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티 미클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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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éz nagybányai Horthy Miklós[1]
비테즈 너즈바녀이 호르티 미클로시
(1868년 6월 18일-1957년 2월 9일)

헝가리 왕국군인, 정치인, 외교관.

1 소개

186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켄데레시(Kenderes)라는 곳에서 백작위를 가진 귀족집안에서 태어났다. 1886년에 피우메의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해군사관이 되었고 이후 학사장교 출신으로 해군에 입대하여 1896년 중위로 군생활을 시작했고 1900년에 대위로 진급했다. 중위에서 대위로 한계급 승진에 무려 4년이나 걸린 셈인데 그 이유는 그가 해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니어서라는 슬픈 사연이 있다. 호무룩

그러나 어쨌든 이후 각종 함정들의 함장을 거쳐 1909년에는 콩가루 집안끝판왕 프란츠 요제프 1세전속부관이 되었으니 출세한 셈.

2 승승장구한 군생활

제1차 세계대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대령 신분으로 참전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이탈리아 해군이 그의 밥이었다(…). 오트란토 해협 전투에서 부상을 입긴 했으나, 당시 세계최강 해군전력을 자랑하던 영국 해군프랑스 해군, 이탈리아 해군의 연합함대를 캐발라서 이 전투의 승리로 호르티 대령의 명성이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이 공로로 1918년 2월에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기 직전에 최종적으로 해군 최고 계급인 중장까지 진급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1세(카로이 4세)가 정무에 손을 놔버리고 제1차 세계대전 패배의 여파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되고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도 개별 독립국으로 분리되었다.

3 제1차 세계대전 이후

3.1 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가 전 세계를 풍미한 가운데 헝가리에서도 1919년 소련의 지원을 받은 쿤 벨러(Kun Béla)가 공산정권을 수립했다. 호르티 제독은 이에 반발해 헝가리 동남부의 세게드에서 옛 부하들을 모으고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공산정권 타도를 부르짖었다. 공산화를 우려한 루마니아의 도움으로 루마니아군이 부다페스트로 진군해 쿤 벨러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1920년 3월 1일 헝가리 의회에서 섭정으로 선출되며 정권을 잡게 된다.

호르티 제독의 공식 직책은 헝가리 왕국의 섭정(kormányzó)이었는데 1920년에 연합국과의 강화조약인 트리아농 조약을 체결하면서 영토의 반 이상을 까먹고 헝가리는 내륙국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호르티 제독도 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이 되어버렸다. 바지사장

3.2 왕 없는 왕국의 섭정

손놓고 있던 카를 1세가 이에 반발해 1921년 몰래 헝가리에 입국해 헝가리 왕위에 복귀하려 두 차례나 시도했지만, 호르티가 군대를 동원해 카를 1세의 복귀를 막았다. 결국 헝가리 의회에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문을 닫기로 결의하여 헝가리 왕국은 공식적으로는 왕이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호르티 제독은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이라는 해괴한 직책으로 사실상 헝가리를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헝가리의 영토는 매우 줄어든 상황이었고 북부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등을 상실하고 심지어 오스트리아에도 일부 지역이 넘어가는 등 헝가리는 전통적인 국토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고. 이 때문에 헝가리 왕국 내에는 불만세력이 팽배하여 영토 회복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세계 대공황으로 헝가리가 엄청난 타격을 입은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발발하자 호르티 제독은 아돌프 히틀러와 손을 잡기로 선택했다. 이후 헝가리는 나치 독일과 접근하여 뮌헨 회담에 의해 슬로바키아 남부 헝가리인 거주 지역과 루테니아를, 빈 명령 통해 루마니아에서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얻었고, 또 유고슬라비아 침공 후 동부 보이보디나를 얻었는데. 이들 지역은 전후 진주한 헝가리 육군의 전쟁범죄가 문제화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독소전쟁이 시작되자 헝가리도 추축국의 일원으로 소련에 선전포고했다. 그러나 호르티 제독은 정작 히틀러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싫어했다고 했지만, 히틀러와 살러시의 명을 받은 오토 슈코르체니 SS 보병중령에 의해 아들이 인질로 잡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의 요구대로 유태인들을 내주어야 했다고 한다. 호르티 제독이 같은 독재자인 이온 안토네스쿠와 달리 전범 취급을 면한 것도 이런 사정이 인정됐기 때문이었다. 헝가리의 유대인들이 아유슈비츠로 가기 시작한 것은 호르티 제독의 정권 장악력에 떨어진 1944년으로, 당시 이송 책임자 중 한명이 아돌프 아이히만이며, 이때 혜성같이 등장하여 유대인들을 보호하려고 노력 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라울 발렌베리, 조르지오 펠라스카이다.

4 최후

독일의 패망이 굳어지자 호르티 제독은 1944년 10월 소련과 단독으로 강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이를 눈치챈 독일에 의해 실각하게 된다. 특히 독일의 철인 슈코르체니 중령이 판처파우스트 작전을 개시하여 호르티 제독의 아들 호르티 니콜라스를 유괴하기까지 하자 미클로시 대신 독일의 후원을 받는 극우정당인 화살십자당 당수 살러시 페렌츠(Szálasi Ferenc,1897~1946)가 정권을 잡았다.[2] 이후 호르티 제독은 독일로 끌려가 감시하에서 감금되었다가 종전 직전에 미 육군에게 구출되었다. 유괴된 아들 니콜라스는 종전 후에야 석방되었다.

단순히 나치의 전쟁 수행에 가담만 했기 때문에 전범으로 분류되지 않았고,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는 증인으로 출석한 뒤 석방되었지만 유고슬라비아에서 자국침공 주동자로 주장하며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측에서 거절했다. 1946년 헝가리가 공산화되자 소련은 호르티 제독을 포르투갈로 전격 추방했다. 반면 살러시와 화살십자당 주요 간부들은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로 밀고 들어오자 독일로 도망갔고 역시 전후 미 육군에게 체포되었으나 이 사람들은 헝가리로 송환됐고, 이듬해 인민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한다.

이후 가족과 함께 포르투갈의 휴양지인 이슈토릴(Estoril)[3]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1957년에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회상록을 집필하기도 한 그는 헝가리의 반소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충격을 받아서 "소련군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헝가리를 떠날 때까지" 자신의 유해를 헝가리에 옮기지 말라고 유언했다. 유언에 따라, 제독의 유해는 소련이 붕괴한 후 헝가리가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인 1993년에서야 헝가리로 돌아와 고향인 켄데레시에 묻혔다.

5 여담

에스파냐와는 달리 섭정 체제가 도중에 붕괴해버렸기 때문에, 만약 섭정 체제가 계속되었을 경우 호르티 제독의 후계자 문제는 상상의 영역에 맡길 수밖에 없다. 헝가리 의회가 새 섭정을 뽑든가, 아니면 1921년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오토 폰 합스부르크를 세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새로 호르티 왕조를 개창하거나. 1942년에 호르티 제독은 장남 이슈트반(István)을 부섭정으로 세우면서 잠정적 후계자로 염두에 두는 듯했으나, 그 해 8월 이슈트반이 탄 헝가리 공군기가 추락해 사망한 뒤에는 다음 부섭정을 임명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상당히 웃지 못할 인생을 산 사람인데 바다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 겸 왕 없는 왕국의 섭정[4][5]이라는 비범하고 해괴한 직책, 이것 하나로 그의 인생을 설명하는 게 가능하다(…). 그와 비슷하게 바다 없는 해군 가운데 대중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하나 있는데, 바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폰 트랩 대령으로 그 역시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유보트 에이스 중 한 명이었다.

다소 의외일수도 있겠으나 이 비범하고 해괴한 섭정 각하의 종교는 칼뱅파였다.[6][7]

2013년 12월에 개봉된, SS 장교로 변장하고 유대인들을 풀어주던 레지스탕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Walking with the enemy>에서 배우 벤 킹슬리가 연기한 호르티 제독을 볼 수 있다.

  1. Horthy가 성이고 Miklos가 이름이다. 동양계인 마자르족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곳 답게 이름이나 주소 표기 방식 등이 동양과 유사하다.
  2. 이 정당은 아예 대놓고 깃발부터 나치를 본뜬 정당이고 실제로도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 전후 헝가리에서도 화살십자가(말 그대로 십자가 끝부분이 화살표다) 역시 하켄크로이츠급으로 금기시된 상징. 특히 헝가리군에 의해 직접적인 학살이 벌어진 노비 사드를 비롯한 유고슬라비아 지역과 헝가리와 사이가 좋지 않은 슬로바키아에서는 그야말로 치를 떤다. 우리나라의 모 신인 걸그룹이 이를 사용했다가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영어 위키백과
  3. 이 당시 루마니아 플레이보이국왕 카롤 2세도 퇴위 당한후 여기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4. 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은 찾아보면 꼭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드문 케이스다. 내륙국의 해군 참조.
  5.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이라는 그의 존재는 톨킨의 세계관에서 왕 없는 곤도르 왕국과 이 곳을 통치했던 섭정들의 모델이 된 부분도 있다.
  6. 사실 헝가리 동부와 루마니아 서북부 접경지대, 즉 트란실바니아의 도시지역들은 중앙유럽에서 체코와 함께 개신교가 역사적인 비중을 차지하던 지역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바토리가문도 칼뱅교랑 연관이 있어서 가톨릭으로부터 누명쓴게 아니냐는 설도 있고 헝가리 제2의 도시인 데브레첸의 경우는 칼빈교도들의 로마란 별명이 있을 정도며 루마니아 혁명의 도화선이라 할 수 있는 티미쇼아라(Timișoara)도 개신교세가 은근히 강한 지역이었다.
  7.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은 서부 지역은 로마 카톨릭이 우세이나, 동부나 루마니아,슬로바키아 등에 거주하는 헝가리인들 사이에서는 16세기이후부터 종교개혁을 받아들여 개혁교회의 영향력이 상당하다. 지금도 헝가리 전체인구의 13%정도가 개신교 신자이며, 루마니아 거주 헝가리인들같은 경우 개신교 신자 비율은 47%정도까지 올라간다. 헝가리가 흔히 카톨릭 국가라는 인식이 강해 의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으나 개혁교회의 영향력도 꽤나 유서깊기때문에 헝가리인이면서 개신교인이라는 정체성이 딱히 유별나거나 특이한것은 아니다. 오르반 빅토르 현 헝가리 총리도 개혁교회 신자이다. 여담으로 헝가리 개혁교회는 칼뱅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치고는 상당히 특이하게 감독제(...)를 실시하는 거의 유일한 칼뱅주의 교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