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문

자문(諮問)

자주 틀리는 국어의 하위항목.

우리나라의 고학력자, 심지어는 언론인 대부분이 잘못 쓰는 단어.

본래 뜻은 전문가에게 의견을 묻는다는 뜻이다. 흔히 자문을 구한다는 말을 많이 쓰는데, 잘 살펴보면 단어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답을 구한다는 표현은 있어도, 물음을 구한다는 표현은 없기 때문이다.
단어의 구성을 보면 물을 자(諮) + 물을 문(問)이므로,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전문가에게 질문 거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꼴이 된다. 따라서 "교수님의 자문을 받았다"는 말도 역시 틀린 말이다. 게다가 단어의 뜻을 완전히 반대로 뒤집은 것이므로 어찌 보면 매우 심각한 병크인 셈.
그러나 우리나라 출판 매체 대부분이 이 단어를 전문가의 조언동의어로 쓰다 보니, 올바르게 고치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100%다. 흠좀무.

왜 이런 황당한 현상이 고착되었는가?

국립국어원에서는 이 문제의 원인을 이렇게 본다. [1]

사람들의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기관을 자문기관이라 하는데, 여기에 의미가 전염되어 어떤 일에 조언을 해주는 행위 자체를 자문이라 오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래 자문기관이란 질문(자문) 받는 일을 전문으로 하므로 자문기관인 것인데, 한자의 뜻을 하나하나 새기지 않고 문맥만으로 지레짐작하여 생기는 문제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조언을 했다"라고 하면 왠지 시시해 보이고, "자문을 했다"고 해야 뭔가 품위 있고 고상해 보인다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어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또 하나의 원인으로는 한자 교육 부족을 들 수 있다. 과거에는 비록 전체적으로 저학력자가 많았을지라도, 서당에서 훈장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학을 배우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의 한자, 한문 지식은 지금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적어도 당시 고졸자의 한문 지식이 지금 대졸자보다 훨씬 뛰어나다.
문제는 이런 분들은 공식적인 학력이 지금 대졸자보다 짧기 때문에 아무리 옳은 지적이라도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같은 한글 전용 정책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자어를 꼭 써야 한다면, 적어도 정확히 알고 써야 하는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뭔가 어감이 고급스러워 보인다고 마구잡이로 갖다 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문 지식이 많은 어르신들이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런 부분인데, 아래 세대들이 그분들을 꼰대라고 매도하고, 자기네보다 가방끈이 짧다고 무시하기 때문에 이런 안습한 상황이 빚어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질 급한 한국인들이 말의 앞부분만 듣고 판단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본래는 새 전문가 윤무부 박사님께서 자문에 응하셨다.라는 꼴로 쓰이던 말이었는데, 흔히들 새 전문가 윤무부 박사님께서 자문까지만 듣고 아 윤무부 박사님께서 도움을 주시기로 하셨구나라고 이해하다 보니까 자문이 전문적인 의견 제시와 동의어인 것으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대충 듣고 판단해도 의사소통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다 보니, 그게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사례로는 칠칠이란 단어를 들 수 있다. 본래 칠칠칠칠하다의 어근으로, 언행이 단정하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언행이 단정치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칠칠하지 못하다라고 하는 것이 바른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긍정적인 상황에서 칠칠이란 단어는 잘 쓰이지 않고, 대개 부정적인 상황에서 너는 왜 칠칠치 못하냐?라는 식으로 이 단어가 자주 등장하다 보니, 눈치가 지나치게 빠른 사람들은 칠칠이란 단어만 들어도 부정적인 상황을 예측하고 칠칠이란 단어 자체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느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언론인들마저 단어를 본래 의미와 반대로 쓰는 사례가 생각보다 많음에도 불구하고, 한글날의 주요 비판 타깃이 초딩, 네티즌, 개그맨들이다 보니 이런 사례는 주목을 받지 못한다. 어찌 보면 언론인들의 자성이 필요한 부분인데, 만만한 대상을 타깃 삼아 책임을 회피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