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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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理智

이성과 지혜를 아울러 이르는 말. 또는 본능이나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지식과 윤리에 따라 사물을 분별하고 깨닫는 능력. 요즘 흔히 말하는 뇌섹남은 이 단어를 사용해 "이지적 남자"라고 치환할 수 있다.

2 李贄

2.1 생애

중국 명나라의 사상가이자 비평가(1527~1602). 호는 탁오(卓吾). 양명학과 당시 그가 살던 취안저우(泉州 천주)의 자유로운 분위기 영향을 받아 유심론을 주장하며 형식적 교리와 예절에 반대했다. 또한 도덕지상주의를 비판하고 능력주의를 호소하였으며 《수호전》, 《금병매》 듯의 서민 문학을 높이 평가하였다. 저서에 《분서(焚書)》[1] , 《장서(藏書)》 따위가 있다. 결국 75세에 혹세무민의 죄로 감옥에 잡혀들어가고 시자(당시 감옥에서 면도를 해주는 사람)의 칼을 잠시 빌린다고 하더니 그대로 목을 그어 자살하여 생을 마친다.

2.2 사상

이탁오의 사상의 핵심은 동심(童心)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유가의 변질에 의한 것이었는데 2000년 전 공자가 남긴말을 후대의 학자들이 각주에 해설에 또 각주를 다는등… 말한마디에 해설본만 몇십권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해석이라도 제대로 했으면 다행일텐데 학자들은 당대의 정치인들과 결탁하고 해석을 백성들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입지만을 위한 방향으로 만드는 일을 하였다. 예를 하나 들자면 공자가 여자에 대한 말한것은 "여자와 아이는 다루기 어렵다" 이 한마디 였으나 수천년간 어마어마한 해석과 각주가 쌓이고 왜곡되어서 우리가 흔히 유가에 대해 생각하는 가부장적인 제도, 열녀라는 병폐가 생겨났다. 이탁오는 이러한 상황을 나이 50세에 정확하게 파악하고 공자에 대한 후대의 해석을 중요하게 볼것이 아니라 공자의 동심 즉 공자가 남긴 말만을 중요하게 보자고 주장하였다. 이때 비판이 매우 신랄한데 난장이(나 자신) 가 키가작아 보지도 못하는 굿 (공자)을 남들 (공자의 말에 해석본을 쓴 후대의 학자들) 이 그저 좋다고 하면 나도 좋다고 따라한것 밖에 되지 않았다라고 하거나 나는 그저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따라 짓는 개 에 불과했다 라고 하는등의 말을 남겼다.

이렇게 이탁오는 유가가 (공자가 남긴것이 아닌 후대에 의해 덧붙여져 세워진 유가를 의미) 인간성을 억제하고 다양한 각주가 통치자 들에게 이용만 될 뿐이라면서 탈유가를 주장하였다.
또한 이탁오는 성인들의 동심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동심이 중요하다고 하였으며 상대가 지위가 높은 제상이라도 동심이 없으면 존경하지 말고 상대가 지위가 낮은 하인이라도 동심에서 나온것이면 나 자신을 낮추고 절 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나온책들이 《분서(焚書)》 와 《장서(藏書)》 였고 이책들은 당시에 이단이라면서 유학자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게다가 여성이 대해 자유로운 시각을 가진 사람 이었는데 여자의 식견이 짧다는 통설에 반대하고 여자와 남자는 단지 생물학적 형태의 차이지 보는것에는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2]

하지만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 견디지 못한 매담연은 자살하고 이탁오가 여성들을 희롱한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도는등 가뜩이나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눈엣가시인 상황에 이 행동이 결정타가 되어 장문달이라는 유학자가 탄핵 상소를 올려 이탁오를 체포하고 간행된 책은 모든 태워버리라는 어명이 내려진다. 결국 감옥에서 자살하여 생을 마치지만 그의 사상과 책들은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 내려오고 있다.

2.3 기타

훗날 청나라 시절 사람인 모종강과 함께 삼국지연의 판본인 '이탁오 선생 비평 삼국지(일명 '이탁오본')'으로 유명하다.

3 異志

달리 품은 마음. 혹은 배반하려는 마음.

4 二志

두 가지 마음. 바로 위와 비슷하긴 하나 이것은 달리 품은마음이든 같은 마음이든 그냥 두가지 마음만을 뜻한다.

5 已知

이미 알고 있음. 훗, 난 이미 알고 있었어.

6 E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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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바람의 나라의 등장인물

이지(바람의 나라) 참조.

8 터부 타투의 등장인물

이지(터부 타투) 참조.

9 광해군의 세자 이지(또는 이질)

조선의 역대 왕세자
광해군 이혼이지소현세자 이왕

李祗
1598 ~ 1623

광해군의 세자

1598년 광해군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광해군의 왕 즉위후 세자에 책봉된다. 박자흥의 딸인 폐빈 박씨와 결혼한다. 그러나 폐세자와 폐빈은 곧 인조반정으로 인해 폐세자/폐빈으로 강등당하고 유배된다. 유배생활중 몰래 땅굴을 파고 도주를 시도하다 붙잡혔고 세자빈은 자결한다[3]. 이해 폐세자도 자결을 명받아 자결하게 된다. 세자빈과 세자 사이에는 아이가 있었다고 하나 요절하였다.

이름에 쓰인 한자 때문에 많은 문헌에서 그의 이름이 '지' 또는 '질'로 읽히는데, 일단은 '지'라고 하는 것이 원칙인 것으로 보인다. 衣자 부수에 至자를 쓰는데, 이 글자는 사람의 이름으로 쓰일 경우에 그 독음을 '지'로 하는 것이 원칙이며, 조선왕조실록과 전주이씨세보 두 곳 모두 '질'이 아닌 '지'를 독음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나 이 한자는 중국어로 발음할 경우 질 쪽으로 발음되는 경향이 짙어, 이러한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광해군의 폐세자의 이름은 '이지'라고 부른다.
  1. 제목의 의미는 태워질책 이라는 의미로 자신의 책이 불태워질 것이라 예상해서 지은 제목이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난다.
  2. 실제로 이탁오는 당시에 매담연을 비롯한 여성제자들을 양성하고 함께 공부하였다. 이러한 사고가 얼마나 엄청난거냐면 무려 300년은 앞서간 사고이다.
  3. 광해군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