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지 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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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gy Imre[1] 1896년 6월 7일 ~ 1958년 6월 16일

1 개요

헝가리공산주의 정치인. 헝가리를 공산화시킨 스탈린주의라코시 마차시(Rákosi Mátyás)의 후임으로 헝가리 수상이 된 후, 강제수용소 폐지 등 여러 개혁 정책을 실행하지만, 결국 소련이 침공해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한다.(헝가리 봉기). 하지만 대사관을 잠시 나온 사이 소련에게 체포당하게 되고 루마니아로 압송당해 비밀 처형당한다. 현재는 헝가리 공산 지도자중 개념있었던 인물이자 민주화 인사로 대우받고 있다.

2 생애

1896년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지방 소도시였던 커포시바르(Kaposvár)에서 태어나 대장장이로 교육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소속으로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나 공산주의에 심취해 러시아 혁명이후 소련으로 건너가 붉은 군대에 입대한다. 너지는 1921년 헝가리로 귀국했으나 호르티 미클로시 정권 하에서 탄압을 받은 후 다시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 시민권을 취득하여 공산당에 입당한다. 이후 공산주의 교육을 받던 너지는 1946년 헝가리가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공산화되자 재귀국하여 농업부 장관과 의회 대변인 등을 역임한다. 이 과정에서 너지는 공산주의 신념을 유지하긴 했으나 스탈린주의에 갈수록 염증을 느껴 개혁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당 내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쇼프가 소련의 권력을 장악하자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헝가리에서도 해빙 바람이 불어 너지는 다시 당 내에서 힘을 회복하고 제한적이나마 자유화 정책을 펴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공산당 내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라코시 일파에 의해 일련의 개혁들은 계속 방해받게 된다. 이러한 라코시 파의 훼방은 1956년에 들어서면서 라코시의 스탈린주의 정책에 큰 불만을 품고 있던 헝가리인들의 분노를 사게되었으며 이후의 전개는 헝가리 혁명 참조. 어쨌든 혁명이 소련에 의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나 목숨은 보장해주겠다는 소련의 거짓 약속에 속아 같은 해 11월 22일 대사관을 나오던 중 소련군에 의해 기습적으로 체포되어 루마니아로 압송된다. 2년 후인 1958년 비밀 재판에서 너지는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아 6월 16일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는 동유럽 위성국의 지도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겠다는 흐루쇼프의 보복성 의도 때문이기도 했다. 이후 30여년간 너지 임레는 가매장되어 반역자로 매도당하다가 80년대 말 헝가리의 민주화 과정에서 비밀 재판이 불법이었다는 정부 선언을 통해 정식으로 복권되어 세상을 떠난지 정확히 31년만인 1989년 6월 16일 부다페스트에서 공식적인 장례식을 치른다.[2] 이때 약 30만명의 헝가리인들이 너지의 장례식에 운집했다.
  1. Nagy가 성이고 Imre가 이름이다. 헝가리는 서양에서 유일하게 작명순서가 성 + 이름 순으로 되어있다.
  2. 여담으로2016년 현재 헝가리 총리직을 맡고 있는 오르반 빅토르가 이 당시 학생 운동 주도자로서 추도사와 공산 독재에 대한 비판과 소련군의 헝가리 철수 요구 등이 담긴 선언문을 낭독하고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