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즈치(구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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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츠키급 구축함
아카츠키히비키이카즈치이나즈마
건조시작일1930년 3월 7일
진수식1931년 10월 22일
취역일1932년 8월 15일
격침1944년 4월 13일
배수량기준배수량 - 1,680톤
공식배수량[2] - 1,980톤
전장118m
전폭10.36m
흘수선3.2m
속력38노트
항속거리14노트 기준 9260km
무장3식 127mm 50구경장 2연장 함포 3기
96식 25mm 기관포 22정
13mm 대공기관총 10정
610mm 3연장 어뢰발사기
폭뢰 36기

개요

일본어:雷(천둥)
이카즈치는 구 일본군 해군의 특3형 구축함 아카츠키급의 3번함이다. 1898년의 구 일본 해군의 구축함이었던 이카즈치를 계승했다. 밑에서 설명할 함장이 개념이 있었던걸로 알려져있다.

이름의 경우, 2차대전 당시엔 역사적 가나 표기법에 따라 いかち라고 표기했다고 하며, 현재는 두 표기가 혼용되어 쓰이는 중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 항목에 서술되어 있는 이카즈치는 2대째로, 1대는 이카즈치형 구축함 1번함.(당시에는 2번함이 이나즈마였다)(현제(밑의 무라사메급 이나즈마,이카즈치)까지 대대로 이나즈마가 나중이다.)

태평양 전쟁 시에는 동형함인 아카츠키, 히비키, 이나즈마와 함께 제6구축대로 편성되어 제1수뢰전대 소속이었다.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동남아시아 방면에 배치되어 홍콩 전투, 자바 해 해전 등에 참전했고, 자바 해 해전으로 연합군 동양 함대가 전멸하자 태평양 방면으로 배치되어 알류샨 작전에 참가했고, 이후엔 남태평양에서 과달카날 전투 등에 참전했다. 이후 1944년 4월 13일 섬 서쪽 해역에서 미 해군 구축함 킬러 가토급 잠수함 하더(USS Harder)의 뇌격으로 인해 침몰해 승조원 전원이 전사. 참고로 하더의 함장 사뮤엘 D. 딜레이는 이카즈치를 격침했을때 "4개의 어뢰와 1척의 일본 구축함을 소비했다!(Expended four torpedoes and one Jap destroyer!)" 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후 설명할 비화와 같이 보면 그야말로 현실은 비정하다는것을 몸소 느끼게 해준다.[3]

여담으로 함장이 일본군 장교로서는 드물게 어마어마한 개념인이다. 쿠도 슌사쿠라는 양반인데, 이 양반은 이카즈치에 함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당시 일본군의 병폐였던 가혹행위를 금지해서 이카즈치에서는 단 한번의 가혹행위도 없었다고 한다. 또한, 자바 해 해전 이후 자매함 이나즈마와 함께 구조활동을 벌여 영국 구축함 HMS 엔카운터와 미국 구축함 USS 포프의 승조원 422명의 구조에 성공했고, 이들이 탈수증으로 쓰러져가자 함장은 자기들이 쓸 물까지 나눠주면서[4] 사령부의 복귀명령을 무시하고 하루종일 항해해서 네덜란드 병원선에 422명 전원을 양도했다.

이런 선행과 개념행동에도 불구하고 이카즈치의 승조원 대부분이 전사하고 함장 본인이 자신의 공적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5]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건 쿠도 슌사쿠 함장 덕분에 살아돌아간 영국군 장교들이 종전후 일본에 방문하면서부터였다. 쿠도 함장을 만나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던 그들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쿠도 함장은 이미 1979년에 암으로 숨을 거둔 상태였다.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묻히는게 안타까웠던 생존자들은 일본방송과 인터뷰를 하고 다큐멘터리에도 적극 참여하거나 본국에서 책을 집필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고 그제서야 이카즈치의 구조활동이 세간에 알려졌다.

이카즈치의 함장 쿠도 슌샤쿠의 구조활동을 다룬 당시 재연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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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구 일본 저작권법에 의해 저작권이 만료되었다.
  2. 탄약을 최대로 싣고, 물과 연료를 최대량의 2/3 정도만 채운 상태에서의 배수량이라는 듯.
  3. 하지만 딜레이 함장도 이로부터 약 4개월 후 마닐라 곶에서 하더가 격침될 때 전사했다고 한다. 물고 물리는 전쟁...
  4. 이 과정에서 이카즈치의 승조원 일부가 반발하기도 했지만 함장이 모두 설득했다고 한다.
  5. 전쟁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이를 보고받은 중학시절 선배이기도 한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그가 비국민 취급을 받을까 우려하여 알리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