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 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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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상륙작전희생자 위령비.

1 개요

인천 상륙작전 직전 실시된 잊혀진 상륙작전. 공식 홈페이지는 이곳이다.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 육군 독립 제1유격대로 지칭된 일명 明부대 (부대장 이명흠, 772부대라고도 불린다.) 학도병 772명이 상륙한 작전이다.

2 계획

장사 상륙작전은 국군이 포항을 잃고 그 부근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현재의 7번 국도[1]의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구상되었다. 굳이 장사가 선택된 이유는 7번국도는 해안 주변을 따라간다고는 하지만 포항 이남은 내륙이고, 포항에서 장사리까지도 해안에 바싹붙지는 않기 때문에 상륙을해도 보급로를 끊지 못했다. 그러나 장사리와 남정면지역에서는 해안에 붙어서 도로가 나있었다. 다른 영덕군지역은 해안에서 3km정도 도로가 떨어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선의 후퇴속에 동원가능한 전력이 줄어들었고, 전선이 위급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특수부대를 마련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이었으므로 작전부대의 주력은 학도병이 되고 말았다. 결국 작전은 계속 지연되다가 9월 12일에 육군본부 작전국장인 강문봉 준장으로부터 명령을 받아 인천상륙작전 전날인 9월 14일 작전을 개시하는 것이 하달되었다.(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74호) 작전시간이 정해진 이유는 인천상륙작전시 적의 신속한 대응을 늦추려는 양동작전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는 그냥 표면적이유고 사실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위한 촉매였다. 인천상륙작전의 계기는 인민군은 거의 전 병력을 전선에 집중하였다는 점을 노린 것이었다. 하지만 병력이 전선에 전부 집중하였다 하더라도 후발부대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미리 한쪽에 상륙작전을 하여 눈속임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장사 상륙작전의 숨겨진 사실이다.


작전에 참가한 인원은 총 786명으로 부대원 718명, 선원 44명, 통신부대원 8명, 작전부대장과 부관으로 직접 작전에 참여하는 인원이 772명이며, 이외에도 박영선 고문외 2명, 통역 1명, 해군헌병 5명, 전성호외 3명, 미군 안내원 1명으로 14명의 지원인원이 편성되었다. 장비는 해운공사 소유 징발선인 LST 문산호 1척이며, 부대원의 장비는 소총과 탄약등 기본적인 경보병의 장비였다.

이렇게 구성된 장사 상륙작전 부대는 9월 14일[2] 부대원을 모두 싣고 출항했다.

3 전투

문산호는 9월 15일 새벽(9월 14일 이라고 알고있지만 실제로는 14일 부산항를 출발하여 15일 새벽에 도착하였다.)에 상륙지점 근처까지 도착했으나, 당시 상황은 태풍 케지아가 접근하는 여파로 인해 파고가 3~4m로 매우 심해서 풍랑이 거칠었고 설상가상으로 닻마저 끊어져 배는 좌초되고 적의 집중사격을 받게 된다.

이런 악조건하에서도 학도병들은 장사리에 성공적으로 상륙하여 전투를 벌이고 며칠간 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으로서 적군이 2개 연대가 동해안에 상륙했다고 말할 정도로 주의를 분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원래 3일간의 작전예정이 잡혀 있었으나 문산호가 좌초된 관계로 철수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연하게도 9월 16일부터는 후방을 차단당한 조선인민군 제5사단의 정예부대인 2개 연대 규모의 부대가 T-34/85 전차 4대를 앞세우고 북상하여 상륙부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상륙부대는 9월 19일까지 치열한 전투끝에 간신히 상륙지점으로 되돌아와서 해군이 지원한 LST 조치원호를 타고 귀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사 139명, 부상 92명의 손해를 입었으며, 40여명 정도는 적의 집중사격등으로 인해 승선기회를 놓치고 적의 포로가 되는 큰 손실을 기록한다.

4 결과

상륙작전 자체의 엉성함과 예정을 훨씬 넘겨서 지속된 전투등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투로만 적군 270명 사상에 포로 4명을 잡았으며, 방어시설인 토치카 11개소를 파괴하고 주 목적인 교통로 차단을 위해 교량 2개소와 도로 6개소를 파괴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적군 보병무기를 노획해서 전투에 활용했다.

하지만 진정한 효과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양동작전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해안에 2개 연대가 상륙한 것으로 적이 오판했으며, 치열한 낙동강 전선에서 정예부대를 빼서 상륙부대에게 반격을 하는 등 적군이 마지막 발악으로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려고 하는 압박을 동해안에 한정해서 크게 줄여주었다.

5 평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친필로 장사상륙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정도로 작전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 작전의 성공은 부대원들의 엄청난 혈전끝에 이룩한 것이며, 작전의 구성이나 지원면에서는 욕이 안나올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안좋았다. 더불어 일반인이나 심지어 전문가들도 이 작전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황이 많다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있다.

  • 부대원의 대부분은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학도병으로, 훈련기간은 2주에 불과했다. 솔직히 말해서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콩튀듯이 흩어지거나 적군에게 항복하지 않은 것만 해도 용기가 엄청나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병력을 가지고 앞서 언급했듯이 숫자적으로 엄청나게 우세하며 전차와 포병의 지원을 받는 조선인민군 정예부대를 상대로 며칠간 혈전을 벌인 것이다.
  • 부대의 유일한 지원장비는 LST 1척[3] 으로, 해당 함선은 상륙전용이라 원양항해에는 부적합하며, 고작 1척으로 상륙과 이후 철수를 모두 담당해야 하므로 유사시 탈이 나기 쉬우며, 이 점은 현실화되었다. 덕분에 상륙 초기부터 적의 집중사격으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하고 그나마 없는 탄약과 장비를 망실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미 해군이 지원해 준 구축함 한 척이 가능한 한 함포로 엄호 사격을 해 주어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였다.
  • 유사시 지원을 받을 준비가 없다시피 했다. 당장 상륙선이 좌초하면서 무전기가 바닷물을 먹어서 상태가 영 안좋더니 곧 고장나서 공군의 지원이나 함포사격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예비로 쓸만한 함선도 없어서 문산호가 좌초되자 대신 이들을 구출할 함선을 찾아내는데 시간이 걸렸으며, 구출선을 호위할 전력도 없다시피했다. 덕분에 구출선 근방에 박격포탄이 떨어지면서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40여명이 철수하지 못하고 포로가 된 것이다.
  • 3일간의 전투만 진행한다고 딱 3일간의 전투물자만지급했다. 덕분에 상륙당시의 혼란 및 철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적의 주력부대와 교전하는 막장사태가 벌어지자 식량과 탄약이 모자르게 된다. 이 상황에서 8일간이나 버틴 것이 기적이다.
  • 진짜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해당 작전이 끝나고 서울을 탈환한 후 북진작전이 시작된 시점인 1950년 10월 5일에서야 부대원들에게 입대명령과 036군번이 내려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그 때까지는 법적으로는 군번도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싸우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돼버린다. 애초에 장사 상륙작전이 끝나고 부산항에 도착한 후에나 육본직할독립제1유격대대가 창설돼서 자신들이 거기 속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으니...
  1. 당시의 조선도로령상 21번 국도
  2. 사실 13일 당시에는 태풍이 심하게 몰아쳤었고 유엔군도 15일 새벽6시까지 작전을 실행시키지 말라는(이유는 인천상륙작전의 발각 우려때문이다.) 명령으로 인해 출항 날짜를 14일로 잡은것이다.
  3. 본문에 언급했듯 징발된 해운회사 선박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많은 LST들이 우방국 해군 및 민간 업자들에게 무상 혹은 저가로 공여되었기에 상선으로도 많이 쓰였다.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에 이런 풍경이 잘 묘사되는데, 바닷가 마을 사람들이 LST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 만큼 흔했음을 알 수 있다. 문산호는 비록 군에 징발됐지만 선원들은 여전히 민간인이었는데, 본 작전에서 인민군에게 피격되면서 선장 등 선원 여럿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현재 침몰한 잔해의 인양 혹은 해상 공원화가 추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