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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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벤허전차경주 장면.

Chariot Racing. 고대 시대에 있었던 경기대회의 일종. 사실상 현대 모터 스포츠의 시조로 볼 수 있는 스포츠 레이스 종목이다.

1 역사

원래 전차는 고대에는 승마용구가 없고, 품종 자체가 약해서 타기 쉽지 않았던 관계로, 대신 말을 이용해 끌고다니면서 기동성을 살려서 싸우는 병기의 일종이었다. 초기의 전차경주는 이러한 전차의 기동성(속도)에 주목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흔히 전차경주라고 하면 로마 제국을 떠올리기가 쉽지만, 의외로 전차경주의 원조는 로마 제국이 아니라 그리스였다. 올림픽 경기의 일종이었으며, 이후 그리스 문화를 흡수한 로마에 의해 신을 경배하는 축제의 클라이막스 행사로 발전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적인 스포츠로 발전하게 됐다.

로마에서 가장 큰 전차경주 경기장이었던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최대 15만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것은 콜로세움 수용 인원의 3배나 된다.


고대 로마의 전차경주장이었던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의 모습 (1978). 오른쪽의 유적은 황궁이 있던 팔라티누스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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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은 현대의 레이싱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길이와 구간을 가진 서킷 내를 전차로 달리고, 가장 먼저 들어오는 전차가 승리한다. 이 외에 달리 명시되는 룰은 없다. 총 4개 팀이 참전하며, 팀은 각각 색(빨간색, 녹색, 파란색, 흰색)으로 구분된다. 레이서들은 자기 팀의 색을 한 셔츠와 헬멧을 써서 팀을 구분했고, 이 4개 팀은 각기 다른 스폰서들이 맡았다고 한다.

고대 로마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벌어진 경주의 경우, 총 7바퀴를 달려서 먼저 들어오면 승리했다고 한다. 문제는 레이서들이 쓰는 헬멧 이외에 전차 자체가 아무 안전장치가 없었고, 당시 레이서들도 현대와 마찬가지로 속력을 높이기 위해 차체를 최대한 가볍게 했기 때문에 내구력이 떨어져서 경주 중에 전차가 인수분해되거나 말고삐를 잘못 잡으면 팔이 꼬여서 전차에서 떨어진 채 질질 끌려다니다가 죽는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차를 의도적으로 상대에게 충돌시켜서 코스이탈시키거나 파괴하는 게 반칙이 아닌 레이싱 전술의 일종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또한 관중들이 격렬한 레이싱일수록 더 환호했기 때문에 레이서들이 짐짓 위험 상황을 만들기도 해서 어느 영화처럼 목숨을 거는 격렬한 레이싱이 자주 벌어졌다고 한다.

또 현대 모터스포츠처럼 치프와 정비사들이 중요하진 않았지만, 지원이 필요했다고 한다. 고속 주행으로 격렬한 마찰이 일어나면서 바퀴나 바퀴축이 불타는(!) 상황이 종종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원팀이 물병을 들고 트랙 가까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네 전차가 지나갈 때 물을 끼얹어서 불을 껐다고 한다. 어쩐지 포뮬러 원의 정비팀과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고대에는 전차가 굉장히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전차의 소유주는 대부분 부자들이었다. 보통은 이 부자들이 팀 하나를 맡아 훈련받은 노예들을 레이서로 출전시켰지만, 평민이면서 전속계약을 맺고 경주를 생업으로 삼는 프로 레이서도 존재했다. 승자에게는 당연히 상금이 수여되며, 노예 레이서의 경우 신분해방의 기회도 부여되었다.

지금도 전차경주는 계속되고있다 카더라

3 인기

당시 전차 경기의 인기를 쉽게 짐작하게 해 주는 사실: 인류 역사상 가장 돈을 많이 번 스포츠맨은 2세기에 대활약한 스페인 출신 전차 기수인 가이우스 아풀레이우스 디오클레스(Gaius Appuleius Diocles)였다. 가이우스는 전차 경기로 35,863,120 세스테르티우스를 벌어들였는데, 이를 2014년 화폐단위로 환산하면 약 18조원이다. 참고로 현대의 최고 부자 스포츠맨인 타이거 우즈의 재산이 1조원이 안된다.

서로마가 몰락하고 동로마 시대로 바뀌면서 전차 경기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 콘스탄틴 대제가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로 옮기고 가장 먼저 시작한 사업이 히포드롬(경마장 겸 전차경기장)의 확장 공사였던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로마의 국교가 크리스트교로 바뀐 뒤 검투사 경기가 금지되면서 볼거리가 전차 경기만 남은데다, 전차 경기가 워낙 위험하고 스피디한 볼거리였던지라 동로마인들은 모두 전차경기 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사망자도 많이 나왔고(살아서 은퇴한 디오클레스가 매우 특이한 케이스라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위험한 경기에 팬보이들이 위험한 물건(못을 박은 점토판 따위)을 경기장 안에 투척하기까지 해 실전과 맞먹을 만큼 위험했다고.

이 전차경기 팬들을 "Deme(딤)"이라고 했다. 당시(비잔티움 시대) 콘스탄티노플의 서민 사회는 딤을 중심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딤끼리는 서로 격렬하게 반목했기 때문에 당시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의 정치, 경제 등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심지어 종교적인 학파의 노릇까지 하였다. 히포드롬은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인구의 20퍼센트 가량(십만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는데, 이 대경기장을 가득 메운 군중들은 모두 청색 아니면 녹색 딤에 속해 있는 팬보이들로 [1] 상술한 대로 대단히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무리였다. 6세기에는 이들의 폭동으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죽을뻔한 적도 있다(사망자만 삼만명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시민 총수가 50만명이 좀 넘었다...). 오늘날의 축구 훌리건 따윈 저리 가라다. 쉽게 말해서 딤은 스포츠 팬덤, 학파 등등의 기능을 모조리 겸비한 일종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훌리건 아저씨들이 특정 정당의 당원을 겸했고 교리 및 철학 논쟁을 벌였으며, 빡치면 황제 앞에서 폭동도 일으켰다는 것(...) 굳이 한국의 상황에 맞게 비유한다면, 서울 시민 중 LG 트윈스팬이 이기일원론을 밀고 두산 베어스팬이 이기이원론을 밀면서, 감정이 격해지면 폭동까지 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이상 청와대로 간다! 오케이! 하다가 서울 시민 천만명 중에 육십만명이 죽었다고 하면 더 똑같다

4 픽션의 전차경주

  1. 원래 로마시대에는 적, 청, 녹, 백의 네 딤이 있었는데, 동로마시대에는 녹, 청만 남았다. 청색 딤은 오늘날 그리스도교 정통으로 여겨지는 그리스도 양성론을 믿었고, 녹색 딤은 단성론을 믿었다.