려 한거니까 죄가 크지 않다.(엥?!)"라고 했다가[10] 태종이 대놓고 그딴 개드립 다시는 치지 마라고 말해서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데꿀멍한 적도 있었고, 선위 파동 때는 민제를 찾아가 '전하 뜻이 정 그렇다면 선위하시라 합시다'라고 했다가 걸린 적도 있다. 그리고 이색의 비문을 지을 때 조선의 건국과정을 부정적으로 적은 것이 들통나 거의 목이 달아날 뻔도 했지만 태종은 끝내 하륜을 지켜 주었다. 영의정을 지냈던 이직이 안치되는 일이 있자 하륜이 대놓고 태종의 결정을 비웃으며[11] 이직이 외방에 보내질 죄가 어딨냐고 디스를 하자 태종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
어쨌든 이러한 말 실수에도 불구하고 친구 민제의 아들들과는 달리 천수를 누렸는데, 1416년 자신이 죽던 해에 태종에게 오랜 간청한 끝에 진산 부원군으로 물러나서 정치 일선에서 은퇴했고 그해 말에 함경도의 조선 왕가 조상묘를 살피러 갔다가 객사에서 사망했다. 향년 70세. 하륜의 부고를 들은 태종은 몹시 슬퍼하여 3일간 조회를 하지 않고 7일 동안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으며 직접 애절한 조사를 지어 애도했다. 묘는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다.
실록은 하륜에 대해 "천성적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며 말수가 적어 평생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서는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해서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태종의 후계자인 세종대왕은 하륜을 그렇게 좋게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12] 세종은 하륜에 대해 이렇게 평을 내리고 있다.
"하륜은 학문이 해박하고 정사에 재주가 있어 재상으로서의 체모는 있지만, 청렴결백하지 못하고 일을 아뢸 때도 여염의 청탁까지 시간을 끌며 두루 말하곤 했다. 내 생각으로는 보전하기 어려울 것인데도 태종께서는 능히 보전하시었다."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년) 12월 7일
요약하자면 아버지 아니었으면 하륜은 진작에 목이 달아났음 정도의 의미다.[13] 임용한은 그래도 하륜이 선을 지키면서 욕심을 부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하륜이 절제력이 뛰어나서 그런건 아니고, 당시 관료들에게 용인되던 수준이나, 더 욕심을 부리면 태종에게 목이 달아날 수준을 지키면서 해먹었다는 의미(...). 그 선을 넘었던 이숙번은 목이 날아가지는 않았지만 숙청크리를 맞고 낙향해야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하륜을 조영무와 함께 살아남은 공신으로 언급하면서, '하륜이 아닌 다른 이였다면 목이 몇 개라도 모자랐을 것이며, 확실히 그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고 쓰여 있다.
6 일화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하륜은 죽기 직전에 꿈에서 태조가 몹시 화를 내는 것을 보고 나서 병이 나 죽었다고 한다. 사실 태조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자기 조상의 묘를 돌아보러 왔으니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유학자이기는 했지만 천문이나 의술, 풍수, 지리 등의 잡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이런 부분에도 전문가 수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사람의 관상도 볼 줄 알았다고. 용의 눈물에서 묘사된 하륜은 이런 면모를 강조하여 묘사된 셈.
용재총화에 의하면 조선시대판 인생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 승경도 놀이를 고안한 사람이 바로 하륜이라고 한다.
왕족이던 태종의 종친 이백온[14][15]이 하륜의 첩실을 탐내 하륜이 죽은지 얼마안돼 부하들을 보내 보쌈(...)하려다가 걸리자 그동안 이백온의 온갖 더러운 짓을 눈감아주던 태종도 더 이상 봐주지 않고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유배보냈다.
7 사극에서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신충식이 역을 맡았다. 꾀주머니라는 평이 맞도록 탐욕스럽고 온갖 음모를 꾸미는 역. 실록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된 정도전의 이미지도 모두 하륜에게 옮긴 냄새가 난다. 참고로 하륜을 맡은 신충식은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원균이나 미우라 고로도 맡았던 배우이나 태조 왕건에서는 강직한 석총을 연기하였다.
용의 눈물에서는 사극에서 강직한 배역을 자주 맡았던 임혁이 열연을 펼쳤다. 태종을 보좌하여 왕위에 올리는 지략가의 이미지가 매우 두드러지며 악연이자 정적 관계인 정도전을 한편으로는 존경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정도전이 죽기 직전에 "편히 뫼셔 드리게나"라고 태종의 집사에게 부탁할 정도. 그래서인지 탐욕스러운 모습은 묘사되지 않았고 오히려 강직하고 호탕한 인물로 묘사된다. 심지어는 민씨 형제에 대한 태종의 처분을 두고 이숙번이나 정승들 앞에서 "그들은 무고하게 희생된 것 뿐 아닌가?"라고 일갈. 그 말을 들은 이숙번이 몸 조심하란 식으로 반 협박을 하자 오히려 "천하의 이숙번 대감께서 이 하륜의 목숨을 걱정해주다니 별일이구만!"이라며 받아넘기는 모습도 보여준다. 죽을 때에도 '인생무상, 제행무상'이라는 쪽지를 남기고 사망하는데 이 때의 모습도 폭풍간지. 글자 그대로 킹메이커이자 지략가의 포스를 제대로 뿜어낸다. 그런 묘사와 배우 보정이 합쳐져서 실제 하륜이 가지고 있었던 탐욕스럽거나 경솔한 면모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용의 눈물을 열렬히 시청한 세대들은 추억보정 때문에 실제 하륜의 이미지에 가까운 다른 배우들의 하륜보다 임혁 버전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태종에게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
대왕 세종에서는 초반기에만 등장했는데 최종원이 배역을 맡았다. 처음 등장시에는 조그마한 떡을 먹고 다른 대신들에게도 권하는 동네 할아버지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얼마안가 자신을 찍어내려고 작정한 박은을 연거푸 엿먹이며 노회한 정객의 포스를 드러낸다. 오래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태종의 어전에서 나와 물러나는 23화의 퇴청 씬은 호평이 많았다. 여담으로 정도전에서의 하륜이 "소생 하륜입니다"라는 대사로 컬트적인 인기를 누렸는데, 이 작품에서의 하륜도 "나 하륜이야! 하륜!"이라고 박은에게 호통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쪽의 하륜은 용의눈물의 충신 하륜과 실제 역사의 하륜을 반반쯤 섞어놓은듯한 모습으로 태종을 위해 셀프 탄핵을 시전한 하륜에게 던지는 "그렇게 충심이 깊은 놈이 비리를 그따위로 저질렀냐?"는 태종의 질문이 이를 아주 잘 나타낸다. 이에 대한 하륜의 대답은 "전하를 왕위에 올려놓은 댓가로 그 정돈 챙겨도 된다고 생각했나봅니다." 그리고 셀프 탄핵 후 궁을 나설때까지도 박은을 제대로 놀려먹는다(...)
정도전에서는 이광기가 연기. 하륜(정도전) 참조. 소생, 하륜이옵니다
- ↑ 1990년대 이전에 나온 역사책에는 간혹 '하윤'이라고 표기되어있기도 하다. 현행 맞춤법에는 하륜과 하윤 둘 다 맞다. 원칙적으로 이름(성씨 제외)의 첫 글자는 두음 법칙에 따라 두음으로 적게 돼 있지만, 외자인 경우 원음대로 적는 것도 허용한다. 따라서 살아 있는 사람이면 본인의 의사를 물어서 바라는 표기대로 적으면 되는데, 하륜은 옛날 사람이라 그에게 의사를 물을 수는 없으므로(...) 두 표기가 혼용되고 있다. 다만 현재는 하륜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듯.
- ↑ 하공진은 강조의 정변에 참여한 인물로 2차 여요전쟁 당시 거란이 고려를 침범하자 적진에 들어가 현종의 친조와 자신의 볼모를 조건으로 거란군의 철수 교섭에 성공하였다. 이후 거란에서 탈출하려다 발각되어 친국을 당하며 회유를 받았으나 끝내 거절하여 살해되었으며 고려에서 상서공부시랑을 추증하였다. 후일 '하공진 놀이'라 하여 하공진의 충절을 기리는 잡극(일종의 연극)이 예종때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 진주 하씨의 시조.
- ↑ 꼭 그렇지는 않은게, 태종 사후 세종의 숙청사업은 전혀 하지 않은 것을 미루어보면 나름 무탈하게 여생을 보냈을 가능성도 크다. 하륜이 축재나 수령 임명 같은 비리에 관여하기는 했지만 하륜 정도 되는 거물을 이 정도로 목을 날리기에는 너무 약하다. 다만 태종과는 달리 세종에게는 별 대접을 못받았을 것이고, 비리 때문에 탄핵받아 자리에서 물러났을 수는 있다.
오히려 늘그막에 세종에게 혹사당하다 생을 마감했을지도외려 세종보다는 태종이 미리 권신을 치워놓기 위해 손을 썼을 가능성을 고려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륜은 치부에 힘을 썼으면 썼지 중앙 정계에 자기 사람을 심는 등 왕권에 해를 끼칠만한 행동은 거의 하지 않았던데다, 하륜보다 더 심한 이숙번도 귀양 수준에서 끝낸걸 보면 태종도 딱히 하륜을 제거할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뒷방 늙은이로 평온히 살다가 죽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 ↑ 이인임의 동생인 이인미의 딸과 결혼.
- ↑ 이색 이전에 학문을 배웠던 스승이 이인임의 형인 이인복인데, 이러한 인연으로 조카사위가 되었다.
- ↑ 즉위하기 전의 왕이 있던 집을 의미한다.
- ↑ 이는 태종의 후계자인 세종대왕도 이루지 못했으며 뒷날에도 다른 왕들과 재상들이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조선의 화폐유통은 먼 훗날인 숙종 때에야 정착된다.
- ↑ 그러나 실록을 꼼꼼히 살펴보면 의외로 다른 단서들도 사관들이 재치 있게(?) 끼워 놓았다. 대표적인게 정도전의 최후 장면으로 관련 사항은 정도전 항목을 참고할 것.
- ↑
말만 그럴싸했던 한반도 대운하 구상과는 달리하륜의 주장이 허튼 소리는 아니었다. 본래 삼남(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세금으로 걷혀 올라오는 곡식을 실은 조운선은 당시에는 섬이 아니었던 안면곶 앞바다를 지나 태안반도를 돌아 올라가는 항로를 거쳐갔는데, 이 안면곶과 태안 안흥항 앞바다, 강화도 일대의 물살이 거셌기 때문에 배 수십 척이 한꺼번에 침몰하면서 손실되거나 바닷물에 젖어 못쓰게 되는 곡식들의 피해량이 결코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때문에 고려 시대 때부터 태안반도의 좁은 지협을 굴착해 만과 만 사이로 항로를 만들고자 노력하였으나 도중에 중지된 것을 마저 하륜이 이때 완공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 ↑ 그러니까 국본인 세자를 위해 왕자들을 건드리려 한거니까 단순 대역죄로 보긴 죄가 가볍다. 라는 요지?
- ↑ 왕의 면전에서 말 그대로 피식 웃었다.
- ↑ 그럴수 밖에 없는게 세종이 본 하륜은 리즈시절의 하륜이 아닌 말년에 삽질하던 시절의 하륜이기 때문. 참고로 세종과 하륜의 나이차이는 무려 50살이다...
- ↑ 그런데 세종은 자기 집이 시끄럽다고 서대문까지 틀어막은 이숙번에 대해서는 의외로 하륜보다 좋게 평가했다.
- ↑ ?~1419/태종의 사촌(이성계의 이복형제인 이원계의 아들)들 중 하나로 왕자의 난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행태가 불량하고 주색을 너무 밝혀 왕조 초기부터 저런 왕족이 있으면 백성들의 민심을 잃는다는 공신들의 권고를 자주 들었음에도 태종은 눈감아주었다. 하지만 죄도 없는 머슴들을 잔혹하게 학대하다 죽이고 여색을 탐하는게 심해져서 결국 하륜의 첩실까지 탐내어 그가 죽은 직후 보쌈하다 걸리자 모든 특혜를 박탈당하고 유배당하여 초라한 신세를 한탄하다가 오래못가 죽었다.
- ↑ 참고로 이 작자의 이야기는 故고우영 화백의 만화 (수레바퀴)에도 실려있다.
- ↑ 1년 앞서 방영한 정도전(드라마)에서도 둘은 각각 이인임의 당여와 정도전의 혁명파 소속으로 정적 관계로 시작하긴 했지만 조선 개국 전까지 둘 사이의 접점은 같은 사대부이자 스승 목은 이색의 제자이자,성균관에서 동문수학했다는 것 이외에는 그다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